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평행선들은 그의 성숙한 사고의 중심이요 나중에 기독교신학이 될 것의 근본이 된다. 첫째, 이스라엘이 가진 이야기가 있었다. 한 분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고, 무엇을 행하고 계시며, 무엇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를 다룬 이야기였다.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가리켜 ‘살아 계시다‘고 말할 때 표현하려 했던 생각에는 하나님이어떤 이야기를 갖고 계시고 계획을 세우시며 그 계획을 펼쳐 가신다는 관념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시간을 따라 내려가면서 한 점으로 집중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권능으로 다시오셔서 당신 백성을 궁극의 원수에게서 구하시고 결코 요동치 않는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쓴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됩니다."1"
이런 불확실한 말은 결국 더 새로운 가르침에, 바울 다음 세대에 활동한 전기 작가이자 철학자인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한 모습처럼, 세계를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하여 보는 세계관에 길을 내주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구성된 악한 영역을 떠나서 ‘하늘‘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결국 그 게임의 목표라고 보았다. 순수한 영혼은 그 ‘하늘‘에서 잠시 이 악한 영역으로 유배당했지만, 궁극에는 영원한 복락이 있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런 말이 현대 서구 기독교가 하는 말과 흡사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제다. 바울이 믿은 것은 분명 그런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