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라는 감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하고있는 것이다. 영민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이 점을 간과할 리 없다.

후회(poenitentia)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에티카」에서

‘후회‘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 자신이 모든 불행을 직접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일종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에만, 우리는 후회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불운을 자기가 초래한 것이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선택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면 모든 불행을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런 사람은 후회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힘들다. - P393

희망(spes)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결과가 어느 정도 의심되는 기쁨‘, 그러니까 ‘불확실한 기쁨‘이 바로 희망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확실‘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찍어야만 한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기쁠 텐데,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불확실성‘ 아닌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희망이라는 감정 뒤에는 우리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 자신의 희망대로 상황이 펼쳐진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크면 클수록, 현재 우리가 느끼는 불확실성은 그만큼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다. 희망이 주는 불확실성을 견디기에 너무나 나약하다면, 우리는 희망이 넌지시 보여 주는기쁨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칠 것이다. 희망이 약속하는 기쁨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몸을 떨 필요가 없을 테니까.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 그러니 사실 어느 하나를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가 제거되면, 나머지 다른 하나도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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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또한 분노에 대해 더 명료하게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고 말이다. 자신과 유사한 대상,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 그것은 바로 돈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다. 돈이 없어 자신의 딸 소냐를 창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느 퇴역 관리, 자신에게 돈을 보내느라 가정교사로 있던 집에서 봉변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여동생 두냐, 전당포 노파가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복여동생 등.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수치심을 정의롭지 못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게 된다. 자신에게 가해진 수치심이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대부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수치심의 대상은 정의롭지 않은 대상으로, 그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 개인적인 악이 공적인 악으로 승화된다고나 할까. - P291

비록 헌 물건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소중한 추억이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면, 라스콜리니코프는 금반지를 들고 전당포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중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개인에게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그저 낡은 중고품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느낀 모멸감은 사실 전당포 노파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다. 그가 느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은 소중한 추억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근성,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부여한 가치를 탐욕스러운 노파에게 철저히 부정되었다는 자괴감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직 여리기만 한 그가 수치심의 진정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내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니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에게 모든 악을 되돌려 버렸던 것이다. - P293

분노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최소한의 연대 의식, 혹은 유대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홀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 혹은 동료와 함께 있지만 스스로 왕따라고 느끼는 사람에게서 분노의 감정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둑한 길을 홀로 걸어갈 때 힘센 불량배를 만나 무릎까지 꿇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량배에 분노하기보다는 단지 수치심만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나애인이 불량배를 만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장면에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그 불량배의 만행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 아닌가. 불량배는 한 명이지만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은 직접 해악을 당하고 있고,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은 언제든지 그 불량배로부터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약자들이 연대하는 조직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타자들이 어떤 해악을 입고있는지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는 해악을 막기 위해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우리라는 의식이 없다면, 해악을 끼치는 강자에 대한 분노도 발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 P298

불구로 태어난 아이에 대한 적의의 진정한 대상은 어쩌면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불구로 태어난 아이는 버드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의 사랑 없는 삶을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히미코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지. 불행히도 나약한 버드는 칼날 위에 선 채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드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불구가 된 아이는 수술을 받게 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의 문제는 사실 뇌헤르니아처럼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 단순한 육종으로 확인된다. 버드는 결단에 주저했지만, 아이의 성장, 의사들의 수술,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 등이 버드 대신 결정을 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버드는 자의 반 타의 반 수술하는 아기를 위해 자기 피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버드의 장모는 그런 사위가 기특하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버드는 엄청난 활약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훌륭한 성장소설이라고,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행복을 버리고 인류애를 기원하는 성숙한 인격으로 변모했다고들 말한다.
과연 이런 평가가 사실일까? 분명 버드가 불구가 된 아이에게 적의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버드가 스스로 적의를 거두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저 주변의 변화에 따라 적의를 거두는 쪽으로 변했을 뿐이다. 이것이 정말 성장일 수 있을까? 성장이라고 해도 너무나 기이한 성장 아닐까? 그래서 불행에 맞서 도망가지 않고 잘 싸웠다고 말하는 어느 교수의 칭찬에 힘없이 대꾸하던 버드의 말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죠. (……)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사이엔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식으로요."

ㅍ정말로 버드가 성장했다면, 그 성장의 핵심은 "현실의 삶을살아낸다는 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라는 통찰에 그가 이르렀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런 성장의 씁쓸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에 겐자부로를위대한 작가로 기억하는 이유다. - P315

조롱(irisio)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그것은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들이 미워하는 인간 속에서 그들의 불합리와 위선을 발견하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세키=고양이‘는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가장 경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고양이 족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한다. 고양이보다 못하면서 고양이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런 인간 족속만큼 고약한 존재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반면 고양이의 장점을 단점이라고 단정하며 으쓱거리는 건 정말 꼴불견이다. 그만큼 소세키는 자신도 한 마리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서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간파한 다음, ‘고양이소세키‘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제 당당히 인간을 조롱할 수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이 풍기는 유머감각의 씁쓸함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양이와 가깝다고 해도 소세키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결국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조롱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냉소적인 자기 조롱은 얼마나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가?  - P324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과거 불행에 대한 기억과 짝을이루는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두려움(metus)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정의는 조금 복잡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의심스러운 대상이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이라는 말이 조금 어렵다. 여기서 미래의 사물과 과거의 사물이 동일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면 어려움은 쉽게 가실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애인이 지금 만난 다른 애인과 같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과거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슬픔은 새로운 애인과의 미래를 잿빛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과거의 불행이 집요하게도 미래에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서 생기는 슬픔, 즉 두려움은 바로 이렇게 우리 내면에서 탄생하여 우리의 비전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불행한 과거는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 P349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가진 것, 즉 건강, 젊음, 직장, 애인 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지금 가지고 있는모든 것들은 잠시 내 곁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젊음이니 건강이니 모두 어느 사이엔가 떠날걸 염두에 둔다면, 젊었을 때 그리고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게 될 것이다. 해고되든 내가 떠나든 간에 지금 회사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인식한다면, 직장 생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인도 언젠간 떠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애인과의 근사한 키스에 더 몰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 P356

 그렇지만 진실은그 반대였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라는 타자로부터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는" 것과 같은 분노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요조의 행동에서 우리는 내면의 공포가 외면의 수줍음, 항상 타자의 말에 순종적인 공손함으로 드러나는 메커니즘에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이, 즉 투정을 부리지 않고 너무나의젓한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미소를 띠며 말하곤 한다. "아이가 정말 공손하네요." 혹은 "참 착하고 순한 아이야." 그렇지만 이걸 아는가? 아이는 그런 평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당신의 욕망에 순종하는지를. 그리고 그만큼 아이는 또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스피노자의 말대로 공손함이나 온건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때‘의 감정이다. 표면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들, 혹은 공동체에 대한 구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공손한 아이나 온건한 아이는 타인이 화를 폭발할까 봐 자신의 욕망, 그러니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일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주장하지 않는 것뿐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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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은 행정가로서는 무능하지만 정치적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다. 그는 교육과 언론이 민주주의의 자양분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물리적 위협뿐 아니라 심리적 위협을 능숙하게 활용하는데, 심리적 위협의효과가 훨씬 더 크다. 동물들은 나중에 사실상 그의 인질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장면은 그렇게 인질이 된 민중이 스스로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대목이다. 젊은 돼지들의 발언을 막는 것은 양들이다. 양들은 외친다.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 그 선량하고 이상적인, 동시에 얄팍하고 선정적인 구호가 회의를 중단시키고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막는다. 모든 구호가 그런 위험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논의가 오가지 않는 사회, 각론이 부실한사회, 대신 맹목적인 열성 지지자와 그럴싸한 구호와 선정적인 음모론이 넘치는 사회를 진심으로 염려한다. 그런 사회는 전체주의로 가는 내리막길에 있다. 여기서 지금의 한국 현실을 떠올리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 오웰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예언자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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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품을 많이 들여서 캠페인을 하면 ‘면적‘이라는 단어를 몇십 년쯤 뒤에는 안 쓰게 될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이 뭔지 난 잘 모르겠고, 그럴 바에야 같은 노력으로 한국어의 다른 부분을 개선하는 게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본다. 상대를 서로 존중하는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이인칭 대명사를 개발한다든가 일제강점기는 삼십오 년이었는데, 해방이 된 지는 칠십 년이지났다. 이제 남은 일본어 투는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흡수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칠십 년간의 언어순화 운동이 효과적이었다면 그 정도 한 걸로 충분하고, 그게 별 효과가 없었다면 앞으로 더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납득‘ ‘내역‘ ‘당혹‘을 정말 ‘이해‘ ‘명세‘ ‘당황‘으로 바꿔 써야 하나? 양쪽 모두를 우리말로 품으면 안 될까? ‘단말기‘가 ‘끝장치‘보다 더 자연스럽지 않나? ‘공수표‘는 ‘부도수표‘와 다른 뜻이지 않나? 내 생각에는 이제 ‘몸뻬‘나 ‘나가리‘ ‘노가다‘도 고유의 어감을 가진 우리말 같다. ‘일바지‘ ‘유찰‘ ‘노동자‘와는 분명 느낌이 다르다. ‘찹쌀떡‘과 다른 ‘모찌떡‘도 물론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우리가 일본에게 지배당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어 투 용어는 우리말에 많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니까. 문화도 비슷하고. 그런 나라의 말이 한국어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자연스럽다.
금기는 콤플렉스의 반영이다. 이제 우리가 콤플렉스와 금기를 함께 떨쳐버릴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 P287

최근 몇 년 새 의미가 확장되면서 크게 유행한 ‘꼰대‘라는 말은 어떨까. 한국은 유교문화와 권위주의 분위기가 여전히 강한나라이고, 실력도 논리도 예의도 없이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기성세대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맞서는 젊은 세대에게 꼰대라는단어는 좋은 무기가 된다. 어지간한 중장년은 꼰대라는 비판을마음 깊이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오남용된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직급이 위라면, 그리고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면, 너무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다. 모든 충고와 조언, 지적, 비판에 대해 "꼰대질하지 마세요"라고 함으로써 나이든 상대를 몰아세울 수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이 젊은 사람들의 발언권을 뺏고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막는 것과 똑같다.
역설적이게도 생각이 깊은 이들일수록 ‘꼰대‘나 ‘싸가지‘ 같은 공격을 두려워해 말을 삼가고, 아집으로 똘똘 뭉친 어리석은 이들일수록 그런 자기검열에 관심이 없다. 밭에 있어야 할 좋은곤충은 말려 죽이고 나쁜 벌레는 점점 더 독하게 만드는, 부작용 많은 살충제 같은 말들 아닐까. 정중한 대화와 토론을 북돋는 거름 같은 언어는 없을까. - P303

그런데 그렇게 첨삭 지도를 받으면 글쓰기가 나아질까? 글쓰기 훈련의 왕도는 첨삭 지도일까? 나는 글을 잘 쓰는 데 있어서 논리력이나 어휘력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글을 나를 모르는 많은 사람 앞에, 사회에 내보이겠다는 각오다. 글을 쓰려면 결연해져야 한다.
애초에 말과 글의 속성이 다르다. 축음기, 라디오, 확성기, 전화가 발명되기 전을 떠올려보자. 말은 내 앞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듣는 이가 수백 명을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말하기는 대부분 한 방향 웅변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쌍방향 대화였다.
반면 인쇄술이 나오기 전에도 글쓰기는 자기 앞에 있지 않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였다. 읽는 이는 한 명일 수도 있지만 수만 명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만날 일이 없는 먼 나라 사람, 동시대인이 아닌 후세인들도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글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인이 된다. ‘보편 독자‘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 P306

멤버들끼리 의견을 나눌수록 논의가 점점 더 죽음보다는 삶에 초점이 맞춰졌다. 죽음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때까지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문제였다. 그것은 곧 존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됐다. 어디까지 버티겠느냐, 어떤 것을 양보하지 못하느냐에 답하다보니 막연하던 생각이점점 모양새를 갖춰갔다.
내게 있어 인간의 존엄함이란, 의미와 기품을 말하는 듯하다. 어느 정도 자존심이나 통제력과 겹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상처투성이인 승리나 절대적인 결정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상실, 하락, 불가사의는 인생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다른 사람의 도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다만 그 순간 도움을 주는이와 받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존엄성은 그런 품위와 관련이 있다.
한 단어로 줄이라면 ‘우아함‘이라고 표현하겠다. 인간은 존엄하다. 내게 있어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우아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 우아해지기는 어렵다. 그러니 인간다운 사회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해 우아함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때 복지수당의 액수만큼이나 그 돈을 전달하는 방식도 신경써야 한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존엄한 사회‘다. - P315

아마 그는 여러 정치세력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하지 않을것이다. 평생 약자의 편이었던 그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청년 구직자, 빈곤노인, 여성, 성소수자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친일 수구 냉전 세력 척결‘ 같은 말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변화를 촉구할 것이다. 성장률 몇 퍼센트와 같은 약속을 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칠 것이다. 슬퍼하는 이가 복이 있다며, 그저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며 우리가 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 자신이 비판을 받을 테니 남 비판하지 말고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며. 그러면 우리는 다시 격분하리라. 개혁 대상은 늘 내가 아니라 남이어야 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와 달콤한 캐럴과 아기 예수 인형에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다. 그리하여 성탄절 아침에는 일개 세속주의자도, 우리가 산상수훈의 한 구절 정도는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냘픈 희망을 품는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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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현실은 깊고 쓸쓸한 밤, 그리고 영원히 날이 밝지않을 것 같은 칠흑 같은 암흑일 뿐이다. 꿈을 통해 칙칙한 밤을 잊으려고 하는 만큼, 그들에게는 과거의 낮뿐 아니라 내일의 낮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현재의 밤을 제대로 응시할 용기가 이미 이 네 사람에게서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모든 가족은 마침내 ‘밤으로의 긴 여로‘에 합류하게 된다. 꿈이 꿈을 증폭시키고, 밤이 밤을 더 키우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들 가족에게 더 이상 환한 낮은 오지 않고 밤만 깊어질 것 같다는 느낌, 이건 나만의 생각일까? 더 비극적인것은 이 음울한 가족 이야기가 유진 오닐 본인의 내밀한 가족사를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이 옳다면, 유진 오닐의 작품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절절한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 P224

<노르웨이의 숲>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방황하는 두 남녀를 통해 저마다 상실의 아픔을 이겨 나가는 젊은이들의 성장통을 다룬 소설이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는 도피의 세계를 찾는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 P245

어쩌면 노인은 자신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과거 젊었을 때, 이미 되찾을 수 없는 영광이었으니까 말이다. 노인이 바란 것은 모든 사람들의 찬탄이 아니라, 오직 한사람,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지했던 소년의 찬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노인이 원했던 것은 이미 노인이 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빛나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아마 앞으로 자신과 함께 배를 타겠다는 소년의 말만으로 우리 늙은 어부는 충분히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아련하게 한다.

길 위쪽의 판잣집에서 노인은 다시금 잠이 들어 있었다.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소년이 곁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노인을 다시 떠날 것이다. 지금 소년은 어느 늙은 어부의 마지막 영광을 보고 있는 셈이니까. - P264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러니까 영광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은 치욕에서 가장 멀리 있다는 느낌 때문에 안도하는 것이고,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광의 정점에서 허무하게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때문이다. 사실 권력과 자본은 유년시절부터 몸서리쳐지는 치욕의 경험을 선사해서 우리에게 치욕을 겪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심을 각인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권력의 해묵은 공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 P266

감사(gratia)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식힐 수 있다. 아니,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그제야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나랑 함께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 P272

발렌틴은 이성주의자답게 사랑마저도 자신의 이성과 생각대로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적인 감성이나 행동을 부정한 채로 말이다. 바로 이것이 몰리나가 이별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만일 발렌틴이 더 민감했었다면, 자신도 몰리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키스를 소원했던 몰리나, 거미여인 몰리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어쩌면 발렌틴은 몰리나에게서 만날 수 없는 애인 마르타의 흔적을 찾아 그것을 사랑했는지도, 혹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했고 발렌틴도 몰리나를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느낌, 그 행복의 느낌을 두 사람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생각이나 말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속적인 행동 속에서만 드러나는 법이다. 두 사람은 지금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감옥에서 나온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으로 정치적 행동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발렌틴을 만나지 않았다면 생길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이제 외롭게 감방에 남아 있던 발렌틴에게는 정부의 가혹한 고문과 심문이 가해졌다. 발렌틴이 약물에 취해 있을 때 마르타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몰리나의 강한 흔적을 느끼게 된다.
몰리나랑 있을 때 마르타를 떠올렸건만, 발렌틴은 지금 마르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몰리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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