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contemptus)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과 만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때, 우리는 자꾸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씨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소중한 정신적 태도가 떠오를수록, 우리는 지금 내눈 앞에 있는 사람 자체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게 된다. 이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식으로든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상대방은 우리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않게 직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경멸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 P162
이사벨은 오스먼드를 측은하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다. 비록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를 기만하지는 않았어도 실제로는 완전히 기만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먼드가 처음 이사벨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눈에 띄는 처신을 삼갔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하게 행동했다. (••••••)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에게 본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을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滿月),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늘 그렇듯 그가 자기 뜻대로 행동하도록 그저 보고만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은 부분을 전체로 잘못 생각했던 것이다. - P167
미성숙한 사람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인할 수 있다는 거야?‘ ‘사랑은 애인을 행복하게해 주는 감정 아닌가?‘ 그렇지만 사랑 때문에 더 아프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애인에 대한 잔인함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잔인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그것을 잔인하게 잘라내는 장면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헤어지게 되는 커플이 서로에게 잔인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헤어지는 모든 커플들이 키티나 월터처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식어서 헤어지는 경우라면, 아예 잔인해질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아직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잔혹함(crudelitas)이나 잔인함(soevitia)이란 우리가 사랑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자에게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 P172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할 때, 스피노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욕망에서부터 출발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개개인의 삶보다는 사회질서를 우선시하는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결국 이성의 윤리학은 사회의 윤리학이지 ‘살아있는 나‘의 윤리학일 수는 없다. 욕망을 긍정하면서 스피노자가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윤리학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욕망을 억압당한 채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 P181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유한자다. 우리가 유한자라는 것은, 신조차 누릴 수 없는 축복일 수도 있고 비극일 수도 있다. 우리가 관계를 맺어 나가는 타자들이 내 삶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 미리 결정할 수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는 저주스러운 관계가 맺어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행복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모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도 있다.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반대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꾀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 P182
동경(desiderium)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은 충동이다. (••••••)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이것이 바로 동경의 본질이다.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충동!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이미 존재하지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의 욕망이나 충동은 단순한 욕망이나 충동이 아니라 동경이 된다. 그러니까 동경의 정의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어떤것에 대한 욕망이나 충동"이 바로 동경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속내였다. - P195
절망(desperatio)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무시무시한 결과가 예측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운 결과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더 이상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 두려운 결과에 직면하게 될 때, 절망은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우리의 목을 조인다. 이것이 바로 한나가 느꼈던 절망의 실체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극도로 두려웠다. 그래서일까? 한나는 문맹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신이 결코 문맹이 아니었다는 것을 포장하기 위해 미하엘에게 짧은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하엘은 그녀에게 답신을 하지않고 녹음테이프만 계속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을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하엘은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문맹이라는 것이 폭로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큰 절망이 한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제 미하엘은 자신의 비밀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모두 공개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미하엘을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한나가 자살한 뒤 찾아간 교도소에서 담당자는 미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나는 당신이 편지를 써 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우편물을 받았어요. 우편물을 나누어 줄 때면, 그녀는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그렇다. 미하엘로부터 단 한 통이라도 편지를 받았더라면 한나가 자신을 자살로 몰고 간 절망에 휩싸이지는 않았을것이다. 한나에게 그의 편지는 자신이 문맹이었던 어두운 수치심을 영원히 덮어 주었을 선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 P212
그러니까 한나가 애써 문맹을 탈출하여 편지를 써 보냈을때, 미하엘이 그것을 무시했던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미하옐로서는 한나는 문맹이고 자신은 ‘책 읽어주는 남자‘로 계속 남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으려는 그의 무의식적인 노력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읽어주기, 함께 샤워하기.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 나누기, 마지막으로 함께 침대에서 편안하게 누워 있기. 청소년 시절 그 흥분과 설렘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과거에 그녀가 자신을 씻겨 주고, 자신을 품에 안아 주었던 것,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책을 읽어 줄 수있어서였다. 그래서 무슨 종교 의식인 것처럼 외로움에 빠져 있던 미하엘은 녹음기로 책을 읽어 녹음했던 것이다. 그는 문맹에서 벗어난 한나를 부정했던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지키기 위해서, 잔혹하게도 그는 현재의 한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한나를 절망으로 몰고 가 죽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미하엘 본인이었던 셈이다. 그가 끝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 P216
이렇게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고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도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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