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미국에서의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밑바닥 출신이고, 그렇게 태어나면그 사실은 절대 당신을 진정으로 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내가 정말로 그것을, 내 출신을, 가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는뜻이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 같다.
하지만 내가 처음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녀는 나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하면서 조용히 내 팔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쪽이 루시. 루시는 출신이할 게 없어." - P54

이걸 한번 이해하려고 해보라.
대형 코르크판이 있고 그 판에 지금껏 살아온 모든 사람의 핀이 꽂혀 있다면, 거기 내 핀은 없을 거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이건 워싱턴 D.C. 공항에 붙들려 있던 그날 밤 나를 뉴욕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같이 타게 해준 그 부부 이야기다. 그때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 신문에서 내 사진을 본 그들이 코네티컷에서 열린 낭독회에 왔다. 여자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정말로 나를 아주 상냥히, 공항에서 함께 있을때보다 훨씬 상냥히 대했는데 그건 내 생각에는 그녀가 이제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공항에서 나는 그녀 뒤에 따라붙은 겁먹은 사람이었다. 낭독회가 있던 밤에 그녀가 얼마나 달랐는지, 나는 늘 그 사실을 기억한다. 책이 아주 잘 팔려서, 그날 낭독회가 열린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그녀는 그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가 알지 못했을 것은, 그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책을 읽고 질문에 답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이상하게도 하지만 너무도 진실하게도 내가 투명인간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 P82

당신이 알아야할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둘 다, 자라면서 바깥세상의 문화를 접하지못했다. 우리 둘 다 자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모호하게만 알다가 나중에 스스로 깨우쳤다. 우•리가 성장한 시기에 유행한 노래를 알았던 적도 없었고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 자랄 때까지는 영화를 본 적도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쓰이는 관용구를 알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게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집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그렇게 느꼈다 - 스스로가 뉴욕시티의 전화선 위에 내려앉은 새들 같다고 느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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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기적이라 할만큼 강력하고
믿을수 없을만큼 허술한

1센트짜리 동전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살면서 수천 번, 못해도수백 번은 보았을 테니 어떻게 생겼는지 금방 떠오를 것이다. 이미 기억에 새겨져 있을 테니까.
그럼 확인해보자. 동전 앞면에 새겨진 대통령 이름은? 대통령의 얼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주조 연도, ‘자유LIBERTY‘라는 글자, ‘우리가 믿는 신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문구는 각각 어디에 있는가? 동전 뒷면에는 어떤 그림이 있는가? 지금 당장 동전의 앞뒷면을 보지 않고 정확히 그릴 수 있는가?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까? 내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나?
그렇지 않다. 기억은 제 할 일을 빈틈없이 잘하고 있다. - P12

잊힌 기억이 일시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지, 다시 말해 적절한 자극으로 잠금이 해제되면 도 기억나지 않던 <보헤미안 랩소디>가 누군가 첫 소절을 흥얼거린 순간 봇물처럼 입에서 흘러나올 때처럼), 아니면 영구히 지워진 것인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뭔지 도통 기억나지 않고 옆에서 아무리 자세히 가르쳐주어도 소용없을 때처럼)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건망증(지프를 세워둔 곳을 기억 못 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기억 손실(지프를 소유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기억이 의미, 감정, 수면, 스트레스, 맥락에 얼마나 크게 영향받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뇌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을지 선택하는 데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은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망각하는 것들의 총합이고 기억과 망각 모두 어떤 면에서는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다. 오늘 경험하고 배운 것을 내일이면 잊을 것인가, 세세한 추억과 지식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간직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의 기억은 기적이라 할 만큼 강력한 동시에 허점투성이인 채로 제할일을 하고 있다. - P21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하나하나는 우리의 경험에 대응하여 뇌가 물리적으로 영구적인 변화를 겪음으로써 만들어진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을 경험하지 않은 어제의 내가 또 다른 하루를 경험한 내가 되었다. 이제 오늘 있었던 일을 내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뇌가 변했다는 뜻이다. - P27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은 레이디 가가나 해파리 또는 굴의 향과 아무 연관이 없지만, 이 찰나의 개별적인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른 뒤 하나의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으려면, 즉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갖게 된다. 이제 새로 형성된 신경회로가 점화되면 영구적으로 달라진 신경 배선과 연결 구조를 재경험, 즉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이 기억이다. - P28

기억은 기본적으로 4단계를 거쳐 형성된다. 첫 번째, 부호화encoding 단계에서는 뇌가 인식하고 집중한 대상으로부터 시각 신호, 소리, 정보, 감정, 의미를 포착하고 이 모두를 신경 신호로 변환한다. 두 번째, 강화 consolidation단계에서는 뇌가 이전까지 서로 무관하던 신경 활동들을 서로연관성을 갖는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한다. 이렇게 연결된 패턴은 세 번째 저장 storage 단계를 거치면서 신경세포들이 영구적인 구조 변화와 화학 변화를 겪으면서 지속성을 얻는다. 그런 다음 마지막 인출retrieval 단계에서 연결된 패턴을 활성화할 때마다 이전에 학습하고 경험한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회상하고, 알고, 인지할 수 있게 된다. - P28

이전에는 상관없던 신경 활동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경망으로연결되어, 하나의 기억으로 경험되는가? 완벽하게 규명된 것은아니지만, 어디에서 그런 과정이 일어나는지는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우리의 경험에 포함된 정보, 즉 감각 인식, 언어,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등을 뇌가 수집하면 뇌에 있는 해마라는 부위가 이 정보들을 연결한다.
바다에 사는 해마를 닮은 이 기관은 뇌 한가운데 깊숙이 자리 잡고는 기억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해마Hippocampus는 기억들을 하나로 묶는다. 기억을 직조하는 직공인 셈이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고, 그 의미는 무엇이며, 나는그것을 어떻게 느꼈는가? 해마는 뇌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는이 모든 개별 정보들을 한데 모아 나중에 한꺼번에 다시 불러올수 있도록 하나의 연관된 데이터 단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 단위, 즉 신경 네트워크는 적절한 자극을 받으면 기억이라는 형태로 경험될 수 있다. - P29

기억은 최초로 어떤 사건이나 정보를 경험했을 때 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세포들이 자극에 활성화된 패턴으로 저장된다.
••••••
뭔가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경험한 정보의 여러 요소들을활성화하는데, 이 요소들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도록 서로 엮여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unctional MRI으로 뇌를 관찰하면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인출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MRI 스캐너에들어간 사람에게 특정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원하는 정보를 찾아 말 그대로 ‘뇌를 뒤지는‘ 모습이 관찰된다. 처음에는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뇌 여기저기가 활성화된다. 하지만 처음 해당 정보를 학습했을 때 만들어진 활성 패턴과 일치하는 형태의 패턴이 나타나면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피험자는 "기억났어요!"라고 말한다. - P35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가령 지금 뉴욕 록펠러센터의 번쩍거리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 있다고 해보자. 우선 모양크기, 전구의 색깔 같은 시각정보가 눈의 망막에 있는 수용체인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를 통해 들어온다. 이 정보는 신호로 전환되어 뇌 뒤쪽에 있는 시각피질에 도달하고 여기서 이 이미지 신호를 처리하면 비로소 우리는 트리를 본다. 그런 다음 신호들은 인식, 의미, 비교, 감정, 의견 등을 담당하는 뇌의 다른 구역에서 다음 단계의 처리를 거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행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활성화된 신경세포들은 서로 연결되지않고, 따라서 기억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기억은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처럼 우리 앞에 전개되는 모든광경과 소리를 끊김 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의를기울인 부분만 캡처해서 저장할 수 있다.  - P40

마찬가지로 밀레니얼세대(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세대 옮긴이)에게는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모바일 채팅을 하고눈으로는 넷플릭스를 보는 일이 흔한 일상이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경험에 집중하려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뇌는 기억을 만들려고 애쓰는데 주의가 분산되어있다면 기억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힘들다. 주의가 분산된 상태로기억이 간신히 만들어졌다 해도 나중에 완전한 형태로 불러낼 수있을 만큼 충실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강력하고 정확한 기억을 심기 위해서는 주의가 하나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 P50

도대체 작업기억은 무엇을 위한 걸까? 작업기억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의 최초 관문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세한 정보 가운데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들은시한부의 작업기억 중에서도 따로 선택되어 해마로 전송된다. 해마에서 강화된 정보들은 장기기억으로 전환되고, 장기기억은 작업기억과는 다르게 보관 기간과 용량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바다. - P61

근육기억은 다르다. 근육기억은 운동 기능과 절차에 관한 기억이자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 기록된 매뉴얼이다. 근육기억은무의식적으로, 의식의 경계 너머에서 소환되는 기억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고, 날아오는공을 치고, 이를 닦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행위 등은 모두 근육기억을 이용한다. 아주 오래전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할 줄 몰랐다. 그러다가 여러 번의 반복과 개선을 통해 방법을 터득했다. 올바른 절차들을 기억에 저장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자전거를어떻게 타는지 기억하기 위해 잠시 멈추지 않고도 자전거를 탈수 있다.  - P66

정확하고 반복적이며 자동화된 동작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연달아 시행하기 위해서, 즉 골프 공을 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단계들이 순서대로 이어져야 한다. 연결된 하나의 기억단위로 소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은 해마를 통해 강화되는 반면, 근육기억은 뇌의 기저핵이라는 부위에서 연결된다.
하나하나의 물리적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면, 이것이 하나의 신경 활성 패턴으로 해석된다. 같은 기술을 계속 연습하면 소뇌라는 다른 부위에서 ‘왼쪽으로 발을 조금 옮겨라‘, ‘손목을 굽히지 마라‘ 등의 추가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이렇게 동작이 수정되고 개선되면서 실력이 향상된다.
해마는 새로운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을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근육기억의 형성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도무지 치료되지 않는 발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쪽 해마를 제거한 헨리 몰래슨은 새로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근육기억은 만들 수 있었다. 그는 5분 전에 일어난 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동작은 배울 수 있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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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회부된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일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사법부의 결론조차 당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사법부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판결이언제나 객관적이어서 뭐든지 판결해줄 수 있는 만능이 아니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명히 제한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러한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 정치가 사법화하고 사법이 정치화하는 것을최소화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부에 최우선적으로 맡길 일은 당파성이 작용하는 영역의 일이 아니라 기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아 헌법적 가치가 훼손될 염려가 있는 영역에서 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다.
삼성엑스파일 사건 판결의 다수의견이 정당행위의 해석을 종래의 해석보다 훨씬 더 좁혀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선택인데도 그 결론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故) 노회찬 의원만이 지게 되었다. 2013년 2월 14일 판결확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된 노회찬 의원은 2016년 경남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로 돌아왔으나 국회를 떠나 있던기간 동안 받았던 정치자금이 문제되어 유명을 달리했고, 정치자금법 개정 문제를 다시 우리사회의 화두로 떠올렸다. 만일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달리 나왔더라면 노회찬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사회에 그만이 지닌 새로운 시각을 더 활발하게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반짝 떠올랐던 정치자금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아 잊힌것처럼 보인다. 이 몹시도 정치적인 판결이 사회적 변화를 불러일으켜 긍정적인 결과를 낳도록 할 책임은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졌다. - P200

포스너의 말처럼 법규주의의 왕국은 무너져왔는데도 판사들은아직도 그 왕국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그림을 제시해보려는 마음으로 쉬피오를 불러들였다. 쉬피오는 "법규범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세상에 대한 어떤 사회의 생각 또한 반영한 다." 어떤 사회에서 법을 만들어내는 힘으로서의 표상체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형식적 표상들과 실재세계 사이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동성 속에서만 지구화와 함께 대두한 "생태학적 위기의 고조, 갈수록 심각해지는 불평등, 가난과 이민의 증가, 종교전쟁의 재발과 정체성 회복 운동의 자폐적현상들, 정치 또는 금융의 신용 붕괴 등등의 위기 속에서 어디로나아가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압축적 성장이라고 불리는 빠른 달음박질을 해온 끝에 전근대와 근대, 현대와 초현대가 공존하는 우리사회에서 입법과 법률해석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대목이다. - P224

판사들이 큰 그림을 가지고 결론을 선택한다는 것은 원래 사법부가 의도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판결의 결과들을 분석하여보면 어떤 성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포스너는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법관들은 사법철학이 다르더라도 보통 같은 방향으로 표결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을 하는 경우뿐 아니라 만들어진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세계의 미래와 법의 미래를 생각해보고 상상해보는 일들은 필요하다. 생각과 상상을 그치고 주어진 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계산된 알고리즘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판사들, 나아가 법률가들이 법규주의의 왕국에서 나와서 지금이 시대에 필요한, 그리고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법의 지배를 사유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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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불어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북풍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반면에 해류는 나아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인다. 따라서 북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말한다. 이것은 혼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지만, 생각해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다. 육지에 있을 때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중요하다. 폭풍이 어느 방향에서 다가오는지 혹은 풍차를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류를 타고 나아가는 배는 해류가 배를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가중요하다. 배를 난파시킬 수 있는 산호초나 여울이 있는 곳을 향해 해류가 흘러간다면 특히 그렇다. - P301

지구에서 가장 따뜻한 곳은 적도 지역인데, 일 년 내내 햇빛이직사광선에 가까운 각도로 내리쬐기 때문이다. 적도 지역의 지표면 부근 공기는 가열되어 상승하는데, 높이 올라감에 따라 냉각되면서 수증기가 응결하여 구름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다시비가 되어 떨어진다. 높은 고도에서 냉각되는 기단은 마치 대기권의 T자형 삼거리처럼 갈라지면서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한다. 이 각각의 팔은 3000km쯤 이동하다가 매우 건조한 상태가 되어 남반구와 북반구의 위도 30° 지점(적도와 극점 사이의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서 지표면으로 하강한다. 지구 주위를 빙 두르는 이 두 띠를 아열대 고압대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아래로 밀고 내려오는 공기 때문에 기압이 약간 높기 때문이다. 반면에 적도에서 따뜻한 공기가 위로 솟아오르는 곳은 기압이 낮아져 적도 저압대가 된다.
위도 30°의 아열대 고압대에서 공기는 지상풍의 형태로 적도쪽으로 돌아가면서 이 거대한 연직 순환이 완성된다.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 풍대는 앞장에서 소개했던 열대 우림의 띠와 중위도 지역 사막의 거대한 띠를 만들어낸 것과 동일한 대기 순환 패턴이다. 이 거대한 두 대기순환 패턴은 해들리 세포Hadley cell라고 부르는데, 적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한 쌍의 톱니바퀴처럼 작용한다. 적도 지역의 가열에서 에너지를 얻는 해들리 세포의 움직임은 거대한 열기관과 같다-원리적으로는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비록 그 출력이 오늘날 전 세계의 인류 문명이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보다 10배나 큰 200조 와트나 되긴 하지만 말이다. - P318

그런데 우리 행성에는 지구상의 바람들에 큰 영향을 미치는요소가 또 하나 있다. 지구와 그 대기는 회전하고 있다. 지구는단단한 구체이기 때문에, 지구가 자전할 때 적도 지역 표면이고위도 지역 표면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공기가 아열대고압대에서 적도 쪽으로 돌아가는 동안 그 아래의 지표면은 갈수록 동쪽으로 점점 더 빨리 움직인다. 지표면과 공기 사이에 약간의 마찰이 일어나 움직이는 지표면이 공기를 함께 끌고 가려고 하지만, 공기는 옆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도가 충분히 붙지 않아 지표면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적도를 향해 불어가는 바람은 자전하는 지표면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지고 만다. 그로인해 적도를 향하는 바람은 서쪽으로 살짝 구부러지면서 나아가게 된다. 이 현상을 코리올리 효과 Coriolis effect라고 부르는데, 이 효과는 회전하는 구의 표면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에 작용한다. 예컨대 탄도 미사일도 코리올리 효과 때문에 날아가면서 경로가 옆으로 구부러진다. 이것은 이렇게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분이 열대 바다를 지나가는 배 위에 서 있고, 탁월풍이 동쪽에서 불어온다고 상상해보자. 하지만 여러분과 지표면이 대기속에서 빨리 움직이고 있고, 이때 부는 동풍은 자동차를 타고 질주할 때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 P319

북반구에서 부는 바람은 모두 코리올리 효과 때문에 진행 방향의 오른쪽으로 구부러진다. 남반구에서는 반대로 왼쪽으로 구부러진다. 따라서 북위 30°와 적도 사이에서 탁월풍은 남서쪽을향해 구부러진 경로를 그리며, 따라서 풍향 명명법에 따라 이 바람을 북동풍이라 부른다. 남반구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지표면을 따라 북쪽으로 적도를 향해 돌아가는 공기는 서쪽으로구부러지므로 이곳의 탁월풍은 남동풍이다. 이 두 가지 동풍을 무역풍trade wind 이라고 부르는데, 무역풍은 열대 지역에서 늘 신뢰할 수 있게 부는 바람이어서 항해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존재였다.
적도로 돌아가는 북동 무역풍과 남동 무역풍이 적도 부근에서서로 만나는 지점의 띠를 오늘날의 대기과학자들은 적도 수렴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항해자들 사이에서는 적도 무풍대(적도 저압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저기압 공기가 모이는곳으로, 바람이 약하거나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특징인데, 15세기 후반에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던 포르투갈 선원들이 적도를 건너면서 처음 발견했다. 이 지역은 항해하는 선박에 매우 위험했는데, 바람이 다시불 때까지 혹은 해류가 배를 그곳에서 빠져나가게 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몇 주일 동안이나 적도 무풍대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 있었는데, 뜨겁고 후텁지근한 이 적도 지역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경우, 단지 화물을 제때 운반하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식수가 바닥나 죽음을 맞이할 수도있었다.  - P320

지구의 대기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한 쌍의 대순환 흐름은위도 30°와 60° 사이에서 순환하는 페렐 세포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세포와 달리 페렐 세포는 수동적이다. 페렐 세포는 자체의따뜻한 상승 기류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순환하는 해들리 세포와 극 세포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양쪽에서 돌아가는 두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저절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페렐 세포와 해들리 세포에서 하강하는팔들이 만나는 북위 30°와 남위 30° 부근의 아열대 지역에 기압이 높은 곳이 띠를 이루며 생기는데, 이곳을 ‘아열대 무풍대horselatitudes‘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바람이 약하거나 풍향이 자주 바뀌거나 바람이 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적도 무풍대처럼 선원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페렐 세포는 양쪽의 해들리 세포와 극 세포에 의해 생겨나기때문에, 두 세포와는 반대 방향으로 순환이 일어난다. 이것은 항해 시대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 P322

*선원들이 일상적으로 괴혈병에 걸리기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인이 감행한 최초의 이 장거리 항해들에서였다. 그 당시에 괴혈병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것은 아니다. 기아가 발생할 때나 영양 공급이 빈약한 군인들 사이에서도 괴혈병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제 몇 달 동안 바다에서 항해를 계속한 선원들에게 괴혈병이 흔히 나타났고, 심지어 필연적이라고 할 정도로 나타났다. 지금은 괴혈병이 비타민 결핍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타민 C, 즉 아스코르브산은 우리 몸이 결합 조직의 주성분인 콜라겐을 만드는 필수 성분으로 쓰인다. 비타민 C가 부족한 식사를 한 달 정도 계속하면, 괴혈병 증상이 점점 악화된다. 잇몸 출혈과 뼈 통증과 함께 상처가 잘 낫지 않고 이가 빠지며 결국에는경련이 일어나 죽게 된다. 흥미롭게도 사람은 괴혈병에 걸리는 극소수 동물종 중 하나이다(또 다른 동물은 기니피그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우리가 다른영장류 종들과 갈라질 때 유전 암호 중 한 문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났고, 그 결과로 간세포에서 아스코르브산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효소가 생기지 않게되었다. 감귤류를 섭취하면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18세기말까지 괴혈병은 긴 항해에 나선 선원들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 P329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개척한 길을 네덜란드와 영국과 프랑스도 뒤따라가려고 했다. 이들 해상 교역 강대국 사이의 경쟁이치열해지자, 전략적 가치가 있는 항구와 요새에서 경쟁자를 쫓아내고, 중요한 해상 통로를 지배할 수 있는 요충지를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하면서 전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이 일어났다. 탐험과 해상 교역이 가져다준 결과로 유럽에서 힘의 무게중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세계에서 아시아를 횡단하는 실크로드 교역망의 종착역인 서쪽 변방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중해 지역(수천 년 동안 도시 국가들과 왕국들과 제국들이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여온 내해 지역)은 이전의 중심적 위치를 잃고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크게 떨어진 변두리 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P335

*그 당시 두 해양 강대국은 1494년에 세계를 양분해 포르투갈이 그 동쪽을, 에스파냐가 그 서쪽을 차지하기로 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토르테시야스선은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리그(2000km를 조금 넘는) 지점에서 대서양을 남북으로 가르면서 지나간다. 그것은 망망대해를 지나가는지도 위의 선에 지나지 않았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인도로 가던 도중에 남아메리카 해안을 발견했을 때, 그곳이 이 경계선에서 자기 쪽 구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포르투갈 영토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모두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반면, 오직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이유는 이 때문이다. 1520년대가 되자, 그렇다면 지구 반대편 지역은 누구의영토로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만약 토르데시야스선을 양극을지나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돌도록 계속 연장해 태평양(대서양을 지나는 선과180° 반대편에 있는)을 지나가게 한다면, 말루쿠 제도는 에스파냐의 영역에속할까, 포르투갈의 영역에 속할까? 결국 이 분쟁은 프랑스와 계속된 전쟁 때문에 현금이 급히 필요했던 에스파냐가 말루쿠 제도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에 팔면서 해결되었다. - P337

이것이 산업화의 가속을 이끈 세 갈래 과정의 핵심이다. 증기는 석탄을 더 많이 채굴하게 했고,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제련소와 주조 공장은 점점 더 많은 철을 생산했으며, 석탄과 철은 더많은 증기 기관을 만들고 돌아가게 하는 데 쓰였고, 그렇게 제작된 증기 기관은 석탄을 채굴하고 철을 생산하고 더 많은 기계 장비를 점점 더 빨리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석탄과 철과 증기 기관은 선순환 삼각형을 이루었다.
이 산업적 전환이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이유는 이전의문명들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에너지 제약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석탄은 저림 작업에 의존할 필요 없이 막대한양의 열에너지를 제공했고, 증기 기관은 동물과 인간의 근육에 의존하던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지하에 막대한 양이 매장된 연료 자원이 없었더라면, 농경 사회에서 벗어나 문명이 발전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 P355

석탄기(3억 6000만여 년 전에시작돼 3억여 년 전에 끝난 약 6000만 년간의 시기)에 가장 거대하고 광범위한 석탄층이 생겼다. 이 지질 시대에 석탄기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이때 석탄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시기들에도 석탄이 생성되긴 했지만, 석탄기에 생성된 석탄이 전체 매장량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산업 혁명 이후 우리가 사용한전체 석탄 중 약 90%가 바로 이 짧은 지질 시대 때 만들어졌다.
정상적으로는 떡갈나무가 되었건 올빼미가 되었건 생물이 죽으면, 그 몸이 분해되면서 유기 분자 속의 탄소가 이산화탄소의형태로 공기 중으로 빠져나가고, 다시 광합성 식물이 그것을 흡수한다. 그런데 석탄기 동안에 그토록 막대한 양의 탄소가 석탄으로 변하려면, 그러한 분해 과정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그 시기에 어떤 이유로 탄소 순환 과정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나무들이 죽어갔지만, 어떤 이유로 썩지 않은 것이다. 쓰러진 식물은 땅 위에 쌓여 이탄泥炭이 되었고, 이것이 땅속으로 점점 더 깊이 묻혔다가 지구 내부의 뜨거운 열을 받아 석탄으로 변했다.
이탄이 쌓이기 위한 핵심 조건은 죽은 물질이 분해되어 없어지는 속도나 더 긴 시간 척도에서는 퇴적물이 물리적으로 침식되는 속도보다 식물의 생장이 더 빨리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석탄기 때 균형을 깬 결정적 요인은 저지대 습지 환경에서 무성하고 왕성하게 자라던 숲이었다. 이곳에서 죽은 나무는 완전히부패하기 전에 산소가 없는 땅속에 묻혔다. - P356

석탄기에 그토록 많은 석탄이 퇴적된 주 이유는 생물학이 아니라 지질학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도 부근의 열대 지역은 따뜻했지만, 석탄기 후기는 지구의역사에서 매우 추운 시기였고, 곤드와나 남쪽은 거대한 대륙 빙하로 뒤덮였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석탄기의 세계는 푹푹 찌는 정글이 사방에 널려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렇게몹시 추운 기후가 닥친 주요 원인은 그 당시 대륙들의 배열에 있다. 한데로 모이던 땅덩어리들은 남극점에서부터 적도를 넘어북극점까지 죽 뻗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따뜻한 열대 바다와 차가운 극 지역 바다 사이에 일어나는 순환(8장에서 설명했던 컨베이어 벨트)이 막혔고, 적도에서 극 쪽으로 열의 이동이원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곤드와나 대륙이 남극점 위에 자리잡고 있어 이 지역에 두꺼운 얼음이 쌓이게 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넓은 대양 위로는 얼음이 광범위하게 뻗어나가지못한다.
활기차게 생장한 석탄기의 숲들도 이러한 빙하기 조건을 촉발한 일부 원인이었다. 나무들은 광합성을 위해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였는데, 죽고 나서 나무의 유기 물질 중 상당 부분은 썩는 대신에 그대로 나무로 남아 있는 바람에 탄소가 공기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크게 떨어졌고, 이 온실가스의 농도 감소는 지구 냉각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죽은 생물의 분해 과정에서는 공기 중의 산소를사용해 이산화탄소를 만드는데, 이탄이 많이 만들어질수록 대기중 산소 농도가 아마도 최대 35%까지 높아졌을 것이다(오늘날의대기 중 산소 농도는 약 20%이다). 이렇게 높은 산소 농도는 큰 날개를 가진 잠자리처럼 거대한 곤충이 진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 P361

유럽 대륙에서도 집중적 채탄 작업과 철과 강철의 대량 생산을 위한 도구와 기술을 도입하면서 산업 혁명은 탄생 장소에서다른 곳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도 영국의 산업에 연료를 공급한 것과 동일한 석탄기의 석탄층이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에서 독일 루르 지역까지 죽 뻗어 있다. 이곳은 유럽의 산업중심지로 성장해갔는데, 고대 세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처럼현대사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석탄 초승달 지대라고 부를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에너지원을 석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훨씬 늦게 일어났다. 동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던 식민지들은 인구밀도가 낮았고, 숯을 만들 수 있는 숲이 광대한 면적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아메리카의 산업계에서는 19세기 중엽 이전에는 숯을 석탄으로 대체하는 과정이 대규모로 일어나지 않았다.  - P367

석유가 매력적인 연료인 이유는 에너지 회수율이 아주 높기때문이다. 즉, 석유를 추출하고 정제하는 데 드는 에너지는 적은반면, 거기서 얻는 에너지는 아주 많다. 그리고 석유는 석탄보다가지고 다니기가 훨씬 쉽다. 액체인 원유는 관을 통해 먼 거리로보낼 수 있다. 이렇게 높은 에너지 밀도와 운송 편이성, 상대적 풍부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석유는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석유는 단지 연료로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연간 총 생산량 중 약 16%는 연료로 쓰이는 대신에 다양한 유기화학 분야의 원료로 쓰이면서 용매와 접착제, 플라스틱, 의약품 등 온갖 종류의 물질을 만들어낸다. 오늘날의 집약 농업 역시 석유가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석유는 다수확 농경지의 인공 환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살충제와 제초제 합성에 쓰이고, 농경지를 관리하는 트랙터와 수확기의 연료로 쓰이며, 인공 비료 역시 화석 에너지를 사용해 만든다. 석유는 단지 우리의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음식을먹을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석유를 마시는 셈이다. - P372

나중에 석유가 될 유기 물질 부스러기가 해저에 쌓이려면, 표층수에 사는 플랑크톤이 크게 번식해야 하고, 해저에 산소가 부족해야 한다. 그래야 탄소를 순환하는 세균이 부족해 해저에 유기 물질이 풍부한 검은색 진흙이 쌓일 수 있다(석탄층이 쌓이는 데 필요한 조건과 비슷하게), 탄소를 듬뿍 포함한 이 진흙은 그 위에 퇴적물이 계속 쌓임에 따라 그 무게에 짓눌려서 검은색의 셰일 암석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만드는 출발 물질이다. 셰일은 땅속으로 점점 더 깊이 내려가면서 지구의 내부 열에 의해 뜨거워지는데, 그러다가 ‘석유 창 oil window‘(50~100°C의 온도 범위)이라 부르는 온도 구간을 지나게 된다. 이렇게 천천히 뜨거워지는 과정을 통해 죽은 해양 생물의 복잡한 유기 화합물들이 분해되어 석유의 구성 성분인 긴 사슬 탄화수소 화합물 분자들이 만들어진다.  - P375

하지만 백악기의 해저는 조건이 아주 달랐다. 극 지역에 차갑고 밀도가 높은 물을 만들어내는 얼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온실세계에서는 3장에서 보았던 열염 순환이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바다를 통해 물을 순환시키는 전 지구적 컨베이어벨트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또 있는데, 따뜻한 물은용존 산소량이 적다. 그래서 깊은 물로 흘러드는 산소가 있더라도, 분해 세균이 금방 소비해버리고 만다.
이 모든 과정의 결과로 백악기의 해저는 산소가 고갈된 죽음의 영역이 되었고, 세균이 유기 물질을 제대로 분해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햇빛이 잘 드는 따뜻한 표층수에서는 플랑크톤이미친 듯이 증식하여 바다 눈이 눈폭풍처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유기 물질은 분해되지 않은 채 쌓였다가 그 위에 퇴적물이많이 쌓임에 따라 점점 더 깊이 묻혔다. 석탄기에 침강하는 습지분지에 있었던 숲처럼 백악기의 해저에서는 탄소 순환 체계가 붕괴하여 유기 물질이 수천만 년 동안 쌓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산소가 부족한 해저에는 유기물이 풍부한 진흙 슬러지가 두껍게쌓였고, 이것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검은색 셰일 퇴적층으로 변했다. 그래서 테티스해의 광범위한 지역에 셰일이 축적된 시기를 ‘블랙 데스 Black Death‘, 즉 ‘검은 죽음‘이라 부른다. - P378

문명의 전체 역사는 현재의 간빙기에서 잠깐 동안 반짝이는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잠깐 동안 기후가 안정된 시기에 살고 있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지구의 암석층을 파내 땅 위에 쌓으면서 건물과 기념물을 지었다. 우리는 특정 지질학적 과정을 통해 금속이 농축된 광석을 캐냈다. 그리고 지난 수백년 동안 지구의 과거에서 변덕스러웠던(쓰러진 나무가 썩지 않던)시기에 생성된 석탄을 채굴했고, 산소가 부족한 해저로 가라앉은 플랑크톤 유해에서 만들어진 석유를 퍼올렸다.
이제 우리는 지구 전체 육지 면적의 3분의 1 이상을 경작하고있다. 채굴과 채석 작업은 전 세계의 모든 강들이 실어 나르는 것보다 더 많은 물질을 이동시킨다. 그리고 산업 활동에서배출된 이산화탄소는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보다 훨씬 많아 전세계의 기후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아주 크게 변화시켰지만, 자연을 압도하는 힘은 최근에 와서야 손에 쥐게되었다. 지구는 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를 마련했고, 그 자연지형과 자원은 계속해서 인류 문명을 나아갈 방향을 이끌고있다.
지구가 우리를 만들었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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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들지 못한 채 잠든 아내 옆에 누워서 이 공포를 극복하려고-그날 이 말을 듣고, 나는 꽤 놀랐다-나를 떠올렸다. 그순간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나는 정말로 살아 있었다-생각을 했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그가 커피잔 받침에 놓인 스푼을 바로잡아놓고 말하길, 그래야 하면, 한밤중에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지만, 꼭 그래야 하면 내게 전화할 것이고, 그러면 내가 받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내 존재감이 그가 찾아낸 가장 큰 위로였고, 그래서 다시 잠들 수 있었다고.
"전화야 당연히 언제든 해도 되지." 내가 말했다.
그러자 윌리엄이 눈알을 굴렸다. "나도 알아. 그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이야." 그가 말했다. - P18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겁을 많이 먹는다고, 분명어린 시절에 내게 일어난 일 때문이겠지만, 나는 걸핏하면 몹시 겁에 질린다. 한 예로, 거의 매일 저녁 해가 지면 나는 여전히 무섭다. 아니면 이따금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들면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처음 윌리엄을 만났을 때는 나자신의 이런 면을 알지 못했고, 그 모든 게 •••••• 오,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윌리엄과의 결혼생활을 끝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어느 정신과의사를 찾아갔고, 그 다정한 여인은 내가 처음 찾아간 그날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내가 답하자 그녀는 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올리며 내 문제에 해당하는 진단명을 말했다. "루시, 당신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완전히 진행된 경우로군요." 어느 면에서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뭔가에 이름을 붙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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