런던의 녀석들은 머리가 돌아 버린 게 분명해. 나는 녀석들한테 말했어. 리즈를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내가 영국을 떠난 순간부터 아니, 훨씬 전,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뒤처리를 한 게 분명해. 빚을 갚아주고, 식료품 가게 주인과 합의하고, 집주인한테 밀린 방세를 치르고, 무엇보다도 리즈 문제를 해결했어. 그건미친 짓이고, 생각도 못한 짓이야.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랬을까? 피들러를 죽이려고? 자기네 첩보원을 죽이려고? 자신들의 공작을 방해하려고? 스마일리 개인의 생각이었을까? 스마일리가 알량한 양심 때문에 저지른 짓일까? 이렇게 된이상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야. 리즈와 피들러를 이 사건에서 떼어 놓고 나 혼자 책임을 지는 거지. 어쨌든 나는 정보부에서 쫓겨난 몸이 아닌가. 피들러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리즈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어.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냈지? 그날 오후스마일리의 집에 갈 때 절대로 미행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는데, 그리고 돈 - 내가 본부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를 놈들은 어디서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건 오로지 내부용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는데.. 그런데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당혹감과 분노와 수치심에 사로잡혀 교수대로 다가가는 사형수처럼 뻣뻣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 P282

어쨌든 그들이 이 공작을 생각해 냈소. 한 사람이 미끼가되어서 제 발로 덫에 걸려들자. 관리관은 그렇게 말했소. 덫에걸린 시늉을 하면서 상대가 미끼를 무는지 보자고 그후우리는 철저히 계획을 세웠소. 이른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방법이었지요. 스마일리는 그걸 <귀납법>이라고 불렀소. 만약 문트가 우리 공작원이라면 우리는 문트에게 어떻게 공작금을 지불했을까. 파일은 어떻게 보일까 등등. 피터는 1, 2년전에 어떤 아랍인이 동독 보위부의 내부 조직을 우리한테 팔려고 했지만 우리가 단호히 거절한 일을 기억해 냈소. 나중에 우리는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았지요. 피터는 그 실수를 역이용하자고 제안했소.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랍인의 제의를 거절한 척하자고. 그건 아주 절묘한 착상이었소.
그다음은 짐작할 수 있을 거요. 나는 엉망으로 무너지는체했소. 술에 절고 빚을 지고, 공금을 횡령하고••••• 모두 앞뒤가 맞아떨어졌소.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경리과의 엘시가맡았고, 그 밖에도 한두 명이 거들었소. 그들은 그 일을 아주잘해 냈지요.」 리머스는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 P286

그는 불빛을 손으로 막으며 장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있는 리즈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금속 쐐기를 다시 내려가 리즈옆에 섰다. 그녀는 죽어 있었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검은 머리는 비를 막아주려는 듯 뺨을 덮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다. 마침내 두세 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그는 투우장에 끌려나온 눈먼 황소처럼 주위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쓰러질 때 그는 보았다. 대형 트럭 사이에 짓눌린 작은 자동차를, 그리고 유리창을 통해 쾌활하게 손을 흔들던 아이들의 모습을.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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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피들러가 생각에 잠긴 어조로말했다.
「문트가 나 자신 때문에, 나에 대한 증오나 질투 때문에 나를 괴롭혔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어쨌든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그걸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랫동안 그 고통을 당하면서 줄곧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죽거나 까무러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건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런데 고통의 강도는 바이올린 주자가 E현에 도달하듯 계속 올라갑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올라갑니다. 고통은 그런 거예요. 올라가고 또 올라가지요. 자연이 하는 일이라고는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한테 듣기를 가르치듯 이 소리에서 저 소리로 한 단계씩 당신을 끌어올리는 것뿐입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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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지 않고 좋은 가치들을 성실히 추구하려 해도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순간이 다 강렬하고 충만하지는 않다.
오히려 봉우리가 높아지는 만큼 골짜기도 깊어지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든다.
봉우리가 아닌 시간들에 좀더 애정을 갖고, 그 순간들의 품질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고도는 가장 우뚝 솟은봉우리의 높이로 정한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얼마나 잘사는지를 평가할 때 그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좋은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영광의 순간이 있다면 좋겠지만 누구도 거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다. 짜릿하고 즐거운 시간도 지나간다. 결국에는 인생의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수롭지 않은 순간, 평범하고 시시한 시간들의 온도를 어떻게 하면 조금씩 높일 수 있을지 궁리했다. 심리학자들과 뇌 과학자들의 조언이 참고가 됐다. 인간의 마음은행동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고 노래를 부르면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며, 허리를펴고 성큼성큼 걸으면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고. 올해 나는 그런 습관을 들여보기로 했다. 새해 첫날에는 평소 좋아하던 팝송의 가사를 외웠다. 심심할 때 부르기 위해서다. 재미있었다. 어릴적에는 가사를 암기하는 곡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제는 그렇지않다는 걸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 P262

‘왜 사는가‘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은 이렇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 이 분 전에 죽는 것이 싫어서 자살하지앉았고 일 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 일 분 일 분이쌓여 내 삶이 됐다.
"이미 태어났고, 죽는 것이 무섭고 싫다"라는 문장에서 뒷부분에 신경을 쓰면 자기 삶이 시시하게 보인다. 앞부분에 집중해야 인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닫게 된다. 곰이며 호랑이며 구미호가 이상한 음식들을 참고 먹으며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인간의 삶. 난 그걸 공짜로 받았다. 이리저리 투덜대기도 하지만 일 분 전에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을 선택했고, 지금도 그렇다. 삶의 목적은 모른다. 그래도 수억 번, 수조 번 삶을 결단했다. - P265

세상살이와 연결 지어봐도 그렇다. 어떤 개성은 그저 당사자의 주변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평생 흠결이라 여겼던 특질이 결정적인 순간 인생을 떠받치고 들어올리는 지지대이자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그 반대도 가능하다. 지금 내가 파악하는 나의 모습은 심리적, 서사적총체와는 거리가 먼 찰나의 파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술을 마시거나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를 곱씹는 게 해결책일리 없다. 알코올이나 애착 이론은 즉각적이고 달콤하기 때문에 그것이 도피임을 뇌가 금방 알아차린다. 게다가 둘 다 뒷맛이안 좋다. 퍼마실수록. 그보다는 스스로에게 실제적인 과제를 주는게 의외로 유용하다. 청소나 운동 같은 귀찮고 힘들다는 게 핵심이다. 조금만 참으면 ‘고난에 맞서 싸우는 나‘라는 자기 서사를 마음이 이내 지어낸다.
어쩌면 자기혐오 그 자체에 순기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선이요 불순물 없는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기긍정의 화신들을 TV나 인터넷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 그늘 없는 얼굴을보고 있노라면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이 든다. 그럴 때면 인간은 괴물이 되지 않는 대가로 자기혐오라는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 P275

"인문학은 ‘분별력‘이라는 가치를 만듭니다. 그게 인문학의 쓸모입니다." 상상속에서 혼자 열변을 토했다. "분별력은 현대사회가 값을 잘 쳐주지는 않지만, 대단히 귀중한 자원입니다."
사실 이 자원은 점점 희소해지고 있어서 가치가 오르는 중이다. 부분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의식이나 종교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큰 어른 역할을 할 지도자도 딱히 안 보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뿐 아니라 사리 분별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다. 삶의 방향과 의미를 일러주는 타인은 스승이 아니라 내 지갑을노리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기 착취 사회를 살고 있기에 분별력이 더 절실해졌다고도 본다. 이 시스템에서 개인의 가장 큰 적은 종종 그 자신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자기 착취라는 말은 노동 관련용어였다. 자영업자의 과로, 자기 계발에 대한 강박, 혹은 ‘열정페이‘ 같은 이슈를 다룰 때 쓰는 이제 바야흐로 기행으로도 돈을 버는 관심경제 attention economy 세상이 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뿐 아니라 존엄성까지도 쥐어짜낸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네 느낌을 믿어봐‘ 같은 대사가 자주 나온다. 한국사회에 여전히 남은 억압적인 분위기에 분개하는 이들은 욕망을 긍정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느낌과 욕망이 그리 현명한, 혹은 따뜻한 선장이던가. 오히려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폭군 아니던가. 느낌과 욕망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 아마추어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련다. 내가 착취당하는지 아닌지 점검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노동력을 넘어, 존엄성의 차원에서는 더 그렇다. 수치심 같은 느낌이 도움이 될 테지만, 더 필요한 능력은 역시분별력이라고 본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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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머스는 그녀의 침대,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침대에 누워 있고, 리즈는 그 옆에 걸터앉아 그에게 입을맞추거나, 얼굴을 맞댄 채 가스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면 리머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즈는 희미한 수평선에 눈길을 주듯 마음이잠깐씩 리머스를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그의 말투며 몸짓,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 아니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떠오르곤 했다. 끔찍한 것은, 그녀의 생각이 거기에 머문 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하려고 해도 기억할 난한 추억의 재료가 없었다. - P142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는 그것이 궁금했다. 거기에 대해 관리관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수법에 대해서만 말해 주었을 뿐이다.
<모든 정보를 한꺼번에 선뜻 내놓지 말게. 그들이 정보를얻어 내려고 애쓰게 만들어야 돼. 세부적인 사항으로 그들을혼란시키고, 중요한 사실을 생략하고, 자네가 늘 다니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게. 퉁명스럽게 굴고, 고집을 부리고, 까다롭게 굴게. 고래처럼 술을 퍼마시게. 이데올로기에서 양보하지 말게. 그들은 그걸 믿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자네를 매수한 사람으로 다루고 싶어 해. 그들은 정반대의 이데올로기가 서로 충돌하기를 원해. 그들이 원하는 건 명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전향자가 아닐세. 무엇보다도 그들은 <추론》하기를 원해.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네. 오래전에 준비해 두었지. 하찮은 일들, 까다로운 단서들. 자네가 보물찾기의 마지막 단계야.> - P153

그때 그들 ㅡ 리머스, 관리관, 피터 길럼 ㅡ 은 서리 주에있는 관리관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관리관은 그 황량하고 작은 <일곱 난쟁이의 집>에서, 아름다운 조각이새겨지고 상판이 놋쇠로 된 인도산 탁자들에 둘러싸인 채 구슬같이 생긴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피들러는 고위 사제를 모시는 종자(從者) 같은,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사제의 등에다 비수를 꽂을 수도 있는 그런 자라네. 문트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 길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피들러는 문트를 몹시 미워해. 피들러는 물론 유대인이고, 문트는 완전히 정반대야.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지. 피들러한테 무기를, 문트를 파멸시킬 무기를 주는 게 우리의 임무일세. 그는 길럼과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리머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기를 사용하도록 피들러를 부추기는 것은 자네 임무가 될 걸세, 리머스, 물론 간접적으로 자네가 그를 만나는일은 없을 걸세. 적어도 나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네.
그때 그들은 모두 함께 웃었다. 길럼도 웃었다. 그때는 멋진 농담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관리관의 기준으로 보면 유쾌한 농담임에 틀림없었다. - P159

사내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사냥 오두막 같았는데, 반쯤은 낡았고 반쯤은 새로 꾸며져있었다. 머리 위에 희미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이어서어두컴컴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문을 연 것 같았다. 구석구석에 관청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의 주의서, 관청 특유의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문, 용수철 카트리지 방식의 든든한 자물쇠. 아주 안락하게 꾸며진 응접실에는 짙은 색의 묵직한, 그러나 심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가구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러한 비밀성의 결여야말로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동독 정보부의 관료주의라고 리머스는 생각했다. 그는 영국 정보부에서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 P161

남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은 명백한 심리적 위험에 노출된다. 남을 속이는 행동 자체는 특별히 힘들지 않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이고, 직업적인 전문 기술의 문제다. 대다수사람은 쉽게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기꾼이나 연극배우나 도박사는 무대에서 내려와 그의 재주에 탄복하는관객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비밀 첩보원은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 도 먼저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다. 그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그는 가장 자연스러운 충동과 맞서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큰돈을 벌었다 해도, 자신이맡은 역할 때문에 면도칼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할 수 있다. 아무리 박식하다 해도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진부한 말만중얼거려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고 아버지라면 가족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한테 털어놓는 것을 삼가야 한다.
자신의 속임수 속에 영원히 고립된 사람은 압도적인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알고 있는 리머스는 최선의 방어책에 의존했다. 혼자 있을 때라도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고 자신이 채택한 성격이나 인격을 가진 인물로 살도록 자신에게강요한 것이다. 발자크‘는 임종할 때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안부를 염려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지 않은 리머스도 자신이 창조한 인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가 피들러에게 보여 준 성격,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불안, 부끄러움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오만함은 그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격을 연장한 것이었다. 발을 조금 질질 끌면서 걷는걸음걸이,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점, 음식에 대한 무관심, 술과 담배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을 때도그는 이런 습관에 충실했다. 런던 본부가 저지른 잘못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런 습관을 더욱 과장하기까지 했다. - P188

나는 문트한테 이유를 물었고, 부탁도 했습니다. 왜 그들을 체포하지 않느냐? 왜 내가 심문할 시간을 한두 달이라도 주지 않느냐? 그들이 죽어 버리면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러자 문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엉겅퀴는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문트가 미리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문트는 훌륭한 첩보원입니다. 아주훌륭하죠. 당신도 알다시피 문트는 우리 보위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이론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밤늦게 문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요. 문트는 커피를 마십니다. 다른 건 절대 안 마시고 항상 커피만 마시죠.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은 너무 내성적이어서 훌륭한 첩보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방첩 활동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난답니다. 방첩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를 씹고 있는 늑대 같다고, 그들이 새로운 사냥감을 찾게 하려면 그 뼈다귀를 빼앗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압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문트는 지나쳤어요. 문트는 왜 피어레크를 죽였을까요? 왜 피어레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갔을까요? 피어레크는 신선한먹이였는데, 우리는 아직 뼈에서 고기를 발라 내지도 않은 상태였어요.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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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낭만적인 인간이 아닌지라 저런 조언을 그냥 ‘걱정에 압도되면 안 된다‘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삶이 망가지는 사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자세가 파국을 낳는 과정을 몇 번 봤다. 따지고 보면우리 뇌가 맡은 임무가 바로 걱정이다. 인간의 뇌는 자연이 만든 최고의 시뮬레이터다. 엄청난 산소를 소비하며 눈앞에 없는각종 상황을 쉬지 않고 시뮬레이션한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생존 도구다. 그 고급 도구를 사용하는대가로 우리는 끊임없이 앞날을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것들을 걱정한다.
불확실성이 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나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키팅 선생님 말씀보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에 더끌리는 편이다. 사실 내 생각은 좀더 암울한데, 세상 누구도 미래를 자기가 원하는 그 모습 그대로 창조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내 생각에는, 사람은 비전을 만들고 거기에 기대 불안을 다스릴 수 있다. 비전은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런 비전조차 힘을 발휘한다. - P205

사람이 도덕 판단의 기준을 몇 종류나 가졌는지에 따라 정치성향이 좌우된다는 도덕심리학 이론도 있다. 그에 따르면 진보주의자는 어떤 일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지, 그리고 공정한지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거기에 더해 공동체에 대한 헌신, 질서에 대한 존중, 고귀함을 향한 노력 같은 요소도 고려하는 것 같단다.
내게는 현대 심리학자들보다 20세기 정치 이론가 러셀 커크의 말이 더 다가온다. 커크는 진보의 가치를 인정하는 보수주의자였다. 다만 커크에 의하면 보수주의자는 보다 신중하다. 사회가 복잡한 유기체임을 이해하고, 인간의 지혜가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모든 걸 걸지 않고 전통을 존중한다.
변화의 시대에 인기 없는 태도겠다. 그래도 불확실한 접근법보다 오랜 가치를 극적인 돌파구보다 흔들림 없는 원칙을, 순간의 감홍보다는 일관성을 중시하는 태도를 지닌 이에게 품격이 깃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품격은 가치, 원칙, 일관성을 위해 이익, 자존심, 감정을 억누를 때, 다시 말해 책임을 피하지 않으며 잘못을 인정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 P209

두려워하는 사람은 애도하지 않는다. 애도는 타인을 향하는마음인데,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그를 휘감는다. 나는 2022년 10월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참사를 현정부가 애도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들은 탄핵될까봐 겁에 질렸다. 그래서 추모의 방식을 통제하려 든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여러 말들을 마찬가지의 이유로 의심한다. 자신이나 진영의 이익을 염두에 둔 꿍꿍이가 섞여 있는 것이 훤히 보여서다. 대통령 부부가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합성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비나이다~‘라고 적은 신부와 그걸 패러디라고 옹호한 또다른 신부도 이해할 수 없다. 깊은 슬픔은 사람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만든다.
슬퍼하는 자는 칼럼을 쓸 수 있는가. 애도하는 인간은 타인을향해 속셈이 있다거나, 겁에 질렸다거나, 경건하지 않다며 비판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사회 전체가 정략으로 음탕해졌고,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담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는, 그런 시대에 비극을 겪은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 P214

무엇 때문에 그리 신이 났는지 두 녀석은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까불고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차로 옆에서 그렇게 노는 것은 위험하다고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꼬마들이 신나게 까불며 자라서 젊음을 만끽하고, 대형 공연을 구경하고, 축제의 열기에 흠뻑 젖기를 바랐다. 핼러윈도 즐기기를 소망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차가 오지는 않는지, 아이들이 차로에 뛰어들지 않는지만 살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불상사를 막을 수 있게. 꼭 필요하다면 내 몸을 차도로, 자동차 앞으로 날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른의 임무를 생각했다. - P215

친구는 상사가 아니다. "너 그거밖에 못해? 지금 시간이 모자라는데 꼭 잠을 자야 해?"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내 친구일 수없다. 그런 친구가 있다면 단호하게 "나는 네 부하가 아니다"라고 대꾸해줘야 한다. 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꿈이 ‘지금 임금이 밀리고 추행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나를위해 참으라‘고 속삭인다면 결연하게 거절하라. 꿈은 동반자이지, 삶의 주인이 아니다.
아무리 속으로 친구라고 믿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면 결국 멀어진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이라도 짬을 내 안부를 물어야 한다. 서로 어떤 처지인지 살피고 상대에게 관심이 있음을 확인해야 우정이 유지된다. 꿈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꿈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걸작을 쓰는 것이다. 바로 그 꿈 덕분에 내가 바라봐야 할 곳을 정확히 알게 되고, 남을 시기하지 않게 된다. 이 친구와 오래도록 깊고 다정한 대화를나누며, 단단하고 풍성하게 살고 싶다. - P234

근대 시민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삼국지를 이중으로 소비한다. 충, 의, 천하 같은 단어를 비유로 받아들이고, 그런 현대적해석을 인간관계와 처신에 적용한다. 유비가 조운 앞에서 제아들을 집어던졌듯, 타인의 마음을 사려면 화끈하게 내 걸 버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삼국지』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를 칼럼에 써먹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는 동안에는 그냥 전근대인이 되어버린다. 삼권분립이나 일사부재리원칙이 사람 마음을 뜨겁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한 개인이 수십만 대군 앞에 당당히 서고, 흉기를 들고 일대일로 적과 무술을 겨루며, 흠모하는 상사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 모습에 열광한다. 다들 마음 깊은곳은 고대인이다.
한데 그런 분리가 그리 깔끔하게 이뤄지지는 않는 것 같다.
다른 이의 세계관을 탐닉하다보면 결국 거기에 젖는다. 그 시대의 눈으로 주변을 보게 된다. 소설가 김훈이 "나와 내 또래 남자들은 『삼국지』를 너무 많이 읽어서 이 모양이 아닌가 싶을 때가있다"「우리 또래는 三國志를 읽어서 망했다」, 조선일보, 2017.
6. 30.)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 것같았다. - P407

아마 이런 예상은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하는 예상이건, 다른 이들이 펼친 예상이건, 모두 들어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학기술 잡지 와이어드의 초대 편집장 케빈 켈리가 거의 삼십 년 전에 사용했던 표현들을 빌리고 고쳐서 써본다. ‘태어난 것과 만들어진 것이 섞여 생태계를 이루고, 거기에서 새로운 야생이 태어날 것이다.‘ 그 야생의 생태계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모두가 걱정하는 인간의 일자리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끝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다들 그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니까. 그리고 우리는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개인, 예술, 의미 같은 개념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무너지기는 할것 같다.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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