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품을 많이 들여서 캠페인을 하면 ‘면적‘이라는 단어를 몇십 년쯤 뒤에는 안 쓰게 될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이 뭔지 난 잘 모르겠고, 그럴 바에야 같은 노력으로 한국어의 다른 부분을 개선하는 게 훨씬 더 필요하다고 본다. 상대를 서로 존중하는 두 사람이 쓸 수 있는 이인칭 대명사를 개발한다든가 일제강점기는 삼십오 년이었는데, 해방이 된 지는 칠십 년이지났다. 이제 남은 일본어 투는 그냥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흡수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칠십 년간의 언어순화 운동이 효과적이었다면 그 정도 한 걸로 충분하고, 그게 별 효과가 없었다면 앞으로 더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납득‘ ‘내역‘ ‘당혹‘을 정말 ‘이해‘ ‘명세‘ ‘당황‘으로 바꿔 써야 하나? 양쪽 모두를 우리말로 품으면 안 될까? ‘단말기‘가 ‘끝장치‘보다 더 자연스럽지 않나? ‘공수표‘는 ‘부도수표‘와 다른 뜻이지 않나? 내 생각에는 이제 ‘몸뻬‘나 ‘나가리‘ ‘노가다‘도 고유의 어감을 가진 우리말 같다. ‘일바지‘ ‘유찰‘ ‘노동자‘와는 분명 느낌이 다르다. ‘찹쌀떡‘과 다른 ‘모찌떡‘도 물론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우리가 일본에게 지배당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어 투 용어는 우리말에 많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나라니까. 문화도 비슷하고. 그런 나라의 말이 한국어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자연스럽다. 금기는 콤플렉스의 반영이다. 이제 우리가 콤플렉스와 금기를 함께 떨쳐버릴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 P287
최근 몇 년 새 의미가 확장되면서 크게 유행한 ‘꼰대‘라는 말은 어떨까. 한국은 유교문화와 권위주의 분위기가 여전히 강한나라이고, 실력도 논리도 예의도 없이 자기 의견을 강요하는 기성세대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맞서는 젊은 세대에게 꼰대라는단어는 좋은 무기가 된다. 어지간한 중장년은 꼰대라는 비판을마음 깊이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오남용된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직급이 위라면, 그리고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면, 너무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다. 모든 충고와 조언, 지적, 비판에 대해 "꼰대질하지 마세요"라고 함으로써 나이든 상대를 몰아세울 수있다. ‘싸가지 없다‘는 말이 젊은 사람들의 발언권을 뺏고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막는 것과 똑같다. 역설적이게도 생각이 깊은 이들일수록 ‘꼰대‘나 ‘싸가지‘ 같은 공격을 두려워해 말을 삼가고, 아집으로 똘똘 뭉친 어리석은 이들일수록 그런 자기검열에 관심이 없다. 밭에 있어야 할 좋은곤충은 말려 죽이고 나쁜 벌레는 점점 더 독하게 만드는, 부작용 많은 살충제 같은 말들 아닐까. 정중한 대화와 토론을 북돋는 거름 같은 언어는 없을까. - P303
그런데 그렇게 첨삭 지도를 받으면 글쓰기가 나아질까? 글쓰기 훈련의 왕도는 첨삭 지도일까? 나는 글을 잘 쓰는 데 있어서 논리력이나 어휘력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글을 나를 모르는 많은 사람 앞에, 사회에 내보이겠다는 각오다. 글을 쓰려면 결연해져야 한다. 애초에 말과 글의 속성이 다르다. 축음기, 라디오, 확성기, 전화가 발명되기 전을 떠올려보자. 말은 내 앞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듣는 이가 수백 명을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말하기는 대부분 한 방향 웅변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쌍방향 대화였다. 반면 인쇄술이 나오기 전에도 글쓰기는 자기 앞에 있지 않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행위였다. 읽는 이는 한 명일 수도 있지만 수만 명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만날 일이 없는 먼 나라 사람, 동시대인이 아닌 후세인들도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글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인이 된다. ‘보편 독자‘를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 P306
멤버들끼리 의견을 나눌수록 논의가 점점 더 죽음보다는 삶에 초점이 맞춰졌다. 죽음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때까지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문제였다. 그것은 곧 존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됐다. 어디까지 버티겠느냐, 어떤 것을 양보하지 못하느냐에 답하다보니 막연하던 생각이점점 모양새를 갖춰갔다. 내게 있어 인간의 존엄함이란, 의미와 기품을 말하는 듯하다. 어느 정도 자존심이나 통제력과 겹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상처투성이인 승리나 절대적인 결정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상실, 하락, 불가사의는 인생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다른 사람의 도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다만 그 순간 도움을 주는이와 받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존엄성은 그런 품위와 관련이 있다. 한 단어로 줄이라면 ‘우아함‘이라고 표현하겠다. 인간은 존엄하다. 내게 있어 이 말은 ‘모든 인간이 우아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 우아해지기는 어렵다. 그러니 인간다운 사회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해 우아함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때 복지수당의 액수만큼이나 그 돈을 전달하는 방식도 신경써야 한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존엄한 사회‘다. - P315
아마 그는 여러 정치세력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하지 않을것이다. 평생 약자의 편이었던 그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청년 구직자, 빈곤노인, 여성, 성소수자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러나 ‘친일 수구 냉전 세력 척결‘ 같은 말을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변화를 촉구할 것이다. 성장률 몇 퍼센트와 같은 약속을 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칠 것이다. 슬퍼하는 이가 복이 있다며, 그저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며 우리가 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 자신이 비판을 받을 테니 남 비판하지 말고 먼저 세상의 소금이 되라며. 그러면 우리는 다시 격분하리라. 개혁 대상은 늘 내가 아니라 남이어야 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와 달콤한 캐럴과 아기 예수 인형에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다. 그리하여 성탄절 아침에는 일개 세속주의자도, 우리가 산상수훈의 한 구절 정도는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냘픈 희망을 품는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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