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에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성실함의징표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아니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번도 썼지만, 어떨 때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쓰지않은 적도 있었다. 거기 적은 내용도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기록한 것은 아니고(그에게는 어떤 하루도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다면 그는 하루치의 일기 말고는 더쓰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내면의 수상한 움직임들을 정교하게(그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과장에도 빠지고) 포착한것들이었다. 그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그날 이 사람이 무얼 했다는것인지 잘 알 수 없는, 도무지 일기 같지 않은 일기를 썼다. 그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문학 수업을시작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 P101

독서도 취미냐는 별 신통치도 않는 반문이 한때 퍽 재치 있는 화술인 것처럼 통용된 적이 있지만, 그에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버릇이라는 사실이 여러 군데서 진술되었다. 예컨대 그의 독서는, 아파트 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는 할머니가 딱히할 일이 없어서 한 통의 차를 다 마셔 버렸다는 경우와 유사하다. 목표도 체계도 반추도 없는 맹목의 게걸스러움. 그것은 그가 세상에대해 문을 닫은 결과였고, 또 그 동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그가 눌러앉은 방만큼 작아졌고, 그보다 더 큰 문밖의 세상은 거짓이 되었다. - P106

모든 예감에 비극의 냄새가 묻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숙명의 울림 때문이다.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만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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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이르러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덤 앞이었다. 그는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가방 속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무덤 앞에 두고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었다.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곧장 성냥을 켜서 책과 노트에 불을붙였다. 불길은, 처음에는 수줍은 듯 쭈뼛거리는 눈치더니 조금 있자흰 연기들 사이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3월이었고, 해를 넘긴마른 나뭇잎들은 불을 보자 반갑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으로 무언가 뜨거운것이 치받아 오르는 듯했다. 알 수 없는 충만감이 그를 휩쌌다. 뜻밖으로 코끝이 매워 왔다. 그는 그 사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뛰었다. 산속으로 마구 내달렸다. 발길에 차이는풀뿌리가 자꾸만 그를 넘어뜨렸다. 몇 번이고 쓰러지면서, 그는 무작정 내달렸다.
고갯마루에 당도했을 때, 그의 숨은 턱에 차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그가 달려온 산 아래쪽에서는 뻘건 불길이 영역을 크게 확대하면서 내달려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을로부터 술렁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이야, 불, 산불이 났어요•••••.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횃불이 만들어져 이리저리 우왕좌왕 오가는 듯하더니 산을 향해 급히 올라오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보였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리라. 젊은이도 있고, 늙은이도있었으리라. 어쩌면 마을 전체가 잠에서 깨어나 산으로 달려올지 몰랐다. 그의 입가에 스멀스멀 웃음이 고였다. 마을을 굽어보면서 그는 몸의 민감한 부분을 간지럽히는 듯한,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소리 질렀다. 타올라라, 더 타올라라•••••. 가속도가 붙은 불길은 더 빠르고 더 세차게 달음질쳐 올리왔다. - P79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그에게는 곧 고향이었고(기억하거니와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山川)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둘에 대한 절연의 의식을 그처럼 파격적으로 치름으로써 고향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신화의 표정>) - P82

그렇다면 무극사에 대한 그의 오래고 끈질긴 동경은 무엇이었단말인가. 더구나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름으로써 아버지와 아버지가 상기시키는 모든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절연코자 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터에 부재하는 부재가 확실하게 증명된 아버지에 대한가짜의 신화를 추적하는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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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는 이상스럽게 관대했고, 다른 식구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종일 모래밭에서 뒹구느라 옷을 다 버렸지만, 큰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새옷을 갈아입혀서 다시 모래밭으로 내몰았다. 사촌 형은 그런 그의 손에 감과 대추를 들려 주었다.
그런 순간에 그에게 쏟아지던 주변 사람들의 특별한 눈빛에 대해서 그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집안의 분위기에 만족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맨 처음 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너무쉽게 그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 한 사람의 죽음의 충격조차 어린아이의 감정을 오래 장악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지.
상여가 산으로 나가기 전날 저녁, 담장 아래에서 구슬을 만지고 있던 박부길의 모습을 한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던 친척 어른이 (부음을듣고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그에게는 고모가 된다고 했다)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더니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당연히 그는 어쩐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구 쓰다듬으면서 눈물에 젖어 훌쩍이는 음성으로 말했는데,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갑작스러운 것이어서 박부길은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길아, 죽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는 틀리게 알고 있었다. 어렴풋한 깨우침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쌍한 것,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 P70

큰아버지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와 발 밑을 때렸다. 시간도 파도를 따라 그들의 발 밑을 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큰아버지의 계산된 것 같은 침묵에 불안을 느꼈다. 그는엉덩이를 들썩이며 큰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여전히 시선을 바다로 둔 채 큰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엉뚱하기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직접 대답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너의 가슴속에 있다. 아버지는 너의 정신 속에 있다. 너는 아버지의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 속에 있는 아버지가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다. 너에 의해서, 아버지는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그는 큰아버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순간, 그는 막연하게 슬펐다. 무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면서도 아득한 낙망의 정서가 울타리를 만들어 그를 감쌌다. 그는 자신이 이큰 우주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큰아버지는 시선을 바다에서 거두지 않았다. 햇살을 반사한 바다의 푸른 광채가눈부셨다. - P71

큰아버지가 그의 손에 삽을 쥐여 주었다. 그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 그는 조금 멈칫거렸다.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그가 행동하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 그는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해 가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그는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필시 사람들은 오해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코를 훌쩍이는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또 애써 소리 죽인 이런 말도 들렸다.
「불쌍한 것•••••. 알긴 다 알고 있었던가 보지•••••.」「그러게나. 이제 저 아이를 어쩔꼬•••••.」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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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1
청탁을 해온 편집자에게 이미 밝힌 바대로, 나는 이 글의 필자로적합하지 않다. 나더러 박부길 씨를 이야기하라니•••••. 솔직히 나는 많이 망설였다.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끼어들 수밖에 없는 뜬구름 잡는 식의 변죽이나 애매모호한 수사들은 대개의 경우 진실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그런 일은 작가를 위해서나 그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 P13

그 호기심은 거의 직업적인 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부길 씨를 소설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덧붙이자면, 한 작가의 성장 배경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 그의 문학과 삶에 대해 깊은 이해를 확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썩 유익한 일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과 그에 대한 기사들과 두 번의 인터뷰 내용을 두루 섭렵해 가면서,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선 그의 유년기를 재구성해 볼 생각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충실한 연대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 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피상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 층은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P18

 그 책들을 어린 박부길은 뜻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무작정읽어 치운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무의지적인 것이었고, 책을 읽는다는 분명한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한 번도 어린아이다운 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지긋지긋한 그는 내게 그 표현을 썼다. 그 나이에 벌써 현실에 대해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상을 하곤 했노라는 것이다)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기를 꿈꿨다. 요컨대 그의 독서에 몰두는, 책속에서 낙원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현실에 눈감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들은 일찍부터 마취제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신의 글 만들기가 마취제인 셈이라고, 그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고백했다. - P22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금령은 권고가 아니라 유혹이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금령이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금령이 있기 때문에범죄를 저지른다. 사람이 에덴의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야훼가금령을 준 것이 아니다. 야훼가 금령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따먹었다. 금령이 없으면 범함도 없다.
큰아버지가 뒤채의 ‘차꼬를 찬 남자‘ 대신 ‘감나무‘를 금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런 성찰 때문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금령은 포괄적인 것이었다. 감을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감나무가 서 있는 곳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제 분명해진셈인데, 금지된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감나무가 서 있는 땅이었다. 감나무는 단지 하나의 표지에 불과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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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와서 방해됐어?"
리스베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욕조 안에 있었어요."
"응 그래 보였어. 잠시 같이 있어줄까?"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욕조 안에 같이 들어가겠다는 게 아냐. 베이글을 좀 가져왔다고."
그가 봉지 하나를 보이며 말했다. "에스프레소용 원두도 좀 사왔어. 주방에 쥐라 엥프레사 X7을 갖췄으면 적어도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녀는 눈썹을 움찔 들어올렸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실망인지, 혹은 안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죠?"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야." 그가 확실히 말했다. "난 좋은 친구를 방문한 다른 좋은 친구일 뿐이야. 환영해야 할 손님이라고."
리스베트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 이 년간 그녀는 미카엘을 최대한 멀리해왔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나 실제 삶에서나 마치 신발 밑에붙은 껌처럼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인터넷상에선 문제될 게 없었다. 거기서 그는 전기와 텍스트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밖에 펼쳐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인 빌어먹을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비밀을 다 알고 있듯이.
리스베트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적어도 그런 감정들은.
올해 내내 그는 진정으로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는 그를 신뢰했다. 어쩌면 자신이 애써 피하려는 사람이 한편으론 자신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를 봐도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리스베트는 문을 열어 다시 한번 자신의 삶 안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밀레니엄 3권 끝. - P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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