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끝내 헤어졌다. 릴리안은 비뚝거리며 자기 방으로 걸어갔고, 프랜시스는 어지럽혀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또 몸이 와인잔처럼 울리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에 뒤덮여 있던 먼지를 말끔히 닦아낸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의 색깔이 더 선명히 보였다. 물건들의 모서리는 칼날 같았고, 이불 테두리에 대어진 실크의 촉감이 기가 막혔다. 크리스티나와 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녀와 함께 보냈던밤을 돌이켜보았다. 바로 여기에서, 옆방에 있는 부모님 몰래, 조용히, 조금씩, 슬그머니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을. 그게 정말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랬겠지. 아니, 그랬을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절대로 크리스티나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304
그렇게 생각하니, 놀랍게도 승리감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나그 기분은 즉시 사그라들면서 우울한 감정으로 변해갔다. ‘대체 릴리안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둘 사이의 격정을 이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프랜시스는 처음으로 그 격정이 무언가 통제할 수 없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은 것으로느껴졌다. 마치 릴리안과 둘이서 야밤을 틈타 어느 도망자를 집 안에 들여놓고 다락방이나 벽 뒤의 공간 같은 데에 은닉해둔 것만 같았다. - P336
"아니, 완벽했지. 하지만 "하지만 뭐?" "음, 완벽하기는 했지만, 유리 돔이나 호박(琥) 안에 갇힌 것처럼완벽했다고. 우리는 이렇게 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 커튼을 쳐놓은 방에 누워서 뒹구는 것밖에 안 하잖아." "그것 말고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는 대화도 마찬가지야. 우린 순 실없는 얘기만 해. 마법의 양탄자나, 집시 왕비 같은 거 너는 내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있는 존재야. 나는 너와 환상 속에서만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글쎄, 모르겠네. 내가 뭘 원하는지.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들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처음이지만,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너를데리고 춤을 추러 갈 수도 있고, 만찬에 갈수도...." "네가 남자였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을 거야. 렌이 알고서 너한테 싸우자고 덤벼들었을 테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온갖 욕을 들어먹었을 테고, 정말로 남자가 되고 싶단 말이야? 아니잖아. 그랬다면나는 너를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야. 애초에 너는 네가 아니었을 테니까. 춤, 만찬...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그런 걸 수도 없이 했지만 죄다 아무 의미도 없었어. 정말로 의미 있는 건 이거야." - P341
릴리안의 존재감을 되살리고 싶어서 절박해졌다. 그녀의 실체를, 그녀가 존재한다는 실감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하필 날씨가 좋아서 공원에 사람이 많았다. 음악당에는 한 쌍의 연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풀잎으로 여자의 코를 간질이고 있는 걸보고, 프랜시스는 음악당의 계단을 올라갈 생각도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대신 테니스 코트로 가보았다. 젊은 여자들이 테니스 치는모습을 릴리안과 함께 지켜봤던 그곳에서는 지금도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네트가 축 쳐졌고, 코트 바닥은 긴 여름 동안 시달린 탓에 다 닳아 있었다. 연못에도 가보았지만, 물이 시커멓고 기슭에 더러운 거품이며 더껑이가 앉아 있었기에 프랜시스는 재빨리 그곳을떠났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이 공원은 작고 교외다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였다. 서쪽의 비탈에 펼쳐진 휑한 공터는 마치사막의 평원 같았다. 몇 해 전 공원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 있었던 대저택과 정원의 잔해들이 무엇보다도 눈에 잘 들어왔다. 우두커니 서 있는 주랑현관, 사라진 시대를 가리키고 있는 해시계, 아무 데로도 이어지지 않는 처연한 가로수길 따위가.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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