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심은 바울이 분명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말하지 아니한것을 바울에게서 끄집어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울도 오래전에는 그렇게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 것들에 근거를 두고있었다. 바울이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발전하는데, 이는 분명 자신의 청중이 쉬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무엇이며 자신의 청중이 오해할 소지가 있는 설명이 무엇인지를바울 스스로 발견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설명의핵심을 보면, 바울은 비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며, 비유대인과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되 예수가 완전히 바꿔 놓은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어려운 이중 과업이다. 이는 가장 어려운 회심과 다름없는 것, 상상력의 회심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누구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반드시 이런 회심이 필요하다.
‘주와 함께‘ 하나가 되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자 아주 상이한 세 이미지를사용한다. 첫째, 그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를 떠올려 주면서, 예수가 이와 비슷하게 하늘에서 내려오시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생각하는 "하늘"이 문자 그대로 ‘저 위‘, 곧 우리가 자리한 시공간의 연속선에 자리한 어떤 장소라고 추측하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된다. 고대 유대인은 ‘3층우주‘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꼭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하늘은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하는차원 안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