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머스는 감방 동료들을 경멸했고, 그들은 그를 싫어했다.
그들이 그를 미워한 이유는, 그들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신비에 싸인 인물이 되기를 갈망했지만 거기에 성공한 사람은 리머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개성의 두드러진 부분이 집단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지켜 왔다. 감상적인 순간에도 그의 여자나 가족이나 자식들 이야기를 그에게서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리머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기다렸지만 리머스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신참 죄수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수치심이나 공포심이나 충격 때문에 옥살이에 대한 기초 지식을 설레는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감옥 공동체의 귀여움을 받기 위해 옥살이에 서투른 신참의 지위를 이용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데 리머스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모두를 경멸하는 듯했다. 바깥세상과 마찬가지로 리머스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모두 리머스를 싫어했다. - P63

 전술적으로는 일을 빨리 해치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완전히 몰락했고 빈털터리야. 감옥에서 쌓은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고, 사회에 대한 원망은 아주 강해. 나는 새삼 길들일 필요가 없는 늙은 말이야. 나는 영국 신사로서의 명예를 그들에게 손상당한 체할 필요도 없어••••••. 그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의> 거부를 예상할 것이다. 그들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것이다. 신의 눈이 황야를 건너는 카인을 뒤쫓았듯, 영국 정보부는 배신자를 끝까지 추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박이라는 것.
결정에 일관성이 없으면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공작도망칠 수 있다는 것. 사기꾼과 거짓말쟁이와 범죄자들도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고, 훌륭한 신사들이 관청구내식당에서 파는 삶은 양배추에 넘어가 무서운 반역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 P91

그날 아침은 추웠다. 옅은 잿빛 안개가 축축하게 살갗을찔러 따끔거렸다. 공항을 보자 리머스의 머리에 전쟁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 반쯤 가려진 채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기계들,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그 메아리, 갑작스러운 외침 소리, 여자의 하이힐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는 불협화음,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엔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도처에 음모라도 꾸미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것은 밤이 사라지고 아침이오는 것을 본 공통된 경험에서 유래하는 우월감 같은 것이었다. 공항 직원들의 표정에는 동틀 녘의 신비감이 배어 있고, 추위가 그 표정에 생기를 주고 있었다. 그들은 승객과 수화물을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처럼 무뚝뚝한 태도로 다루고있었다. 그날 아침 그들에게 보통 사람은 아무 의미도 없는존재였다. - P95

리머스는 피터스가 탁자 위에 놓인 담배 상자에서 담배 한개비를 집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두 가지를 알아차렸다. 하나는 피터스가 왼손잡이라는 것.
또 하나는 피터스가 또다시 담배를 거꾸로 물고 제조회사 이름이 새겨진 쪽에 먼저 불을 붙였다는 것. 리머스는 그 몸짓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피터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쫓긴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피터스는 무표정하고 잿빛을 띤 이상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안색은 오래전에 얼굴에서 사라져 버린 게 분명했다. 어쩌면 혁명 초기에 감옥에서 혈색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얼굴 생김새는 고정되었고, 피터스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보일 것이다. 뻣뻣한 회색 머리털만은 백발로 변할지 모르지만 얼굴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리머스는 막연한 궁금증이 일었다. 피터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결혼은 했을까? 피터스에게는 정통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리머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권력의 정통성, 확신의 정통성이었다. 피터스가 거짓말을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것이다. 피터스의 거짓말은 애시의 서투른 거짓말과는 거리가 먼 계산된 거짓말, 필요한 거짓말일 것이다.
애시, 키버, 피터스, 갈수록 질적 수준도 높아지고 권한도커졌다. 리머스에게 그것은 첩보 기관의 위계질서가 갖는 자명한 공리 같은 것이었다. 이데올로기도 위로 올라갈수록 진보하는 게 아닐까. 애시는 돈만 바라고 일하는 용병, 키버는 동조자였지만, 피터스에게는 목적과 수단이 하나를 이루고있었다. - P108

한 소녀가 해변에 서서 갈매기들에게 빵 조각을 던져 주고있었다. 그녀는 리머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치렁하고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하고 코트 자락을 펄럭이게 했다. 그러자 소녀의 몸은 바다를 향해 활 모양으로 젖혀졌다. 그 순간 리머스는 리즈가 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을 되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평범한 생활이 가치 있다는 믿음, 빵 부스러기를 종이 봉지에 넣고 해변으로 걸어가 갈매기들에게 던져주는 소박함. 하찮은 것에대한 이 관심은 리머스가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