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의 손아귀 안에서 릴리안은 무슨 물건처럼 흔들렸다. 마치 융단이나 식탁보를 탈탈 털어 빵 부스러기를 떨어내는 걸 보는 듯했다. 프랜시스는 뛰어가서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지만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급기야 그의 칼라 뒷덜미를 붙잡고 끌어당기자 레너드는 어깨로 그녀를 밀쳐버렸다. 프랜시스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레너드는 릴리안을 계속 흔들면서 얼굴에 대고 윽박질렀다. "누구야? 이름 불어. 어디 사는 놈이야? 말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프랜시스의 안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진 것 같았다.
"내가 그 남자야, 레너드!" 그녀가 고함쳤다. "내가 바로 그 남자야. 알겠어? 릴리안과 나는 연인 사이야. 몇 달 전부터 그랬어.."
지금껏 숱하게 상상했던 말이었다. 레너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왔다. 홀로 침대에 누워, 릴리안의 옆에 레너드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외로움과 분노에 사무쳐 잠들어야 했던 그 수많은 밤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꿈꿔왔던 환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새되게 갈라지고 떨렸고, 승리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일말의 승리감도 없었다. 레너드는 프랜시스의 간섭이 마냥 성가신 듯 또 그녀를 밀치고 아내를 제대로 붙잡을 기세였지만, 프랜시스의 표정을 보고서야 그 말뜻이 비로소 머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손을 놓았다. 릴리안은 소파에 팍삭 널브러졌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그린 채, 죄책감이 뻔히 드러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너드가 입을 열었다. "사실이야? 프랜시스가 한 말?"
잠시 망설인 끝에 릴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프랜시스를 돌아보았다. 그 숨김없는 눈빛을 마주한 순간, 프랜시스는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그를 배신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입을 한일자로 앙다물고서 몇 차례 콧바람을 씨근거렸다. 그리고 두 여자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소파에서 두세 발짝 물러났다. - P421

레너드가 프랜시스의 발목을 걷어찼다. 둘은 함께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운 순간, 레너드가 릴리안에게 또 한 번 얻어맞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뭇 다른 소리가 났다. 퍽하는 소리이긴 했는데, 크리켓 방망이로 젖은 공을 후려친 것처럼 질척한 느낌이었다. 레너드는 요란한 신음과 함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프랜시스를 꿇어앉히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다가,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면서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프랜시스는 그가 미끄러운 카펫 위에서 발을 헛디뎠는 줄 알았다. 고개를 돌리니 레너드에게서 몇 발짝 뒤에 떨어져 있는 릴리안이 보였지만, 그녀의 손에 쥐인 곤봉 같은 것도 보였지만, 그 순간 ‘저게 뭐지? 재떨이! 스탠드 재떨이잖아!‘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릴리안이나 재떨이가 레너드가 쓰러진 것과 하둥의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레너드가 다시 일어나 자신을 붙잡기 전에 얼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릴리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길을 좇아 시선을 내려보니, 레너드는 다시 일어나기는커녕 그 자리에 잠잠히 엎드려 있었다. 얼굴이 카펫에 눌려 짜부라지고 두 팔을 자기 가슴 밑에 깔아뭉갠 채로 얕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모습도그렇고 숨소리도 그렇고, 꼭 고주망태가 된 술꾼처럼 보였다. 귓가로 추켜올려진 외투 옷깃 때문에 뒷머리는 그림자에 파묻혀 보이지 않왔다. - P423

프랜시스는 쿠션으로 레너드의 머리를 계속 누르면서 몸을 굴려 반듯이 눕혀보았다. 그러자 레너드의 입에서 한줄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릴리안이 후닥닥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레너드의 신음은 마치 가방을 패대기쳤을 때 주둥이에서 쉭 새어 나오는 바람처럼 기묘하게 생기가 없었고, 게다가 사지가 몸뚱이와 같이 움직이질 않고 처음 쓰러졌을 때의 위치에 축 늘어져 있었다. 프랜시스는 레너드의 두 팔을 잡아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려보고, 가슴과 복부를 손으로 눌러보면서 폐에 공기를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도, 반쯤 열린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와 입술, 분홍색 혀에서 습기가 말라가는 게 보였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닮은 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랗고 텅비어 있고 잘못되어버린 물체. -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전환은 여전히 의료계와 치료 단체에 의존한다. 최상의 경우에 이런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책임 있는 전문가들이 부모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녀들의 그것들과 분리하고, 불변의 명령과 일시적인 노이로제를 구별할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벅찬 임무일 수 있다. 정신의학과 내분비학, 신경 인지학을 분리하는 것은 한심할 정도로 구식이다. 요컨대 현대 정신의학은 정서장애 및 사고장애의 화학적 경로를 찾고 있지만 정신과 뇌를 구분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아직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성정체성 장애처럼 복잡한 질환은 동시에 여러 각도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위원회에서 일하는 하이노 메이어-발부르그는성 정체성 장애에 대해서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인정했다.  - P406

부모로서 트랜스젠더 자녀를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은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09년에 전국 트랜스젠더 평등 센터와 전미 게이 레즈비언 태스크포스재단은 미국의 모든 주와 영토에서 일반인의 인구 분포와 대체로 비슷한 분포를 보이는 트랜스젠더들에 대해 광범위한 설문 조사를 벌이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지가 온라인으로 배포되었다는 점에서 조사가 상대적으로 특권층에게 치우친 감은 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다섯명중 네 명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육체적 또는 성적으로 폭행을당했고, 그런 사례 중 대략 절반은 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일반인 가운데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는 사람들 숫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 반해 트랜스젠더는 90퍼센트 정도가 적어도 대학을 졸업했지만 실업률은 일반인의 두 배였다. 10명 중 한 명은 직장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며, 비슷한 비율로 육체적인 폭행을 당했다. 4분의 1이 젠더 불일치로 해고된 적이 있었다. 트랜스젠더가 빈곤을 겪는 비율은 미국 전체 비율의 두 배이다. 5명 중 한 명은 집이 없었으며 그들 중 3분의 1은 쉼터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그들의 젠더 문제 때문에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3분의 1은 무례나 차별 때문에 병원 진료를 연기하거나 회피했다. 일반인의 2퍼센트가 자살을 시도하는데 반해 트랜스 청소년은 절반 이상이 자살을 시도했다. 약물 남용과 우울증의 비율은 충격적인 수준이다. 집 없는 청소년들의 20~40퍼센트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이고, 유색 인종 트랜스젠더들의 절반 이상이 길거리에서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성매매를 하다가 뉴욕 퀸즈의 트랜스 아동쉼터에서 지내는 한 청소년이 말했다. 「나는 주목받는 것이 좋아요. 사랑받는 느낌이 들거든요. - P431

중도 장애 아동이나 자폐 아동, 정신분열증을 겪는 아동,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 중 상당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건강한 아이에 비해 사망할 위힘이 훨씬 높다. 하지만 트랜스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는 독특하다. 그들은 똑같이 무서운 두 가지 가능성 사이를 오간다. 성전환을 할 수 없는 아이는 자살할 수 있는 반면 성전환한 아이는 그 때문에 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살인 사건이 매번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알려지더라도 그 사건이 증오 범죄였다는 상황까지 알려지지 않는경우도 많다. 1999년 이후로 미국에서는 400명 이상의 트랜스젠더가 살해되었고,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단체는 살인에 관련된 증오 범죄의 발생률이 한 달에 한 건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3일에 한 명꼴로 트랜스젠더가 살해된다. - P437

1990년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에 두 가지 성별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뒤흔든 책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을 출간했다. 1999년에 다시쓴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가능성을 여는 행동》이 궁극적으로무슨 소용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 즉 명료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으며 비현실적이고 불법적인 존재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10‘ 책이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가능성은 버틀러가 희망했던 것보다도 넓게 열려 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대학 교수인 친구가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은 자신의 첫 아이 이름을 에이버리라고 지을 계획이라고 자진해서 말했다. 「나는 에이버리가 좋은 것 같아요. 중성적인 이름이니까 아이가 나중에 타고난 성별과 다른 성별을 갖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그 이름을 쓸 수 있잖아요.」 노먼 스팩도 비슷한 대화를 언급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남들과 다른 사람들이 뒤처지지 않는 새로운 시대〉라고칭했다. 젠더에 관한 가벼운 대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흔한 일이 되었다. 메이어-발부르그는 <트랜스젠더리즘이 어느 정도는 유행처럼 되었다고주장했다. 메이어-발부르그의 주장은 나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내가 대학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은 혁명적인 감정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개성을 어필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젠더퀴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자신의 젠더에 대해 유동적인 입장이었지만 성별 불쾌감은 보이지 않았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이런 현상이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출생 성별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황과는 공통점이 매우 적었다. - P447

긍정심리학 분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미 워너Emmy Wemer는 성역할 및 회복탄력성과 성 역할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회복탄력성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같이 전통적인 성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을발견했다. 「회복탄력성이 있는 남자아이들은 자기주장이 무척 강하기도 하지만 울어야 할 때는 기꺼이 눈물을 흘린다. 또한 회복탄력성이 있는 여자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보살피고 배려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충실한 양육은 인생의 돌발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젠더 세계에서는 2년 전까지도 진보적이었던 정책이 오늘날에는 보수적이 된다. 브릴이 오클랜드의 한 어머니를 예로 들었다. 그 어머니는 트랜스젠더 학생들을 포용하려는 학교의 정책이 젠더가 유동적인 아이들에 대한 우려를 명확하게 반영하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제기했다. 실제로 이런식의 진전을 불편하게 여기는 트랜스젠더들도 있다. 르네 리처즈는 1970년대에 성전환을 한 이후로 여자 프로 테니스 경기에 출전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 왔다. 그녀는 <하느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면서 성별 다양성을 갖도록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젠더를 실험하는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나는 트랜스젠더가 중간에 있는 존재. 예컨대 제3의 성 혹은 비현실적인 별난 미치광이가 되는 것을 바라지않는다>고 덧붙였다. - P454

성전환 초기에 엘리엇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나는 때때로 나인 남자 엘리엇-가 저 바깥 어딘가에서 내가 그를 찾아 주기를,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법을 알아내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것이 불안정하게 느껴져서 불안하다. 어디에서 이정표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를 절대 찾아내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하지만 내게 정말 소중한 어떤 이가 언젠가 말했다. <괜찮아. 너는 강해. 그리고 엘리엇이라고?그가 너를 찾을거야.> - P4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랜스젠더>는 포괄적인 용어로, 해부학적 구조상 선천적으로 정해진 성에서 확연하게 벗어난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트랜스섹슈얼>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성별에 자신의 신체를 일치시키기 위해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복장 도착자로 풀이되는<트랜스 베스타이트>는 이성의 옷을 즐겨 입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러한용어들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트랜스젠더 사회에서는〈트랜스젠더>나 줄여서 <트랜스>라고 하는 용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트랜스맨>은 여성으로 태어나서 남성이 된 사람을, <트랜스 우먼>은 남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이 된 사람을 말한다. 한편 <인터섹스> 즉 간성(間性)은 태어날때부터 생식기가 모호하거나 그 밖의 신체적인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 P346

성별과 성행위를 가리키는 데 모두 성 sex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빈곤함을 보여 준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아동을 둘러싼 혐오감의 대부분은 이 같은 불행한 언어적 결합에서 기인한다. 트랜스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타락으로 여겨지며 아이들의 타락은 비정상적이고 불온한 것이다. 그러나 트랜스인 아이들은 성적 취향이 아니라 성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들이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자신이 누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것이다. 트랜스 인권 운동가인 에이든 키가 말했듯이 <젠더는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이고, 성적 취향은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 사람인가를 보여 준다.‘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다. 그럼에도 트랜스젠더라는 복잡한 정체성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이러한 개념이 얼마나 자주 자녀와 부모, 보다 넓은 지역사회에서 혼동되고 있는지 드러난다. <게이>와 <트랜스젠더>는 별도의 범주이지만 둘 사이에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이러한 차이를 알기란 특히 어렵다.  - P347

젠더는 자기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자기 이해가 자아에 대한 내적인 인식뿐 아니라, 때로는 좋아하는 옷이나 놀이 유형 같은외적인 행동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 문제가 유전이나 자궁 내의 안드로겐 수치, 어린 시절의 사회적 영향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는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모호하다. 젠더 불일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컬럼비아 대학 심리학과 교수 하이노 메이어-발부르그HeinoMeyer-Bahlburg는 젠더 불일치를 유발하는 여러 가지 잠재적인 생물학적메커니즘을 설명했다. 그는 400개에 달하는 희귀 유전자와 후생적 현상이 연관이 있을 수 있으며, 유전자가 직접적으로 호르몬을 조절하지는 않지만 성격 형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버드 대학 소아과 부교수이자 선도적인 소아내분비학자인 노먼 스팩Norman Spack은 <지금 우리가가진 뇌 그림은 최초의 우주 비행사가 달에서 찍은 멋진 지구 사진과 같다. 우리는 이 사진에서 대륙과 대양, 기상 상황 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젠더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동차 번호판까지 읽을 수 있는 보다 세밀한 사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폐증과 마찬가지로 젠더불일치 역시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만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해당 증상이 실제로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더 인식되는것인지는 불분명하다. - P358

비유전적인 생물학적 현상에 관한 논쟁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1938년에 개발된 디에틸스틸베스트롤DES은 1970년대 초반까지 유산을 예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자궁 내의 남녀 태아 모두에게 부작용을 유발했다. <DES의 자식들 네트워크> 회원들을 상대로 2002년에실시된 조사는 그들 중 50퍼센트가 트랜스젠더라는 이례적인 확률을 보여 주었다. 이는 임신 중 호르몬 수치가 크로스 젠더 정체성을 유발할 수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또한 과학자들은 식품부터 바닥 광택제, 포장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에서 발견되는 화학 물질 중 하나인 내분비교란물질EDCS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내분비교란물질은 양서류의생식 계통에 작용하여 기형 발생률을 높이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내분비교란물질이 인간의 생식기 기형 및 이례적인 성 정체성의 발생률증가에도 일조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 P359

성 정체성 장애가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는 이상, 전문가들은 이를 치효하려 할 것이고 부모들은 치료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꼬리표보다 아이에게 집중할 때다. 미국 아동 국립 의료 센터의 정신과 의사 에드가르도 멘비엘Edgardo Menvielle은 말했다. 「목표는 아이들이 잘 적응하고, 건강하며, 건강한 자존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젠더 형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행복의 구성 요소와 건강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예측하는 제도보다는 아동의 정신 건강을 우선순위에 두는 편이 옳을듯하다. 멘비엘은 트랜스 아동을 무조건 장애가 있는 상태로 보는 대신에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본다. 암스테르담에서 젠더 발달 문제를 연구하는페기 코언-케테니스Peggy Cohen-Kettenis 교수도 <예컨대 분리 불안이나 체계적이지 못한 육아, 우울증 등 기능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하고자 했으며, <그런 경우에 아이가 최종적으로 보여 주는 성별에 관계없이 가족들은 괜찮았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성 정체성 때문에 근원적인 문제가 흐려지지 말아야 하고, 마찬가지로 근원적인 문제 때문에 성 정체성을다루는 일이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P363

하지만 성 정체성 장애는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이 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정체성 자체도 장애임을 암시한다.
이는 위험한 관점이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가 어떤 정체성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정체성이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첫 번째 원리 중 하나인 동일률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사람이거나 음악가가 음악에 재능이 있는 이유>에 대한 <단일 원인>은 <각각의 존재가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로크는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것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지식이라고 단언했다. 누군가에게 그 사람 자신이 되지 말라고 강요함으로써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등식을 깨뜨리는 행위는 그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한다. 성 정체성 장애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정체성을 부정한다. 정체성을 표출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정체성 자체를 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유대인의 정체성, 투치족의 정체성, 공산주의가 억압한 여러 정체성 등을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없애려고 했을 때 20세기는 최악의 순간을 맞이했다. 정체성을 제거하려는 이같은 거시적인 수준의 시도들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는 미시적인 수준의 시도도 마찬가지다. - P364

베티나와 그렉은 내게 그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안심 폴더>를 보여 주었다. 많은 트랜스 아이들의 부모가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닌다. 안심폴더란 바로 법 집행이나 의료 시스템이 젠더 불일치에 대해 적대적이거나익숙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보여 주는 서류들이다. 폴더에는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될 수 있다. 아이의 성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소아과 의사와 치료 전문가의 편지,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친구나 가족구성원이 부모의 양육방식이 건전하다고 증언하는 편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목사나 성직자의 편지, 아이가 일생 동안 전형적이지 않은 젠더 행동을보였다고 증명하는 동영상이나 스냅 사진, 성별이나 이름을 변경했다고보여 주는 출생증명서나 여권, 사회보장카드 등의 사본, 가능하다면 가족의 안정성을 증명하는 가정 조사 기록, 부모가 아동 학대자가 아니라는 범죄정보국의 보고서 등이다.
나는 베티나가 그녀의 옹호적인 관점 덕분에 그렉보다 이 일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궁금했다. 그렉이 울기 시작했다.「나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가 흐느꼈다.「그 모든 것이 우리의 어린 아들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가 행복하길 원해요.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기 전에 찍은 우리 가족사진을 발견하면 그때의 어린 아들이 그리워요. 아직은 가끔 한 번씩 마음이 아플 뿐이에요.」나는 베티나에게 그녀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는지 물었다. 잠깐 동안 생각을정리하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없어요. 내가 후회하는 것은 폴라와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이에요. 나는 딸아이의 유아 시절을 놓쳤어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거죠.」
많은 트랜스젠더의 부모들은 내게 그들이 비록 다른 아이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잃게 된 원래의 아이에 개한 슬픔을 설명해 주었다. - P368

최근의 과학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 소년을 소녀로 성공적으로 키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한 연구에서는 XY(남성) 염색체와 고환을 가졌지만 페니스는 없는 배설강외번증인 아이들 중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으로 정해지고 거세된 이들을 관찰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자라면서 남성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고 모두가 <적당한 수준부터 뚜렷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남성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관심과 태도를 보였다. 이 연구 논문을 저술한 윌리엄 라이너William G. Reiner가 말했다. 이 아이들은 정상적인 남성의 성 정체성이 페니스가 없어도 발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출생 시에 고환을 제거하거나 거세하고 확실한 여성으로 양육된 후에도 그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그들을 여성이라고 말하는 모든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정체성과 성 역할을 개발하는 듯 보인다. - P370

나는 나를 구원해 줄 사랑을 위해 항상 기도했어요. 이상한 방식이었지만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사랑이었어요. 내가 기대했던 방식은 아니었죠. 디디의 사랑뿐 아니라 가족의 사랑도 내가 남자가 되게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커밍아웃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용기를 주었죠. 요컨대 사랑은 내가 남자로 있을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진실을 말할 수 있게해주었습니다. - P3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둘은 끝내 헤어졌다. 릴리안은 비뚝거리며 자기 방으로 걸어갔고, 프랜시스는 어지럽혀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또 몸이 와인잔처럼 울리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에 뒤덮여 있던 먼지를 말끔히 닦아낸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의 색깔이 더 선명히 보였다. 물건들의 모서리는 칼날 같았고, 이불 테두리에 대어진 실크의 촉감이 기가 막혔다. 크리스티나와 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녀와 함께 보냈던밤을 돌이켜보았다. 바로 여기에서, 옆방에 있는 부모님 몰래, 조용히, 조금씩, 슬그머니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을. 그게 정말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랬겠지. 아니, 그랬을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크리스티나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304

그렇게 생각하니, 놀랍게도 승리감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그 기분은 즉시 사그라들면서 우울한 감정으로 변해갔다. ‘대체 릴리안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둘 사이의 격정을 이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프랜시스는 처음으로 그 격정이 무언가 통제할 수 없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은 것으로느껴졌다. 마치 릴리안과 둘이서 야밤을 틈타 어느 도망자를 집 안에 들여놓고 다락방이나 벽 뒤의 공간 같은 데에 은닉해둔 것만 같았다. - P336

"아니, 완벽했지. 하지만
"하지만 뭐?"
"음, 완벽하기는 했지만, 유리 돔이나 호박(琥) 안에 갇힌 것처럼완벽했다고. 우리는 이렇게 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 커튼을 쳐놓은 방에 누워서 뒹구는 것밖에 안 하잖아."
"그것 말고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는 대화도 마찬가지야. 우린 순 실없는 얘기만 해. 마법의 양탄자나, 집시 왕비 같은 거 너는 내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있는 존재야. 나는 너와 환상 속에서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글쎄, 모르겠네. 내가 뭘 원하는지.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들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처음이지만,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너를데리고 춤을 추러 갈 수도 있고, 만찬에 갈수도...."
"네가 남자였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거야. 렌이 알고서 너한테 싸우자고 덤벼들었을 테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었을 테고, 정말로 남자가 되고 싶단 말이야? 아니잖아. 그랬다면나는 너를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야. 애초에 너는 네가 아니었을 테니까. 춤, 만찬...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그런 걸 수도 없이 했지만 죄다 아무 의미도 없었어. 정말로 의미 있는 건 이거야." - P341

릴리안의 존재감을 되살리고 싶어서 절박해졌다. 그녀의 실체를,
그녀가 존재한다는 실감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하필 날씨가 좋아서 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음악당에는 한 쌍의 연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풀잎으로 여자의 코를 간질이고 있는 걸보고, 프랜시스는 음악당의 계단을 올라갈 생각도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대신 테니스 코트로 가보았다. 젊은 여자들이 테니스 치는모습을 릴리안과 함께 지켜봤던 그곳에서는 지금도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트가 축 쳐졌고, 코트 바닥은 긴 여름 동안 시달린 탓에 다 닳아 있었다. 연못에도 가보았지만, 물이 시커멓고 기슭에 더러운 거품이며 더껑이가 앉아 있었기에 프랜시스는 재빨리 그곳을떠났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원은 작고 교외다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였다. 서쪽의 비탈에 펼쳐진 휑한 공터는 마치사막의 평원 같았다. 몇 해 전 공원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대저택과 정원의 잔해들이 무엇보다도 눈에 잘 들어왔다. 우두커니 서 있는 주랑현관, 사라진 시대를 가리키고 있는 해시계,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는 처연한 가로수길 따위가. - P3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고난 성향에 더해서 범죄자를 만드는 데 압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 가지 위험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편부모 가정이다. 미국에서자라는 모든 아동 중 절반 이상이 어느 순간에는 편부모 가정을 경험한다.
미국 전체 가정 중 18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인 데 비해, 편모 가정의 경우에는 43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이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약물을 남용할확률이 크고, 학교를 중퇴할 가능성이 높으며,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은 낮다. 이들은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형편없는 직장에서 일할 것이다. 일찍 결혼하고 일찍 이혼하는 경향이 있으며 본인도 편부모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범죄자가 될 가능성도 훨씬 높다. - P294

두 번째 위험 요인은 아동 학대 또는 방치이며 종종 첫 번째 요인과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매년 3만 명 이상의 미국 어린이들이 학대를 당하거나 방치된다. 애착 이론을 처음 제시한 정신과 의사 존 볼비 JohnBowlby는 학대받고 방치된 아이들이 세상을 <편안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여기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상과 전쟁을 벌이는 식으로 대응한다>고 설명했다. 즉 우울증과 자기 연민 혹은 공격성과 비행을통해 세상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 - P295

종종 앞의 두 가지 요인에 함께 동반하기도 하는 세 번째 커다란 위험요인은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신체적 학대를 겪고 부모 사이의 폭력을 목격하고 가족 내 폭력을 경험한 아동의 표본을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들은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폭력적인 비행 청소년이 될 확률이 두 배나 높았다. "물론 학대받은 아이들은 부모의 유전적인 성향을 물려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가족으로부터 아이들을 멀리 떼어 놓는 방법도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동복지 제도 역시 높은 범죄 확률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일리노이 대학 사회복지 대학원의 제스 맥도널드Jess M. McDonald는 <아동복지 제도는 소년 사법제도를 살찌우는 제도다>라고 단언했다.  - P296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자기 파괴적인 경향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범죄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패링턴David P. Farrington의 지적에 따르면 미성년 재소자들은 맥주를 더 많이 소비했고, 더 자주 술을 마셨으며, 불법적인 약물을 더 많이 복용했다. 또한 이른 나이에 흡연을 시작하거나 도박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갖는 편이며 파트너 또한 무척 다양했다. 그렇지만 피임을 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이러한 행동들 대부분은 서투른 충동 조절과 관계가 있지만 낮은 자존감이나 심지어는 자기혐오의 표현인 경우도 빈번하다.
사회평론가 주디스 해리스Judith Harris는 범죄성에서 사회적 환경이가정환경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성인과 달리 청소년들은 대부분 집단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어린 범죄자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5퍼센트 이하이다. 흔히 청소년 범죄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집단성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청소년기의 충동에서 기인한다." 또한 비행 가능성은 마약과 총에 대한 접근성, 빈곤정도, 소원한 이웃 관계, 인구밀도와 연관이 있다." 아직은 미성년 수감자 중4분의 1에 불과하지만 여자 청소년의 범죄 비율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여자 청소년은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남자 청소년보다 확실히 높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법원에서 미성년 범죄자로 확인된 여자 청소년 중 75퍼센트가 성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었다. 한편 상습적인 미성년 범죄자 중 대략 3분의 2는 갱단의 조직원이다. 2009년에 미국에는 73만 1천 명의 갱들이 2만 8천 개 이상의 갱 조직에 속해 있었고 그들 중 절반가량이 청소년이었다.  - P298

시도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면 크리슈나는 다른 곳에서 어울릴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UCLA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똑똑했다. 그는 허세 뒤에 숨어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위험을 피했다. 그가가지고 다니던 총은 단지 이행 대상 즉 보다 요란한 형태의 라이너스의 담요였다. 대학 신입생이 된 그의 모습이 꿈의 수평선 위에 어른거렸다. 그는 <지금의 모습>이 되지 않았더라면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잠재적인 모습>이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에 갇혀 있었다. 수평적 정체성을 찾는 일은 삶에서 가장 큰 해방감을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있다. 크리슈나의 경우에는 비유적인 감옥이 그를 실제 감옥에 들어가게만들었다.
스틸워터 교도소는 온통 잿빛이었다. 크리슈나는 면회실에 올 때마다 말쑥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주의적인 면은 희미해졌다. 어느 날 오후 크리슈나가 면회실에서 내게 말했다. 이제는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아요. 전에는 어머니가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어머니가 나름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자라면서 너무 무력하다고 느꼈어요. 사는 곳도 선택할 수 없었죠. 그리고 깨달았어요. 갱단에 들어가면 정말 강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결과가 뭐죠? 나는 다시 완전히 무력해졌어요. 처음의 그 자리로되돌아온 거예요. 이번에는 스스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죠 - P315

교도소에서는 애정의 한도가 정해지며, 사람에 따라서는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상 세계보다 이편이 더 수월할 수 있다. 예컨대 면회일이 되면 교도소에 찾아가고, 그곳에서 하루 종일 머물고, 운동화를 가져가거나 수감된 아들의 여자 친구를 가족처럼 대해서 그녀가 아들과 헤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등의 명백하고 구체적인 행동은 꼭 기분이좋아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질이 급하고 감정이 변화무쌍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힘들어했을 것이다. 수시로 감정 변화를 겪는 사람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일관된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 대다수 수감자들에게 이를테면 <부모님이 면회일에 오겠다고 했는데정말 왔어요>라는 식의 유효한 신뢰는 거의 계시에 가깝다. 이러한 부모의 지지가 자녀의 출소와 동시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계속해서 보조 바퀴처럼 작용했다. 요컨대 자녀의 형기가 끝날 즈음에는부모 역시 새로운 자신감과 기술이 생기고 아무런 도움이 없어도 자신의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문제 청소년과 가족의 재결합은 그 뒤에 이어질 사회 전체와의 잠재적인 재결합을 반영할 수 있다. 나는 헤네핀 카운티 교정 시설의 가족 면회일에 처음 방문했을 때 상황이 거의 비슷해 보이는 두 명의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이도 같았고, 형량도 비슷했으며, 출소 예정일도 거의 같았다. 곧 나는 두 아이 중 한 명의 부모가 모든 재판일과 가족 상담 시간 및 면회 시간에 참석하기 위해서 매번 자동차로 두 시간씩 걸리는 거리를 찾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가 석방 후에 일할 수 있도록 벌써 건설업 쪽에 일자리도 마련해 둔상태였다. 다른 아이의 가족은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이었고 시설에서 3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그는 친구의 가족과 건성으로 어울렸다. 이후 두 소년은 서로 다른 세상으로 출소했다. - P318

대부분의 수평적 정체성에서 해당 정체성 집단의 원초적 잘못을 판단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정말 가슴 아픈 주장은 이를테면 장애 아동이자신의 장애 때문에 처벌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살펴보았고 때로 부모가 심하게 잘못을 저지른 경우도 함께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가족들 중 상당수는 사회적인 멸시와 잔혹한 일을 당했으며, 감정적·경제적으로 고립을 겪었고 낙담하고 좌절했다. 나는 자녀를 도와주고 싶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이나 지식이 없는 부모들을 많이 만났다. 장애 아동을 둔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표면상 자격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부모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우리가 해결할 수도 있는문제들을 더욱 악화시킨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현실로 인정하길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인류애를 훼손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수많은 질환에 비하면 범죄성은 상대적으로 해결 가능한 대상처럼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다운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던 과거에서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방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범죄예방 연구를 통해서 효과적인 해결책들이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의 광대한 부문에서 부채를 탕감하느라 그런 해결책의 대부분을 무시한다. 비행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 중 4분의 3가량은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치료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소년 법원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3~6퍼센트에 불과하다. 사회에서 천대받는 아이들이 우리의 공감 부족 때문에 성공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연하듯이 치료가 보류되는 이유는 치료 차원의 개입이 범죄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조치라는 일반적인 편견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치료가 비효율적이고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주장때문이다. 하지만 비효율적이고 비싸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미성년자 한 명을 교도소에 구금하기 위해서는 연간 약 2만에서 6만 5천달러의 비용이 든다. 교도소에서 갱생 프로그램을 보다 많이 운영하면 폭력을 줄일 수 있고 이는 비용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주된 재정적 이익은 재범행을 줄이는 데서 얻을 수 있다. 범죄는 막대한 연쇄 비용을 발생시킨다. 여기에는 재산 피해를 물론이고 재판비용, 상해 치료비 및 겁에 질린 피해자가 입는 심리적 부채 등도 포함된다. 국립 약물중독 및 남용센터 소장 조지프 캘리파노는 <치료와 책임은 서로 배타적인 목표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목표다>라고 말했다. - P320

우리는 아이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지만 언제나 효과적인 예방보다는 만족스러운 징벌을 선택한다.
기본적인 가족 치료 프로그램은 대략적으로 가족당 2천 달러에서 3만 달러의 비용이면 어디서나 실행될 수 있다. <하이스코프 페리 프리스쿨 프로젝트>는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신참 어머니들에게 치료를 실시하는 비용 1달러당 나중에 들여야 할 비용 7달러가 절약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 수치는 치료의 결과로 법을 어기지 않은 이들의 긍정적인 경제적 기여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은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강력 범죄를 예방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보면 <삼진 아웃제>의 경우 범죄 한건당 대략 1만 6천 달러, 가석방의 경우 대략 1만 4천 달러가 드는 반면에 그 부모를 교육하는 경우에는 겨우 6.351달러가 들 뿐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 두기 위한 졸업 장려금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아주 훌륭한 결과를 보여 준다. 페리 프로젝트에 따르면, 미국에서 위험한 환경에처한 5세 미만의 자녀를 둔 저소득 가정에 개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4천억 달러의 비용이 들 수 있다.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올해에 돈을 쓰면 10년 후에는 교도소에 드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 수 있지만 이런 등식을 품목별 예산에, 특히 정치 회기 내에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 예산에 적용하기는 힘든 현실이다. - P323

수는 선도프로그램 관계자들에게 혹시 딜런에게 상담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들은 표준 심리검사를 실시했으며 딜런에게서 자살이나 살인, 우울증 같은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만약 내가 방을 가득 메운 부모들에게 지금 당장 한마디 할 수 있다면 <절대로 보이는 대로 믿지말라고 할 겁니다.」 수가 말했다. 「딜런이 착했냐고요? 사려 깊은 아이였냐고요? 그 아이가 죽기 얼마 전이었어요. 나는 산책을 나가면서 딜런에게 비가 오면 데리러 와줘>라고 미리 부탁했죠. 그리고 딜런은 내가 부탁한 대로 했어요. 딜런은 그동안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사람들의 곁을 지킬 줄 아는 아이였어요. 하지만 이제 나는 딜런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숨어 있었던 거예요 딜런과 에릭은 피자 가게에서 함께 일했어요. 콜럼바인 사건이 일어나기 2주 전에 에릭이 사랑하던 개가 아팠어요. 다시 나아질 것 같지 않았죠. 그래서 딜런은 자신의 근무시간에 더해서 에릭의 근무시간까지 대신 일을했어요 에릭이 개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죠.」 - P338

내가 클리볼드 부부에게 이장을 위해 인터뷰했던 몇몇 다른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이 상황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한다고 말하자 톰이 말했다. 우리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이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우리는 그 아이가 다른 일을 하기를, 보다 나은 일을 하기를 바랄 수 없어요. 결말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훨씬 잘 들려줄 수 있죠. 우리가 처음 만난 지 몇 년이 지났을때 수가 내게 말했다. 「오래 전에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집을 살 뻔했었어요.
우리가 제시한 가격이 거절당했고 리틀턴의 이 집이 매물로 나왔죠. 우리는낮은 가격을 제시했고 그 가격이 받아들여져서 너무 신났어요. 당시 우리는원래 사려고 했던 캘리포니아의 그 집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 일이 잘 성사되었더라면 콜럼바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처음에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애초에 우리에게 아이가 없었더라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라고는 했어요. 톰과 내가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딜런은 이 세상에 나오지않았을 테고 그 끔찍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아이가 있어서 기쁘고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내 아들이라서 기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은 비록 그 사랑의 대가로 이런 아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서 유일한 가장 큰 기쁨이었으니까요. 나는 다른 누군가의 아픔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나는 아픔을 받아들여요. 인생은 아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이 내 인생이에요. 딜런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엔 더 나았겠죠. 하지만 내게는 더 나은 일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