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평전
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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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학 원리는 탄탄한 창조 유일신론creational monotheism이다. 우상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기도 쉐마가 선언하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바울은 고린도와 다른 모든 곳에 ‘많은 신, 많은주‘가 있음을 알아도 아주 잘 알지만, 그가 새로 만들어낸 새 쉐마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이 바로 고린도에있던 유대인 공동체가 갈리오에게 청원하면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던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기도는 필시 이기도와 비슷한 또 다른 기도였으리라. 이 기도는 그의 마음속에 늘 머물렀고 날마다 그의 입에 있었다. 이제 바울은 한 분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원하던 다른 때처럼, 이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그분의 나라를 향한 자신의 충성을 선언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그분에게서 만물이 비롯되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 또 그분을 위해서니다.
또 한 분이신 주 메시아 예수가 계시니.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존재하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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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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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심은 바울이 분명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말하지 아니한것을 바울에게서 끄집어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울도 오래전에는 그렇게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 것들에 근거를 두고있었다. 바울이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발전하는데, 이는 분명 자신의 청중이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무엇이며 자신의 청중이 오해할 소지가 있는 설명이 무엇인지를바울 스스로 발견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설명의핵심을 보면, 바울은 비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며, 비유대인과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되 예수가 완전히 바꿔 놓은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려운 이중 과업이다. 이는 가장 어려운 회심과 다름없는 것, 상상력의 회심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누구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반드시 이런 회심이 필요하다.

‘주와 함께‘ 하나가 되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자 아주 상이한 세 이미지를사용한다. 첫째, 그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를 떠올려 주면서, 예수가 이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내려오시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생각하는 "하늘"이 문자 그대로 ‘저 위‘, 곧 우리가 자리한 시공간의 연속선에 자리한 어떤 장소라고 추측하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된다. 고대 유대인은 ‘3층우주‘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꼭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하늘은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하는차원 안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실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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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평전
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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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바울을 진지하게 읽는 모든 이가 만나는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리스어로 분명 ‘충성‘을 가리키는 한 단어가 바울이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피스티스pistis다. 이 말은 보통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종종 ‘신실함‘,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도 지니며, 당연히 ‘충성‘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피스티스라는말은-믿는 사실은 물론이요 믿은 것 또는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말인 ‘믿음 belief‘이란 의미의 ‘믿음‘aith‘을 뜻할 수 있는데, 이 조그만 한 단어로 이미 아주 충분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어떤 진정한 믿음에 함께 따르는 개인의 헌신을 가리킬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예수가 이제 온 세상의 정당한주권자이신 ‘주‘이시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피스티스는 ‘성실‘이나
‘충성‘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카이사르(로마 황제)가 그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나바 및 사울과 의견을 같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주목하게 된다. 성전은 정결을 의미했으며, 충실한 유대인에게) 정결은 보통 비유대인과접촉하는 것에 극도로 주의함을 의미했다. 바나바와 사울이 이미얼핏 목격했고,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도 유대인이 아닌 고넬료의 집에서 목격한 이 일은 새로운 종류의 정결이 탄생한 것이었다. 새로운 자유였다. 새로운 성전이 세워졌다. 이전과 그 종류가 다른 새로운 정결이 탄생했다. 많은 혼란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으며,
특히 장차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구원 행위를 가장 열렬히 고대하던 이들은 아주 혼란스러워했다. 일부 성실한 유대인이 그런 점을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이는 바나바와 사울에게 분개한 것도당연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두 벗 역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의견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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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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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유대인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를 선포하는 것이었으니, 회당은 그런 메시지를 전하기에 적절한 출발점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 13장 뒷부분에 나오는 상당히 긴 글, 곧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길게 이야기한 내용을 담은 대목이 바로 누가가 (이런 자리에서 주된 연설자로 등장하는) 바울이 이 회당 저 회당에서 말하던 것을 요약하여 제시한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 같다. 앞으로 보겠지만, 바울의말에는 다양한 반응이 뒤따른다. 하지만 성경은 키프로스의 유대인이 보인 반응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무것도 일러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 나중에 이 섬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뭔가 좋은 반응이 있었으며, 적어도 작은 예수 따름이 공동체를 만들어 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이 선교 여행자들이이 섬의 도읍인 바보(파포스)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다소의 어린 사울이 그랬듯, 그 결과는 열심-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 토라를 향한 열심, 조상이 전해 준 질서를 뒤집어엎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거부하는 열심이었다.
추측컨대, 그 지역 유대인들 가운데도 바울이 말해 온 것이 어쩌면 참일 수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 이들이 일부 있었을 것 같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저 그들이 살아 온 방식을 위협하는 것으로, 그들의 소망이 늘 그려 왔던 형상을 전혀 다르게 다시 그려 보인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스라엘을 그릇된길로 인도하는 가짜 교사라고 비난했다. 바울의 반응은 예언자의글을 다시 한 번 인용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늘 인용하던본문인 이사야 49장이었다. "내가 너를 뭇 민족에 빛이 되게 하여네가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오는 자가 될 수 있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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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비아토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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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행선들은 그의 성숙한 사고의 중심이요 나중에 기독교신학이 될 것의 근본이 된다. 첫째, 이스라엘이 가진 이야기가 있었다. 한 분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고, 무엇을 행하고 계시며, 무엇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를 다룬 이야기였다.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가리켜 ‘살아 계시다‘고 말할 때 표현하려 했던 생각에는 하나님이어떤 이야기를 갖고 계시고 계획을 세우시며 그 계획을 펼쳐 가신다는 관념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시간을 따라 내려가면서 한 점으로 집중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권능으로 다시오셔서 당신 백성을 궁극의 원수에게서 구하시고 결코 요동치 않는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쓴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됩니다."1"

이런 불확실한 말은 결국 더 새로운 가르침에, 바울 다음 세대에 활동한 전기 작가이자 철학자인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모습처럼, 세계를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하여 보는 세계관에 길을 내주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구성된 악한 영역을 떠나서 ‘하늘‘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결국 그 게임의 목표라고 보았다. 순수한 영혼은 그 ‘하늘‘에서 잠시 이 악한 영역으로 유배당했지만, 궁극에는 영원한 복락이 있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런 말이 현대 서구 기독교가 하는 말과 흡사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다. 바울이 믿은 것은 분명 그런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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