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코로나 시대 2년차를 목전에 둔 우리는 백신을 애타게 기다리고있습니다. 어언 1년 이상 마스크와 거리두기에 의존해 답답한 하늘과 변화된 기후와 몸과 마음의 간격을 둔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언제쯤 어떻게 끝나게 될까 모두들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pandemic이 발생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인플루엔자가 가장 큰 위협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실제로 몇 명의 사람이 죽었을까요?

지금 세계에서 코로나19로 매일 죽는 사람이 수천 명이라는 것을생각한다면, 조류인플루엔자가 변이를 일으켜 또 다른 팬데믹이 발생할 확률은 사람이 일평생 개에 물려 죽을 확률보다 낮습니다. 우린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너무 많은 우려를 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언론과 비과학이 만들어낸 환상에 사로잡혀 이미 터널의 출구가 보이지만, 아직까지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라는 이 질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구제역이 백신 정책으로 돌아선 이후 다시 과거의 무분별한 살처분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전염병을 거쳤지만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요? 매년가축 방역 분야에서 전염병의 기억은 쉽게 잊혀지고 다시 반복됩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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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비저는 중절 수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아이를키우는 일을 두고 앤 캐서린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했고 앤 캐서린은 훔친 예술품들을 갖고 있는 한 아기를 가질 일은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이건 아이에게는 독배나 마찬가지야." 그녀의 말은브라이트비저의 마음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도 앤캐서린이 맞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게다락을 비울 깔끔한 방법이 있을까 고심한다. 한밤중에 경찰서에 전부 놓고 올 수도 있다. 그러면 두 사람은 더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어른이 될수 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니야." 브라이트비저가 덧붙인다. 지난 사건을 통해 새로 알게 된 게 있어서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값비싼 미술품을 훔치다가 현행범으로 잡혔다. 그랬는데도 큰 벌을 받지 않았다! 스위스에 못 가게된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스위스가 아니어도 갈 곳은 얼마든지 있다. 두 사람은 아직 젊으니 어른이 되는 일이나미래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다. 이번 일로 앤 캐서린은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꼈지만,
브라이트비저는 천하무적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 P181

심각한 문제는 이제 브라이트비저가 작품을 제대로돌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술을 보호하는 것이가장 큰 사명이라고 늘 주장해왔지만, 그뤼예르성의 섬세한 융단을 창문으로 던지고 침대 밑에 처박아두는 것은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은 어떠한가. 거의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벽에서 잡아채급하게 액자에서 빼내고 차 트렁크에 실어 덜컹거리는 길을 이동한다. 보안 카메라를 등지고 훔쳤던 약제상 유화는 나무판 세 개가 결합되어 있는데, 다락에서 이미 화판 사이가 벌어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브라이트비저는 약제상 그림이 상해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다. 미술품 복원 전문가가 전문적인 장비로 외과 수술을 하듯 정밀하게 조금씩 원상 복구를 하고 각 판을다시 연결하면 거의 새 작품처럼 되돌릴 수 있다. 브라이트비저도 이를 알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무 미술관에 그림을 갖다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브라이트비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고치려고 했다. 미술품 복원가라면누구도 추천하지 않을 방법으로, 어떤 큐레이터는 "잔인하다"고까지 표현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는 나무들을 억지로 비틀어 대충 맞춘 후 순간접착제 ‘슈퍼 글루‘로 붙였다.
그림은 계속 다락에 남는다.
루아르 계곡 박물관에서 가져온 천사 무늬 접시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고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운명을 맞는다. 브라이트비저는이때 인생의 티핑 포인트를 지났던 듯하다. 그동안 숨어 있던 내면의 악마가 밖으로 드러났다. 한번은 노르망디에서훔쳐온 정물화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심하게 밟는바람에 작품이 망가져버린 적도 있다.
앤 캐서린은 경찰 조사에서 예전에는 브라이트비저의 미학적 안목을 존중했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가 "더러운"
방법을 써서 "병적으로" 도둑질을 했다고 말한다. 한때는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브라이트비저였지만, 이때부터는 마치 사재기를 하듯그저 무엇이든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집에가져오는 물건 대부분은 앤 캐서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그중 일부는 추하기까지 했다.
무분별하게 절도를 일삼고 차를 허락 없이 사용해도 앤 캐서린은 브라이트비저를 버리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2001년에는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이 된다.
앤 캐서린은 7월 5일생이고 브라이트비저의 생일은 10월1일이다. 이 무렵에는 브라이트비저가 특별히 보여주지 않는 한 새로운 물건이 다락에 들어와도 앤 캐서린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한때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를 따온 것같던 두 사람의 다락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장이 되었다. 끝도 없이 물건이 줄지어 들어올 뿐인. - P197

"네. 제가 훔쳤습니다." 메달을 훔쳤다고 인정해버린다.
마이어는 다시 서랍을 연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마이어가 미안하다는 듯 말하며 책상 너머로 사진을 한 장 더 내민다. 브라이트비저가 앤 캐서린과 스위스성에서 훔쳤던 금 담뱃갑이다. 사진에서 보니 담뱃갑이 살짝지저분하다. 마이어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자백하면 된다고 설득한다. 몇 마디 말이면 브라이트비저의 악몽은 끝날 수 있다.
결국 담뱃갑을 훔친 것도 털어놓는다.
그런데 마이어가 서랍을 다시 연다. 세 번째다. 이번에는 두 손을 모두 서랍에 넣더니 사진 한 뭉치를 꺼내 책상에 던진다. 덴마크 상아 플루트, 독일 청동 조각상, 벨기에은 포도주잔, 그리고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이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함께 훔쳤던 수발총(벌써 8년 전이다) 등이 찍힌 사진이 쏟아진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기민하게 상황을 읽어내는 브라이트비저이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낀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책상에 흩뿌려진 사진을 보며 범죄 사실을 하나씩 모두 자백한다. 수북하던 사진더미가 한쪽으로 전부 치워졌을 때 브라이트비저는 총 107건의 절도를 인정했다. - P217

이 정도면 역사상 최대 규모의 예술품 범죄라고 할 수있다. 폰데어뮐은 평정을 유지한 채 질문을 이어간다. 이제작품을 회수하는 일이 중요하다. 오래 숨겨둘수록 작품이상할 가능성이 높다. "그림은 전부 어디 있어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다락에 있었죠." 브라이트비저가 답한다. 경찰 보고서를 통해 운하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충격이 매우 컸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차피 삶의많은 부분이 충격의 연속이라 혼란스러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행히 작품은 모두 익사를 면했다고 한다. 물속에 갖다 버리다니, 브라이트비저라면 결코 하지 않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손상은 없었다.
그림들은 더 좋은 곳에 있길 바란다. 아니, 아직 다락 벽에걸려 있다면 좋겠다. 폰데어뮐은 결국 마이어가 수색 영장을 받아 집에 찾아갔던 일을 털어놓는다. 다락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고 말하자 브라이트비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럼 이제 그림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 P227

폰데어뮐이 판사와 협의하는 동안 스텐겔과 브라이트비저 둘만 있을 기회가 생긴다. 스텐겔은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브라이트비저를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마구 껴안는다. 곧 브라이트비저가 다시 끌려 나가 감옥에 갇힐 시간이다. 스텐겔이 그의 귀에 대고 침착하게 속삭인다. "그림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마라." 그녀는 브라이트비저가 이미 경찰에 실토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림같은 건 없는 거야.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어머니는 브라이트비저에게 이 경고를 전하러 스위스까지 왔지만, 이 말외에 다른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이것이 브라이트비저에게 주어진 첫 번째 힌트였다. - P229

어머니는 다락으로 올라간다.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고경찰에 진술했다. 아들이 도둑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락을 직접 볼 마음의 준비가 된 건 아니다. 제정신인 사람이 모았다고 볼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예술 작품으로 가득한 공간. 다행히도 아들과는 달리 다락에 들어서자마자 색감에 취하거나 아름다움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나이만 먹었지 제 앞가림도 못하는어린애 같은 아들 덕에 인생을 망친 듯하다. 그녀는 방을보며 ‘전부 훔친 물건이겠구나‘ 생각한다. 장물을 은닉해주는 것 역시 공범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300개가 넘으니기소도 300건 이상일 수 있다. 모욕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결국 파멸할 것이다. 스텐겔은 다락에 있던 예술품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을 향한 화살처럼 느껴졌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브라이트비저는 그때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바그너 박물관에서 자신이 체포되었던 바로 그날 어머니는 "숙청"
을 시작했을 것이다. "화가 치민" 스텐은 "파멸을 향한 광란의 밤"을 벌였으며 "모두 한 방에 쓸어버렸다고 말한다. 침대 탁자며 옷장, 화장대, 책상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가구를 전부 밀어 쓰러트렸고 그 위에 올려놓았던 수많은 물건들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도 낚아챘다. "20개? 50개? 몇 개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래층으로 가서 쓰레기 봉투와 골판지 상자를 가지고 다시 올라왔다. 은과 도자기, 상아로 된 물건들을 구리 화판그림과 함께 쓸어 담았다. 스텐겔은 "금속 쓰레기"들은 따로 모아 담았다고 말한다. 쓰레기 봉투 일곱 개인가 여덟개가 가득 찼고 상자도 몇 개 되었다. - P232

하지만 그 전에 스텐겔은 그림을 전부 어딘가 은밀한 곳못했다.
으로 옮긴다. 브라이트비저가 어디에 두었는지 묻자 그저
"숲"이라고 답한다. 이 일을 할 때 프리치의 손을 빌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유화 60여 점이 모두 숲속 공터 어딘가 한데 쌓여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든다. 초상화는 정물화사이를 가른 채 끼어들어가 있고 풍경화는 마구 접힌 채우의화들과 엉켜 있는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오로지 아름다음으로만 이루어진 이 거대한 덩어리는 이제 참담함 그자체다.
브라이트비저는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헌신으로 이 모든 일을 했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믿기로 했고, 그래야만한다. "나를 보호하려고 그랬겠죠." 다락을 정리해야 경찰이 브라이트비저가 저지른 범죄의 증거를 찾지 못할 테니말이다. 경찰이 들이닥치면 마약을 화장실에 버리고 물을내려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좀 더 극단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브라이트비저는 스텐겔의 행동이 모성애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텐겔이 경찰에 진술한 내용은 조금 다르다.
"나는 아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어요. 그 아이가 저에게준 상처를 모두 되돌려주고 벌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가진 전부를 없애버렸죠."
브라이트비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어머니는 라이터로 그림 더미에 불을 지른다. 더 빨리 타오르도록 휘발유를 부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 화판들은 바짝 말라 있고 유화는 불이 잘 붙는다. 브라이트비저는 빠르게 치솟는 불길과 쉬쉬 소리, 여기저기 튀는 불꽃을 상상한다. 그림들이 쪼그라들며 거품처럼 사라져간다. 불의 열기가 뜨겁게 올라오고 물감은 마치 눈물 번진 얼굴의 마스카라처럼 액자 위를 흘러 땅으로뚝뚝 떨어진다. 곧 그림 더미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불은 탐욕스레 날뛰며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결국 재만 남는다. - P237

검사는 브라이트비저의 매력에 끄떡도 하지 않고 최종변론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다. 브라이트비저가 앤캐서린에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경찰이 사전에 차단해 당사자에게 전달되지는 못한 편지다. 편지에는 브라이트비저의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다. "만약 그때 체포되지않았더라면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겠지. 거기다 새로운 작품도 스무 개쯤? 아니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을 거고." 심리치료사 미셸 슈미트는 브라이트비저가 "죄책감을 느끼지못한다"고 말하면서 "상습적으로 범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했다.
스위스 검사는 브라이트비저 같은 사람을 시민 사회일원으로 허락하는 것은 인류 문명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브라이트비저에게 특수 절도죄로 무거운 처벌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한다. 변호사는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밀어붙인다. 3일 간의 재판이 끝나고 배심원도 심의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 P255

두 시간 반이 지나고 재판결과가 나온다. 법에서는 ‘무엇을‘ 훔쳤는지보다 ‘어떻게‘ 훔쳤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탕 하나를 훔쳤다고 해도 총을들고 있었다면 빈손으로 가서 크라나흐 그림을 들고 나온 도둑보다 죄가 무겁다. 브라이트비저는 폭력을 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협박조차 한 적이 없으므로, 법에서는 이를 단순 절도로 간주하고 이 경우 최고형량은 징역 5년이다.
배심원단은 징역 4년을 선고한다. 브라이트비저가 감옥에 있던 1년 3개월도 이 기간에 포함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지불해야 할 벌금도 많이 나왔다. 그래도 수십만 달러(수억 원) 정도이지 수천억 달러(수조 원)는 아니다. 법률 관계자들은 판결이 다소 약하다는 의견이지만 브라이트비저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경찰 조사에서는 순순히 자백하면 형량이 줄어들고 징역형 외에 다른 처벌은 없을 거라고들었다. 게다가 재판이 끝나면 곧바로 풀려날 수 있으리라기대했다. 마이어와 폰데어뮐은 사실 이런 내용을 살짝 흘리기만 했을 뿐 재판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법정에서다시 감옥으로 호송되기 전 브라이트비저는 방청석의 아버지를 쳐다본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다. - P256

이야기가 뒤죽박죽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직장을 잃고 집도 없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두렵고 화도 난 상태다.
스텐겔은 한 마디 더 보탠다. 이 부분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제 아들을 증오합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최종 변론이다.
프랑스 검사가 끼어들어 그녀의 이야기에서 사과는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인류 문화 유산에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타격을 입혔습니다."
검사가 재판부를 향해 이야기한다. "이 끔찍한 사건의 주요 인물이며 가장 책임이 큰 사람입니다."
스텐겔의 심리 분석 보고서가 증거로 제출된다. 앤 캐서린의 심리 검사를 맡았던 심리학자 세자르 레돈도는 스텐겔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을 양심의 가책 없이무자비하게 파괴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적었다. 스텐겔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더 간단하고 인간적이며 합법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그냥 경찰서에 작품을 내놓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레돈도는 이 부분을 알아내고자 했다. 하나뿐인 자식을 향한 소유욕, 그 안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애증, 스텐겔은 아들과의 유대를 갈망한다. 마치 브라이트비저가 예술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다. 브라이트비저를 검사했던 스위스 심리 치료사 슈미트 역시 똑같은말을 했다.
스텐겔에게 다락의 작품들은 아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는경쟁자나 마찬가지였다. 여자친구인 앤 캐서린보다도 더강력한 존재였다. 박물관이나 다락, 어디에라도 이 작품들이 존재하는 한, 아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브라이트비저가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라이벌을 제거했고, 브라이트비저 역시 매우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벌했다. - P263

직업이 있으면 주중에 사회복귀 훈련시설에서 나올 수있다. 브라이트비저는 목재 벌목 일을 구한다. 몸을 쓰는일을 한 지 오래되었다. 예전에 박물관을 휘젓고 다닐 때는신체 능력이 중요할 때가 있었다. 그는 나무꾼이 되어 숲에서 나무를 쓰러뜨리는 일이 묘하게 좋았다. 전기톱을 든 예술 애호가라니. 여전히 주말이면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와도 거의 4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다.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사실 어머니는 브라이트비저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들을 파괴했고 아들을 발가벗겨 도둑이라고 온 세상에 공표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관계가 파탄 나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입을 맞추고 안아주었으며 언제나처럼 용서하셨어요." 둘은 이제 역경을 함께 딛고 일어난 사이다.
다락에 있던 작품들이 어떻게 됐는지 어머니에게 묻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이 부딪히기만 한다. 브라이트비저가 아는 것은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뿐이다. 도와준 사람은 없는지? 다른 데다 버린 작품이 더 있는지? 그림은 모두 불에 태웠는지, 아니면 태우지 않고 남은 그림이있는지? 타고 남은 재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질문에는 절대 답하지 않을 거다." 어머니가 말한다. "다시는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브라이트비저는 약속한다. - P268

2006년 6월 29일 브라이트비저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도착한다. 출판사에서 돈도 받았겠다. 마침 스테파니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면세점에서 옷가게에 들른다. 보안 컨설턴트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보안상 취약한 부분이 "2초 만에" 눈에 들어온다. 보안 카메라도 없고 보안 요원도 없다. 그 순간 이상한 본능이 치민다. 브라이트비저에 따르면 "몸이 기억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선물할 캘빈 클라인 흰색 바지와 프랑스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 SoniaRykid의 티셔츠 한 장을 골라 여행 가방 안에 집어넣고는 그대로 면세점을 빠져나간다.
그러다 책 홍보를 다닐 때 새 옷을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괴로웠던 시절 옆에서 응원해준 아버지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을 빠져나온 지 1분도 안 돼 다시 돌아가서 옷을 일곱 개 정도더 집어 들고 나온다. 가격으로는 총 1,000달러(약 138만원) 정도 된다. 이제 출판사와의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택시 정류장으로 향한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의 보안 요원 수를 잘못 파악했다. 박물관 경비원과 달리 그들은 사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보안 요원들은 재빨리 브라이트비저를 덮친 후손목에 수갑을 채워 경찰에 넘겼다. 브라이트비저가 유치장에 있느라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출판사에서 그의어머니에게 연락한다. 스텐겔은 놀라서 여기저기 병원마다전화를 돌린다. 아버지와 스테파니 역시 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브라이트비저는 경찰서에서 밤을 새우는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죠.
엄청나게 수치스러웠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지자 아버지는 격분해서 문자를보냈다. "너는 정말 그러고도 깨달은 게 없나 보구나." 그러고는 만나기로 한 일정을 미루기 시작한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삶에서 한 번 더 손을 뗀다. 액자 세공업자 메쉴르 역시 "배신감이 든다"고 말하고 관계를 정리한다. 브라이트비저가 더는 도둑질을 하지 않을 거라 믿으며 법정에서 기꺼이 그의 편에 섰던 메쉴르다. - P276

세상은 가치가 없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시한폭탄이 터져버린다.
그는 어머니가 사준 차로 벨기에에 간다. 2009년 11월브뤼셀 근처에서 열린 골동품 박람회로 향한다. 겨울 풍경화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17세기 구리 화판 유화로, 감정가는 5,000만 달러(약 690억원)다. 저녁이 되자 박람회가 끝나고 직원들이 정리를 시작한다. 브라이트비저는 망설이지도 않는다. 여자친구도 새로 생겼으니 브뤼헐도 새 작품으로 바꿀 때가 되었다. 이걸로 기분이 나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 기분이 나아진다! 스테파니의 아파트에브뤼헐이 들어오자 곧바로 활기가 돌고 기쁜 마음이 든다.
걱정도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있을 것 같다. 살아 있는 느낌이다. 진작 다시 도둑질을 할걸 그랬다. "아름다운 작품 하나로 모든 것이 달라져요."
삶에서 브라이트비저가 만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모두 이상하리만큼 그의 도둑질에 관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메쉴르, 그리고 앤 캐서린도 모두그랬다. 관대한 정도가 아니라 브라이트비저만큼 예술을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예술 전문 기자 노스는 "이 무리에는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지적한다. "도둑질을 멈춰라‘, ‘작품을 돌려놓아라‘, ‘어른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없다. 바로 이 점이 브라이트비저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 그림을 훔쳤다는 걸 알면 묵과하지 않는다. 브라이트비저는 아마 그 점을 잊어버린 듯하다. 스테파니는 앤 캐서린과 달랐다. 스테파니에게 그림이 어디서 났는지 말하자 반응이 좋지 않다. 얼마 전에 출소한 유명한 예술품 도둑이 5,000만 달러나 하는 그림을훔쳐 자신의 집 벽에 걸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공범이되고 말았다.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고도 뻔뻔한 태도의 브라이트비저를 보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바뀌지 않는다.
스테파니는 브라이트비저와의 관계를 끝내고 집에서 쫓아내기 전에 핸드폰으로 그림 사진을 찍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스트라스부르의 월세 방에서 브라이트비저와 브뤼헐을 찾아냈고 브라이트비저는 체포되어 또 한 번 감옥에 갇힌다. - P280

다섯 시간을 운전해 앤트워프에 도착한다. 야구 모자와안경으로 평소처럼 변장하고 현금으로 입장권을 산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루벤스의 집에 들어간다. 시간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 모든 게 거의 그대로였다. 루벤스가 썼던 주방과 거실을 지나 뒤편의 작은 화랑으로 걸어간다. 플렉시글라스 장은 예전보다 견고해 보였고 보안 카메라도 많아졌다. 경비원도 더 많다.
무릎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상아 조각상을 관찰한다. 코가 거의 진열장에 닿으려고 한다. <아담과 이브》는 운하에 잠겼다 구출됐는데도 상태가 나쁘지 않다. 뱀은여전히 선악과 나무를 불길하게 감싸고 있고 태초의 인간두 명도 똑같이 관능적이다. 이브는 머리카락을 등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브라이트비저가 눈을 크게 뜨고 이마를 찡그린다. 이미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목격한 듯한느낌이다. 몇 년을 포스터 침대에서 손을 뻗어 어루만지던<아담과 이브>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전시실을 나서 박물관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사람이 두어 명 더 있지만 주변은 조용하다.
봄이 오고 있어 공기가 따뜻하다. 흰 돌바닥을 두 발로 두드린다. 벽을 휘감은 등나무 덩굴에 봉오리가 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이 정원에 왔을 때는 외투 안에 상아 조각상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미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슬프다. 도둑질을 하던 시간이 아니라, 도둑질을 멈췄던 시간이 아깝다. 브라이트비저는 루벤스의 집 정원에서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왔을 때가 바로 인생의 정점이었다. <아담과 이브>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차창을 내려 바람을 맞으며 앤 캐서린과집으로 달리던 그때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젊고, 승리감에 차 있었다. - P287

브라이트비저는 루벤스의 집 출구를 향해 걷는다. 가는길에 들른 기념품 가게에서 박물관 주요 소장품에 관한 책자를 팔고 있다. 책자에는 <아담과 이브>를 도난당했다 되찾은 이야기가 적혀 있고 한 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아담과 이브>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걸면되겠다. <클레브의 시빌> 복제화를 보는 것처럼 괴롭지 않을 것이다. 브라이트비저는 현금도 없고 직업도 없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머니에게 주유비를 받아야 했을 정도다.
늘 하던 대로 판매대 위치를 확인하고 경비원과 손님의 동향을 살핀다. 보안 카메라가 있는지도 살핀다. 없다. 브라이트비저는 4달러(약 5,500원)짜리 안내 책자 한 권을 슬쩍접어 들고는 유유히 문을 빠져나온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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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나흐Lucas Cranach,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부세 FrançoisBoucher, 와토Antoine Watteau, 호이옌Jan van Goyen, 뒤러Albrecht Diürer등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작품도 있다. 그림이 하도 많다 보니 다락 전체가 색으로 소용돌이친다. 거기에 상아의 광채와 은이 내뿜는 빛이 더해져 색은 더욱 강조되고 반짝이는 금빛이 화려함을 극대화한다. 별 볼 일 없는 동네의특별할 것 없는 집 다락. 예술 전문 기자들은 이곳에 숨겨둔 작품의 가치를 모두 합쳐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억 달러(2조 7,000억 원)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한다.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 두 사람은 환상 속 세계를 뛰어넘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보물 상자 안에 사는 삶이라니. - P31

야밤에 저지른 폭력적인 강도 짓을 브라이트비저와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예술품 절도는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않아야 하며 낮에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가 가드너 박물관 사건을 싫어하는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폭력을 행사한 이후도 문제였다. 도둑들은 위층으로 올라가 이 박물관에서 가장 훌륭한작품인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의 1633년작 <갈릴리 호수의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을 마주 보고 섰다. 그러고는 캔폭풍The버스에 칼을 꽂아 넣었다.
브라이트비저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칼날로 20미터에 이르는 작품의 가장자리를 찢어 물감 조각이 튀어나오고 캔버스의 실밥이 터졌다. 그림이 틀과 액자에서 흐물흐물 떨어져 나와 활기를 잃고 종이가 말려 물감이 갈라지고 깨졌다. 도둑들은 또 다른 렘브란트의 작품에도 똑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브라이트비저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범죄자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의로 그림을 가르고 부수다니, 비도덕적이다. 물론 그도 액자가 있으면 그림을 홈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벽에서 작품을떼어낸 다음 뒤집어서 뒷면에 달린 클립이나 못을 조심스럽게 빼내 액자를 분리한 뒤 그림만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까지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 없을 때는 차라리 포기하고 훔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그림에 상처라도 날까, 또는휘거나 주름이 생기거나 더러워지지는 않을까, 막 태어난갓난아기를 대하는 양 애지중지한다. - P34

브라이트비저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술품을 훔쳤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지금까지 미학을 논한 예술품 도둑은 없었다. 여러 언론사와 장시간 인터뷰를 할 때도 그는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죄를 감추려는 마음 따위 없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당시의 감정을 현재 시제를 사용해 즉각적으로, 그리고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자세히 묘사한다. 정확성을 위해 필요 이상의 말을 할 때도 있다. <아담과 이브>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할 때는 야구 모자와 가짜 안경을 쓰는 등변장을 하고 현장으로 돌아가 나사를 뺀 방식과 작품을 감상하는 척할 때 취했던 자세 등을 재연하기도 했다. 다른 절도 사건도 비슷하게 재연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경찰 보고서가 수백 건이다.
브라이트비저는 마음이 동하는 작품만 훔치고 그 박물관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은 남겨둔다. 도둑질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가진 뒤틀린 관점에서 보기에 박물관은 예술의 감옥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적이고 시끄러우며 관람 시간도 정해져 있고 자리도 불편하다.
조용히 생각하거나 쉴 만한 장소도 없다. 셀카봉으로 무장한 관광객 무리는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처럼 이 방 저방을우르르 몰려다닌다. - P35

앤 캐서린의 대답으로 그 순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되었다. 둘 다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앤 캐서린을 만났을때 브라이트비저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등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앤캐서린은 법을 위반하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그렇다고 해서 브라이트비저의 행동에 거부감을 갖지는 않았다.
"앤 캐서린은 그런 면을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꼈을 거예요." 브라운이 천천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수발총과 함께 새로운 모험의 기회가 눈앞에 있다. 앤 캐서린은 이날의 대답으로 반항아 애인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더 가까워졌으며 아마도 전보다 더욱 사랑받았을 것이다.
지인들은 그녀가 청춘의 환상 같은 것에 빠진 상태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마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렇게 해. 가져가자." - P56

브라이트비저는 앤 캐서린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낚아채 마침 거실로 들어오는 어머니를 비추며 렌즈를 가까이 당긴다. 턱을 치켜들고 척추를 곧게 편 채 우아하고 침착한 모습이다.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요?" 새해 목표가 수백만 달러어치의 예술품을 훔치는 거라고 한 말을 어머니가 들었는지 대놓고 묻는다. 브라이트비저는 이미 대답을 안다.
스텐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들을 바라보다 몸을돌려 밝은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 천을 씌운 소파를 지나 오디오 쪽으로 간다. 허리를 굽혀 볼륨을 높인다. "못 들은척하는 거예요?" 브라이트비저가 도발하듯 소리친다.
어머니의 얼굴이 굳는다. 카메라에서 더 물러서며 아들쪽을 힐끗 본다. 미소를 짓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더니 잠시 목소리 톤을 높여 웃는다. 언짢지만 억지로크게 웃는 느낌이다.
여기서 촬영이 멈춘다. 브라이트비저는 어머니가 일부러 모르는 척함으로써 공범이 되는 상황을 모면했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알면서도 모릅니다. 모래에 머리를 박고있는 거죠." 파리의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스텐겔의 지인에 따르면 그녀는 지식 수준이 높고 교양도 있다. "아들이 하는 멍청한 짓을 전부 용서해주죠. 사랑하니까,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도 눈감아주고 보호해주려 해요."
브라이트비저는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들과 법,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는 점을 잘 안다. 스텐겔이 하나뿐인 아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집에서 브라이트비저를 내보낼 생각도 없고 그보다 더한 것도 넘어가준다. "어머니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신고라도 하게요?" - P110

첫째, 훔친 작품을 불법적인 경로로 판매한다. 부정한방법으로 작품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오슬로 대학교는 43개국에서 거래된 불법 미술품이나 유물을조사해 정리했다. 통상적으로 도난 작품의 가격은 소매가의 3~10퍼센트 정도이고, 유명한 작품일수록 가격이 내려간다. 3퍼센트라고 했을 때, 100만 달러(약 13억 원) 가치의 작품을 팔면 3만 달러(약 4,000만 원)가 남는다. 훔칠 때감수하는 위험 부담을 생각하면 썩 좋은 가격이 아니다. 어떤 작품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건너 여러 국가를 전전하고 전당포와 골동품 가게, 화랑 등을 거치면서 매매 증서와 진품 감정서를 갖기도 한다. 몇 년 후에는 주로 소규모경매장을 통해 다시 합법적인 시장에 등장한다.
둘째, 작품을 도난당한 박물관이나 개인 소유주 또는 보헐 회사에 돈을 요구한다. ‘예술품 납치art-napping‘라고 한다. 유명한 작품일 경우 장물로 팔기 어려워 이 방법이 가장 최선이지만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며 오작교 역할을 할브로커가 필요하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위험한일이다. 추가 범죄를 조장할 수 있기에 박물관 측에서 도난품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보통 ‘정보제공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목으로 은밀하게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런 식의 거래는 최소 1688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에드워드 로이드 Edward Lloyd는 <런던 가제트 The LondonGazette)에 훔쳐간 회중시계 다섯 개를 돌려주면 1기니를 보상하겠다는 광고를 실었다. 로이드는 나중에 세계적인 예술품 보험 회사인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를 설립한다.
셋째, 훔친 작품을 지하시장에서 화폐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서류함만 한 작은 그림(도둑들이 제일 많이 훔치는 크기다)이라도 상당한 금액과 맞먹는다. 현금이 가득 든 여행가방보다 그림 한 점을 들고 다니는 편이 공항에서나 국경을 넘을 때 유용하다. 러시아 정보국 발표에 따르면 미술품을 담보로 받는 범죄 조직이 러시아에만 40개 이상 있다.
1999년 사우디 왕자의 요트에서 사라진 피카소 작품은 추적 결과 지하시장에서 열 번이나 무기와 마약 거래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 세 가지 전략(장물로 팔기, 협박해서 돈 뜯어내기, 현금처럼 쓰기)을 위해서는 미술품이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하고, 바로 이때 경찰이 개입할 틈이 생긴다. 예술품 범죄에서는 다른 사건과 달리 범인 체포보다 작품 회수가 더 중요하다. "렘브란트와 쓰레기 도둑 중 누가 더 중요한지 생각해보면 됩니다." 다르티스의 설명이다. - P142

예술은 찰스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론에따르면 자연계의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효율성과 낭비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예술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 없는 부분에 시간과 노력, 자원을 소비한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어느 문화에나 예술이 존재하며, 그형태는 실로 다양하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이 이토록 널리 퍼진 것이 인류가 자연선택을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믿지만, 사실 예술은 짝을 유혹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다윈주의에 부합한다. 예술은 생존의 압박과는 거의 무관하며 여가 시간에 나오는 부산물이다. 인간이 더는 포식자를피해 도망 다니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도구라고 알려진 대뇌를 이용해 상상력을 펼치고 탐구하며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꿀 수있게 되었고 신의 생각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고, 진화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 P149

브라이트비저가 훔치는 담뱃갑과 포도주잔, 그리고 여타 가정용 물건은 실용적인 형태에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들로 대부분 1800년대 초기 유럽 산업혁명 직전에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모든 물건을 수작업으로 만들었고 거기에는 정교한 솜씨와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브라이트비저는 산업혁명 이후 엔진과 전기의 발명, 그리고 대량 생산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수월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점차 보기 흉해졌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장인이 제자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서서히 독창적 스타일을 구축해갔다. 요즘은 공장에서 값싸고 하나같이 똑같은 일회용 제품을 찍어낸다. 브라이트비저는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기 직전의 시기에 인류 문명이 이미 아름다움과 기술 면에서 최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물건과 작품을 훔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지만, 한적한 마을의 작은 다락에서만은 멈추기를 희망한다. - P152

다락에 이미 200여 점의 작품이 있는데도 도둑질이 더필요하다니, 이게 무슨 의미일까? 독일 심리 분석학자 베르너 뮌스터버거 Werner Muensterberger가 저술한 《수집: 통제할수 없는 열정 Collecting: An Unruly Passion》은 ‘충동적 수집 강박‘에있어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이다. 2011년에 사망한 뮌스터버거는 의학과 인류학, 예술사학 세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받았는데, 그에 따르면 건강하지 않은 수집 강박(침실 책장에 널브러져 있는 스노우 볼 몇 개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은한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며 보통은 사회에 설 자리가 없다고 느껴 우울증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서 주로 찾아볼 수있다.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이들은 의미 있는 수집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자기만의 세계로 마법처럼 탈출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수렵과 채집‘ 활동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기도 해 수집만이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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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끔찍하게도 방청석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위층의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더니 입술을 실룩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우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그 야유가 빌리를 향한 건지, 콧방귀를 낀 사람을 향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빌리는 그 소리에 더욱 격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건 진실하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눈물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부어오르면서 비통한 감정이 만면에 떠올랐다. 관리원이 물을 한 잔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주워다 주는 것처럼 중립적이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트레실리안 씨는 냉담하고 무감동한 표정으로 기다리기만 했다. 빌리의 오열에 눈에 띄게 동요한 사람은 단한 명, 피고석에 선 소년이었다. 스펜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서기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얼핏보기로는 작고 하얗고 네모진 물건이길래 무슨 쪽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스펜서는 증인석에 선 소녀가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전해주려는 것이었다. 서기가 손수건을 건네받고 애매하게 머뭇거리자, 재판장이 그걸 보고는손짓해서 제지했다. - P699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일? 그게 무슨 뜻이니? 아아, 우리는 너무 울적해졌어! 이리나오거라 그렇게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아니 잠시만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요. 제가 어머니에게늘 잘해드리지는 못했다는 건 알아요. 아버지에게도 그랬고요. 저는언제나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데도 가끔은....."
어머니의 맞잡은 두 손에서 종잇장 같은 소리가 났다. "속상한 생각하지 말려무나 프랜시스. 로렌스 박사님 말씀을 생각해야지."
"그냥 묻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대도, 저를 경멸하시지는 않을 거지요 어머니?"
"경멸하다니! 맙소사! 내가 왜 그러겠니?"
"가끔은 삶이 뒤죽박죽 꼬여버려요. 어머니, 너무 심하게 꼬여서, 마치 모래 늪에 빠진 것 같을 때도 있어요. 한 발짝 디뎠더니, 빠져나올 수 없어서, 그래서...."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심란한,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너는 늘 만사에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프랜시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평범한 것뿐인데 말이다. 남편, 가정, 자식. 그렇게 평범한, 평범한 것들. 저택 문제는 걱정하지 말거라. 이 저택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 됐어. 사실 객식구들을 들일 만한 집도 아니잖니. 바버 부인은 여기 왔을 때부터 불행한 사람이었고, 너의... 너의 친절을 이용했던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너를 경멸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내가 내 손을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걸. 자, 이제 그만 내려가지 않으련?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자꾸나." - P717

터벅터벅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안전하다. 이제 모두가 안전하다. 자신도, 릴리안도, 그리고 그 소년도 이미 무죄로 밝혀진 사람이 똑같은 살인죄로 다시 체포될 리는 없다. 만약 경찰이 그를 정녕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법적 공방이 더 길어질수도 있겠지만••• 안 그럴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고석에서서 인중에 맺힌 땀을 닦고 있던 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너는 안전하다, 너는 안전하다•••.‘ 아니, 하지만 이건 안전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그녀가 언제나 경멸해왔던, 전쟁 이후에 찾아온 안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걸 얻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다쳤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나! 생각하자니 욕지기가 올라왔다. 레너드, 레너드의 부모님, 스펜서, 그의 어머니, 빌리, 찰리••• 피해자명단이 한도 끝도 없어 보였다. 그 사람들이 그녀의 옆에서 같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유산된 아기도 있었다.... - P733

알 수 없었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프랜시스의 마음은 그렇게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녀와 맞닿은 릴리안의 손, 어깨, 엉덩이 이상으로는 조만간 둘 다 일어나야 할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이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릴리안의 가족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게 있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은 바랄 수 없었다. 둘만의 돌 모퉁이에 앉아 있는 그들의 검은 옷이 황혼으로 번져 들고, 도시에는 불빛들이 켜지고, 하늘에는 희미한 별 몇 개가 돋아났기에. - P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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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리들리 박사의 알약과 핏물, 레너드, 그리고 계단과 정원을 거친 무시무시한 여정까지도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었다. 말해도 되나? 확 말해버릴까? 그날 밤의 기억을 하도 들고파며 곱씹은 나머지 객관적인 시야가 무너져버렸다. 자신과 릴리안이 한 일이 그렇게까지 나쁜 짓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범죄라고 할 것도 아니었지 않나. 둘이서 지레 공포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절절매니까 범죄처럼 느껴지는 것뿐, 실제로는 어리석은 실수로 빚어진 재난에 불과하다. 크리시에게 다 털어놓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럼 크리시는 아연실색해서 쳐다볼 테고 •••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구겨진 드레스와 진흙 색깔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방안 풍경이, 엉터리 보헤미안풍 인테리어가 보였다. 이제껏 여기서 한 거짓말이라고는 죄다 무해한 것밖에 없었다. 타락하지 않은, 안전한 거짓말밖엔•••.  프랜시스는 크리시에게 아무것도밝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아무것도 밝히지않으면 그녀와의 사이에 금이 가리라는 것도, 이미 금이 생겨버렸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날 밤 내가 정원에서 봤던 게 바로 이거구나.‘ 암담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프랜시스는 평범한 세상 밖으로 벗어나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릴리안이 그녀를 끌고 나갔다고 해겠지만, 그렇다고 릴리안을 탓하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러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아아, 릴리안은 왜 하필 재떨이를 집어 들었나? 이건 너무나 가혹했다! 겨우 그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참이었는데, 프랜시스는 이미 삶을 한 번 빼앗겼다. 바로 여기서 크리스티나와 함께할수도 있었던 삶을 빼앗겨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 삶마저 또 빼앗겨야한단 말인가? - P598

‘친밀한 관계‘... ‘유부남 바버 씨....
마치 공중에 흩뿌려진 무수한 동전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다가 멈춘 것처럼, 그 말들이 겨우 머릿속에 들어와 제대로 파악이 되었다.
그동안 레너드도 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여자를 빌리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레너드를 죽인 용의자로 검거된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배신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너드가 그동안 뒤에서 이딴 짓을 하고 다니면서 앞에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 자신이 그에게 감쪽같이 속았다는 데에 격분이 치밀었다. 그런데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검거당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생각이 미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 안돼, 안돼, 안돼. 이건 말도 안 돼."
"무슨..."
"이건 너무 끔찍해, 크리시!"
"뭐? 아니, 왜... 경찰이 살인범을 잡았으면,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야?"
"아니야! 이해가 안 돼?"
크리스티나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이 아수라장을 그녀가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것이다! 프랜시스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해버릴까? 다시금 갈등이 일었다. ‘말해도 될까? 진짜로?‘ - P603

경악이 분노로 바뀌었다. 너무나 순전하고 철저한 분노여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 감정이 지금껏 내내 프랜시스의 안에서 밖으로나올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난 열흘간 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벽들을 미친 듯이 떠받치며 지냈던 나날이 기억났다. 크리스티나와의 우정에 금이 갔던 순간도 어머니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의혹도.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휴가 갔을 때 네가 임신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임신이라는 걸 아는 상태에서 그 티켓을 본 거야. 맞지?"
"이러지 마, 프랜시스.."
"맞잖아?"
"제발...."
"애를 지우고 싶었던 것도 당연하네."
릴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아니야, 그건 오로지 너랑 나를위해서 한 일이었어."
"재떨이를 그렇게 세게 휘두른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하지만... 나는 그걸 휘두를 생각이 아예 없었는걸. 너도 알잖아. 그건 실수였어."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빤히 마주 보았다. "정말?"
미리 생각해둔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그 의문 역시 진작부터 마음속을 맴돌면서 밖으로 나오려 기를 쓰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켐프 경위에게 생명보험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던 순간부터? 자신이 레너드의 등에 귀를 대보고 심장박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던 그때부터? - P614

"그 말 좀 그만해!" 프랜시스가 쏘아붙였다. "너는 항상 그 말뿐이었어! 맨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우리가 처음 공원에 갔을 때...
기억나? 서로 잘 알지도 못했던 그때, 같이 공원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언덕을 올라가는데… 네가 나를 차도 쪽으로 몰고 인도 안쪽으로 비켜서더라. 너만 인도 안쪽에서 걸었다고, 릴리안. 그때는 너의 그런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그때부터 지금껏 항상 안쪽에서만 걸었어. 영원히 그럴 순 없는 거야. 넌 거기서 나와야 돼. 지금 당장."
프랜시스의 어조가 아래층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부엌에 있는 여자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듯 잠잠해진 게 느껴졌다. 릴리안도 식구들을 의식했는지, 그 자리에 웅크려 앉은 채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올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릴리안의 표정이 변하면서 얼굴이 반듯하게 퍼졌다. 릴리안은 잠자코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퉁명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소매 안에서 젖은 손수건을 빼내 깨끗한 손수건으로 바꿨다. 서랍 안의 깡통에서 잔돈을 얼마나 꺼낼지 망설이다가 지폐 뭉치에 동전을 감싸서 모조리 핸드백에 넣었다. 화장대 거울 앞에서서 얼굴과 부어오른 눈꺼풀에 파우더를 칠하고, 뺨과 입술에 루주를 찍어 바르고, 빗으로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프랜시스는 그걸 쭉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릴리안이 미적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주의 깊은 태도로 방 한쪽의 벽감에 쳐진 커튼을 젖히더니, 가로대에 걸린 옷들 중에서 자기 코트를 빼내고는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코트를 걸쳐 입고서 칼라를 매만져 편 다음, 앞자락에 길게 줄지어 달려 있는 많은 단추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잠그기 시작했다. - P616

프랜시스는 허공을 빤히 노려보며, 찰리의 진술에서 드러난 추저분한 진실들과 지난 몇 달간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짜 맞추고 있었다. 지난 여름 레너드가 야근을 한다고 귀가가 늦어졌던 나날들이 기억났다. 그가 특유의 과장스러운 투로 하품을 하면서 집에 들어왔던 날이며, 밤늦게 휘파람을 불며 들어와서는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마다 레너드는 사실 그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었다. 현관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에 프랜시스와 릴리안이 서로에게서 후닥닥 떨어졌던 그때마다, 레너드는 그 여자와 막 키스하고 왔던 것이다. 프랜시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입가에 손을 얹었다. 얽히고설킨 지저분한 거짓말과 불륜의 연결 고리가 이제야 처음으로 명확하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연결 고리의 한쪽끝에 엮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레너드가, 그리고 다른 쪽 맨 끝에는, 정확히 누가 있나? 바로 저 소년이 있었다! 피의자석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히죽거리며,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불결하고고약한 이빨을 떡하니 드러낸 저 소년! 프랜시스는 릴리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찰나의 한순간, 증오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만큼 격한 분노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어?‘ 릴리안에게 그렇게 악을 쓰고 싶었다. ‘어떻게 나를 이딴 일에 끌어들일수가 있어? 이런 곳에, 이 끔찍한 방에, 추잡한 사람들과 그들이 흘리고 다닌 역겨운 찌꺼기들 사이에 나를 끌고 들어오다니!‘ - P633

한 주가 흘러가는 동안 프랜시스는 착잡한 심경을 떨치지 못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앞으로 자신이 누릴 자유의 나날이 실감되어 안도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고, 언덕 아래의 신문 가판대에 들르지않을 수 없었다. 단 하루라도 스펜서 워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면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단 하루라도 그를 염려하고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펜서가무슨 기계에 끼어버렸는데 프랜시스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톱니바퀴 사이로 갈려 들어가지 않도록 옷깃을 붙잡고서 혼자 아득바득 끌어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스펜서는 나날이 프랜시스의 손아귀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했다. - P647

둘은 만나기만 하면 이런 식이었다. 바이니 씨의 거실에서나, 베라의 침실에서나, 월워스 거리로 나가는 출입문 앞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툭 하면 속닥거리며 말다툼을 벌였다.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않고 마주 앉아만 있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죽음 같은 침묵을 깨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둘이 계획했던 미래는 다 어디로 갔나?
미술학교에 다니고, 빵과 버터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는... 프랜시스는 함께 꿈꿨던 둘만의 방을 떠올려보았다. 한때는 자신이 그 방의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려서 온 세상을 차단해버리는 순간이 눈앞에 보이기까지 했는데. 하긴 지금도 그들은 둘만의 방에 있기는 했다. 치명적인 비밀이라는 방 안에 이미 감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쩔 땐화가 치밀었다. 어쩔 땐 설움이 북받쳤다. 어쩔 땐 헤어지기 전에 서로 끌어안기도 했고, 그러면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 한번은 릴리안이 갈망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나를 사랑해?"라고 물었는데, 마치 베라나 민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은 것처럼 신경에거슬렸다. 프랜시스는 릴리안을 끌어당겨 키스해주었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 P658

그날 밤 프랜시스는 바이올렛의 인형 유모차 같은 수레에다 레너드의 시체를 싣고서 북적거리는 거리로 나아가는 꿈을 꿨다. 시체를 덮은 것이라고는 작은 인형 이불 한 장뿐이었다. 레너드의 머리를 가리려고 이불을 끌어 올리면 밑으로 퍼드러진 두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그걸 가리려고 이불을 도로 홱 끌어 내리면 부풀어 오른 보랏빛 얼굴이 노출되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을 땐 어두컴컴한 새벽이었다. 그런데 깨고 나서 그녀에게 남은 감정은 레너드의 시체를 유모차로 실어 나르는 공포가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혼자서, 범죄의 책임을 모조리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안은 어디 있나? 릴리안은 떠나버렸다! 프랜시스는 버림받은 아이가 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릴리안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릴리안은 반쪽짜리 진실, 회피, 발뺌, 거짓말밖에 주지 않았다. - P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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