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열 수 있는 마개나 숨겨진 자물쇠 따윈 없었다. 불룩 튀어나온 돌출부도, 그를 내부로 초대하는 비밀스러운 빗장도 없었고, 누르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은 스프링이 튀어나와서 욕망으로 가득 찬 복잡한 내부를 그의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버튼도 없었다.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저 표면이 거꾸로 뒤집혔거나 안쪽으로 휘었거나 나선형으로 휘감긴 것뿐일지도 모른다. 모나드의 표면에는 무한한 신비가 감춰져 있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잘 포장된 이 구조물들은 자신에게 깃든 눈부신 풍요로움의 극히 일부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안전, 미적 감각을 고려하여 장기들끼리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도록 배치하고 지방 조직으로 내벽을채우고 완충 작용을 유도한다. 불안정한 비행기 안에서 반쯤 잠든 상태로 블라우 박사는 이처럼 열정적인 환상에 빠져들었다. - P204

이곳에서 사내는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랐다. 그의 어깨에 닿는 키 작은 여인들이 앵무새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그를 밀치면서 사람들 무리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는 불교 신자로서 하루에도 여러 번 시간이 날 때마다 되뇌던 서약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의 기도와 행동으로 감각이 있는 모든 존재를 계몽하기위해 노력하겠다고 맹세했건만 갑자기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두 눈으로 나무를 보았을 때 솔직히 그는 실망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장소에 어울리는 예를 표하기 위해 여러 차례 몸을 숙여 절하고 시주를 두둑이 한 뒤에 두 시간도 안 되어 헬리콥터로 돌아왔다. 오후에 그는 이미 호텔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면서 그는 땀과 먼지, 인파와 노점상들의 들척지근한 냄새, 어디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불의 독특한 향기, 종이 접시에 담아 파는, 모두가 손으로 집어 먹는 커리 냄새를 물줄기로 씻어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를 전율하게 만든 것들, 그러니까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실은 그가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깨달음을 얻었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작은 변화의 조짐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미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희고 폭신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 깨침을 갈망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한순간에 모든 진실을 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듯 세상을 투시해서 그 공허한 뼈대를 확인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바로 그날 저녁 그는 그 관대한 인도인 친구에게 뜻하지 않은선물을 선사해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바스러진 나뭇잎 한 장을 꺼냈다. 두 남자가 경건한 자세로 나뭇잎을 향해 몸을 숙였다. - P258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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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성공의 경험이 두려웠다.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거리두기‘를 했던 방역 과정의 사회적 비용을 실은 가장 약한사람들이 치렀기 때문이다. 책을 쓰기 위해 연구팀은 이주민이나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취약계층 당사자들이나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활동가들을 만나 팬데믹의 시간을 어떻게견뎌냈는지 물었다.
고용허가제 탓에 직장을 옮길 수 없던 이주 노동자들은
"너희들은 서로에게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함께 확진 통보를받은 동료들을 모아 야간 노동을 시키는 사업주에게 저항하지못했다. 선제적 코호트 격리라는 이름으로 아동양육시설의 아이들은 3개월 넘게 건물 앞 편의점에도 가지 못했고,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층간 이동조차 제한받았다. 감각이 예민해 종종 마스크를 찢고 하던 자폐 아동들은 감염되거나 밀접접촉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혼자 방에서 지내는 일이 불가능한 자폐 아동을 돌보기 위해 부모는 함께 방에 들어가 지내야 했고,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부모들은 직장을 잃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콜센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집단 감염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이후에도 환자복을 입은 채 계속 일을 해야 했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었다. - P22

한국의 자살률은 2020년 10만 명당 25.7명으로 OECD(경제협력기구) 회원국 중 압도적 1위이다. 학회에서 만나는 외국인 연구자들은 이 수치에 경악하며 고소득 국가인 한국에서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지 묻는다. 그런데 국립재활원 연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 장애인의 자살률은10만 명당 57.2명이다. 한국인 전체보다 2배 이상 높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살아 있기를 포기하는가. 수많은 연구에서 언급되는 요인은 ‘희망의 부재이다. 오늘 하루를 견딜 수 없어서가아니다. 숨 막히게 자신을 옥죄는 좌절의 순간이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이라는 체념이 생의 에너지를 빼앗는다. - P27

필요한 변화의 핵심은 노동이다. 모든 인간에게 그렇지만특히 장애인에게 노동은 재정적 안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애인에게 노동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다른 사회적 활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한다. 지체장애인이 아침이면 직장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그들이 투표소와 극장과 병원에 가지 못할 리 없다. - P28

타인의 삶을 내 경험에 따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일은 고 황현산 선생님의 책 제목처럼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고 자기 경험치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전선은 하나가 아니다. - P33

또 하나는 모든 인간은 특정한 맥락에서 가해자가 될 수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이,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 결혼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에게 인종차별의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남성이 권력을 가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약자인 여성들이, 시스젠더만을 정상적인 몸으로 취급하는 성별 이분법의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와의 관계에서 기득권일 수 있습니다. A 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이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할수 없다는 이유로, 트랜스여성인 A 씨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려 했습니다.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들은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아ter Outsider야 했습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Sister er」를 쓴, 흑인이자 여성이며 동성애자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오드리 로드 Audre Lorde가 "나는 당신이 두려워하는 얼굴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꼭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명백히 부조리하고 비상식적인 폭력만이 어떤 얼굴을 인간의 범주에서 밀어내는 건아니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그런 폭력은 어떤 몸을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모인 ‘합리적인‘
사회만이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지요. - P47

한 사회가 표준이라고 여기던 몸은 항상 기득권의 것이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가 없던 기득권은 소수자의 몸을 두고 매번 인간의 자격을 따져 물었지요. 그렇게 백인은 흑인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물었고, 남성은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아도 되는지 따졌고,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존재가 질병인지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질문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향해 던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나는 정상인가? 그렇다면 정상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요. - P48

명시적 편견explicit bias은 의식적 수준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믿음을 뜻합니다. 2018년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온 예멘인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명시적 편견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난민 신청을 했던 예멘인 484명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목소리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실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체적인 정보 없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과 유럽 난민 사태의 영향으로 일부 한국인은 예멘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은 무의식적 수준에서 가지고 있는 태도와 믿음을 뜻합니다. 난민이 내 주변의 한국인처럼 각자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살아간다고 믿으며,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사람은 명시적 편견으로부터는 자유로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동네에 난민의 숫자가 증가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한 범죄가 없었음에도 불안함을 느끼거나 난민들이 오는 가게에 가길 꺼린다면 그 과정에서 암묵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는것입니다. - P51

물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기에 따돌림, 차별, 폭언과 같은 자극은 연구 윤리상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요건 중, 스트레스 호르몬을 가장 크게 증가시키고 원상태로 회복하는 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급성 자극은다름 아닌 사회적 평가 위협 social evaluative threat 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위협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작은 잘못이라도 찾아내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고혈압, 우울증, 심장병을비롯한 수많은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가장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입니다.
흑인들은 유아원에서부터 일상적으로 과도한 사회적 평가 위협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2017년 국제 학술지「랜싯」에 게재된 크리스토퍼 월더먼 Christopher Wildeman 교수 연구팀의 논문 「미국의 대규모 수감, 공중보건, 그리고 커져가는 불평등」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난 미국 흑인 남성 5명중 1명은 35세 이전까지 교도소에 한 번 이상 수감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 비극적인 숫자는 물질적으로 열악한 삶의 조전에서 비롯된 높은 흑인 범죄율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사회적 평가 위협이 가져온 결과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 P55

인간의 두뇌는 외부 자극을 범주화해서 이해하며 진화했습니다. 인간이 처음 사자와 호랑이를 봤을 때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반복되면, 사자와 비슷한 생명체를 봤을 때 인간의 두뇌는 그것을 맹수로 분류하고 위험한 동물이라고 판단합니다. 그에 따라 도망치거나 싸우는 행동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판단이 빠를수록, 또 무의식적 수준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질수록 생존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인간 두뇌에 깊이새겨진 고정관념에 기반한 편견이 활성화되는 과정은 생존하기 위해 수많은 외부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해 온 과정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인을 판단하는 방식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뇌의 신경망이 첫눈에 보이는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정보를 조합해 어떤 사람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데 0.1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눈을 깜빡하는 데 보통 0.1~0.4초가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말그대로 눈 깜빡할 새보다 빠르게 타인을 고정관념에 따라 인지하고 분류해 믿을 만한지 판단합니다. 이 과정은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입니다. - P56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암묵적 편견을 바꾸는 길은 권력의 적극적인 재분배를 통해 소수자의 삶을 바꾸어 내는 것과 함께, 우리 스스로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나 역시 내 의도와 무관하게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하며 행동하는 일이라고요. 차별하는 줄 모르고 하는 차별 행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저는 차별금지법이 그 인식과 경계와 행동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P58

이 사건을 두고 교사의 노동권과 학생의 인권이 대립하는것인 양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시각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문제가 교사와 학생의 충돌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스템입니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 교사가 학생이나 학부모와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학교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이지요. 모든 교사가 선하지는 않고 모든 학생이 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이모인 공동체가 운영되도록 하기 위해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스템의 문제점을 상세히 따져보지 않고 교사 개인과 학생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직관적이고 쉬운 일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 또 그만큼 문제 해결로부터 멀어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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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공부는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삶을 선택했던 것은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환자를 만나고 차트에 적힌 병력을 읽어보면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발생한 게 분명한데, 병원에서는 약으로 이들의 증상을 치료하려 했습니다. 물론 현대의학이 이룬 성과는 놀라운 것이어서, 그 약들은 실제로 증상을 완화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이들을 종종 삶의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돌아가야 할 가정은 과거와 다름없이 폭력적인 공간이었고, 병원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다시 입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 주생계가 막막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의학 교과서에 적힌 대로
"다친 허리를 치료하려면 며칠은 조심하며 누워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일은 허망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의 무게 때문에 검진 시기를 놓쳐, 몸 여기저기 전이된 유방암을 진단받은 여성에게 의학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며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물었던 것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병원을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임상의사로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경제력을 포기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면 내 고민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가 질병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게 명확해질수록, 그 대답은 더 무겁고 또 멀게 느껴졌습니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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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는 흔히 동반이환comorbidity 현상을 동반한다. 이는 문제의 일차적 장애 말고도 다른 장애가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양극성장애나 조현병으로 진단된 환자는 흔히 경계선인격장애같은 그 밖의 진단도 받게 된다. 나는 사이코패스이기만 하고 다른 병은 없는 사람을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증상, 원인이 되는 뇌영역, 관련 전달물질 면에서 여러 장애가 폭넓게 중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정신장애다. 나의 사이코패스적 특성은 다른 문제와 별개로 논의할 수 없다. 내가 매력적인 이유는 활기차고 말재간이 있으며 호언장담으로 앞에 놓인 장애물을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그 에너지와 유창함은 나의 경조증에서 나온다. 이렇게 나의 모든 행동이 한데 묶여 있다. - P236

인디애나폴리스 릴리연구소 Lilly Research Laboratory의 도론 새그먼Doron Sagman과 마우리시오 토엔 Mauricio Tohen은 양극성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공황장애, 강박장애, 물질남용의 위험이 크다고 썼다. 그뿐만 아니라 양극성장애 환자는 주요우울장애 환자와 달리 약 3분의 1이 반사회적 · 경계선 · 히스테리성 ·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동시에 보인다. 또한 자살하거나, 비만이거나. 제2형 당뇨가 생기거나, 흡연할 가능성도 더 높다고 한다.
최근에 이 양극성 동반이환의 목록을 본 나는 멈칫했다. 이 목록은 어린 시절부터 10대와 청년기를 거치는 내내 번갈아 사귀어온내 평생지기들(병명들)의 친숙한 ‘인명록‘인 셈이었다. 나는 이들장애와 연관된 증상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고, 각각의 증상이 내 일생의 어떤 기간을 지배했다. 한 증상이 10대 초반에 절정을 이루다가 물러가면, 완비된 또 한 벌의 증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모든장애가 발병하기만 하면 길게는 몇 년에 걸쳐 나타났다. 일가 어른들과 임상의들이 내게 들려준 의견들에도 공통점이 하나 명백히드러났다. 이 장애들 대부분이 세로토닌계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 P237

인격과 성격은 다르다. ‘인격 personality‘은 신경성(신경과민, 불안, 회피 등), 외향성, 친화성, 새로운 발상과 경험을 향한 개방성, 성실성(세심함, 근면성, 자제력, 성취욕 등) 같은 특성의 목록이다. 반면에 ‘성격 character‘은 인격보다 덜 분명하다. 한 사람의 진정한 성격은 그가 곤혹스럽고 압박을 받는 상황에 놓여 어쩔 수 없이 힘든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에만 판단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인격은 많은 부분이 유전에 의한 것이므로 바꿀 수 없으며 성격은 스트레스 요인, 경험, 선택, 믿음에 따라 그보다는쉽게 바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웅들이 소설과 영화에서 보여주는 성격의 변화는 성격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음을 드러내는 일례다. 종교, 정부, 가족, 문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성격을 ‘어두운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반으로 한다. - P246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개인‘이 생존에 유리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어떨까? 사이코패스가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게있을까?
사이코패스들은 유능한 지도자일 수 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에서 최근 실시한 연구에서는 전사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결정을 잘 내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통 사람은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반면, 사이코패스는 기꺼이 도박을 건다. 불확실한 시기라도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거나 군대를 움직이거나 부족을 데리고 산을 넘을 것이다. 그 결과로 그가 맡은 집단은 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집단에 모험을 시키는 것이 문명적으로는 이롭다. 그런 도박 중 일부는 성공해서 문명을 진보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돌연변이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어떤 돌연변이는 커다란 이익을 주는 것과 같다. - P283

그래서 내가 사이코패스냐고? 단적으로 답하자면 ‘아니올시다. 그보다는 친사회적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더 나은 답이다. 나는PCL-R에서 대인관계 특성(피상적이고, 과대망상증이 있고, 기만적이다), 정서 특성(가책도 공감도 하지 않는다), 행동 특성(충동적이고 무책임하다)을 포함한 많은 항목에 해당된다. 하지만 반사회 특성은 보이지 않는다. 분노를 조절할 줄 알고 전과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운 좋은 사이코패스라는 편이 가장 정확한 답일성싶다. 친절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와 통찰력 있는 어머니가 일찍부터 아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보고 아들을 잘 이끌어주었기때문이다. 어머니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동안 나는 역경을 헤쳐나갔다. 2013년 늦겨울,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자서전하나 쓰는 데 얼마나 걸리는 게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 난 지금 내 자서전이 아니라 엄마의 자서전을 쓰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내 정체성의 많은 부분은 어머니가 나를 기른 방식에서 왔다. 나의 이야기는 나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어머니됨과 아버지됨과 부모됨과 양육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하다.
60대에 시작한 뜻하지 않은 순례를 통해 발견한 것은 5년 전만해도 내가 믿지 않았던 뭔가다. 태어날 때 자연이 나누어준 형편없는 카드 한 벌을 올바른 양육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 책을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나는 결코 천사가 아니다. 하지만 훨씬 더 나쁜 모습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나는 사이코패시와 그 유전자를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버리면 인류는 결국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생애 초기에 확인하고 그들이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공감에 서툴고 공격성이 강한 사람들도 잘만 다루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나처럼 가족과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시적 수준에서는 사회에 보탬이 된다. 나는 사이코패시 스펙트럼상에도 골프처럼 스위트스폿이 있다고 믿는다. PCL-R로 25~30점인 사람들은 위험하지만, 20점 언저리의 사람들은 사회에 필수적이다. 대담하고 활기차고 인류의 생동감과 적응력을 지켜주는 나와 같은 사람들 말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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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배의 위쪽에서 모두가 일제히 휴대 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고,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빈 공간을 향해 분노를 쏟아 내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직장에 늦을 거라고, 그런데 그들이 입은 이러한 손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것인지 궁금하다고, 그러기에 술이나 퍼마시는 인간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고,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가뜩이나 현지인들에게도 일자리가 부족한데 뭣 때문에 이민자를 고용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언어는 대체 어디서 깨쳤는지 모르겠다고 하긴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라고.
에릭은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얼마 안 있으면 잠잠해질 테고 자리에 앉아서 점점 화창해지는 하늘을, 그리고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아름다운 빛줄기를 바라볼 거라고 확신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엘리자의 딸이 입고 있는 선명한 하늘색 코트였다.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징크스였다.) 이 색깔은 배를 탈 때 불길한 징조를 뜻했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금방 잊어버렸다. 그는 대양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면서 오늘을위해 특별히 준비한 초콜릿 바와 콜라 한 상자를 아래쪽으로 던졌다. 그가 준비한 가벼운 다과가 사람들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멀어져 가는 해안가를 바라보면서 잠잠해졌고, 어른들은 자신들의 항해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T 형제 중에 동생이 그에게 전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콜라 때문에 트림을 했다.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가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유치원 선생인 엘리자가 궁금해했다.
‘연료는 충분한가?‘ 콩팥에 문제가 있는 S 영감도 관심을 보였다. 적어도 에릭에게는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될 수 있으면 그들을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시선을 수평선에 고정했다. 덕분에 그의 동공은 반으로 갈라졌다. 바다에서부터 시작되는 아래쪽 절반은 짙은 빛을, 하늘에서부터 시작되는 위쪽 절반은 밝은 빛을 띠었다. 실제로 승객들은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그들은 이마 쪽으로 모자를 당겨 쓰고, 목에 두른 스카프를 단단히 고쳐 맸다. 헬리콥터의 우르렁대는 프로펠러 소리와 경찰 모터보트의 요란한 소음이 정적을 깨뜨릴 때까지는 모두 조용히 항해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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