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이르러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덤 앞이었다. 그는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가방 속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무덤 앞에 두고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었다.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곧장 성냥을 켜서 책과 노트에 불을붙였다. 불길은, 처음에는 수줍은 듯 쭈뼛거리는 눈치더니 조금 있자흰 연기들 사이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3월이었고, 해를 넘긴마른 나뭇잎들은 불을 보자 반갑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으로 무언가 뜨거운것이 치받아 오르는 듯했다. 알 수 없는 충만감이 그를 휩쌌다. 뜻밖으로 코끝이 매워 왔다. 그는 그 사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뛰었다. 산속으로 마구 내달렸다. 발길에 차이는풀뿌리가 자꾸만 그를 넘어뜨렸다. 몇 번이고 쓰러지면서, 그는 무작정 내달렸다.
고갯마루에 당도했을 때, 그의 숨은 턱에 차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그가 달려온 산 아래쪽에서는 뻘건 불길이 영역을 크게 확대하면서 내달려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을로부터 술렁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이야, 불, 산불이 났어요•••••.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횃불이 만들어져 이리저리 우왕좌왕 오가는 듯하더니 산을 향해 급히 올라오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보였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리라. 젊은이도 있고, 늙은이도있었으리라. 어쩌면 마을 전체가 잠에서 깨어나 산으로 달려올지 몰랐다. 그의 입가에 스멀스멀 웃음이 고였다. 마을을 굽어보면서 그는 몸의 민감한 부분을 간지럽히는 듯한,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소리 질렀다. 타올라라, 더 타올라라•••••. 가속도가 붙은 불길은 더 빠르고 더 세차게 달음질쳐 올리왔다. - P79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그에게는 곧 고향이었고(기억하거니와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山川)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둘에 대한 절연의 의식을 그처럼 파격적으로 치름으로써 고향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신화의 표정>) - P82

그렇다면 무극사에 대한 그의 오래고 끈질긴 동경은 무엇이었단말인가. 더구나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름으로써 아버지와 아버지가 상기시키는 모든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절연코자 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터에 부재하는 부재가 확실하게 증명된 아버지에 대한가짜의 신화를 추적하는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