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할 수 있잖아. 어느 날 아침잠에어 깨어났는데 적당히 살려면 행복도 사랑도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거지. 홀가분해지더군. 마치 손을 뻗어 라디오를 꺼 버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어."
"체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놀라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더 마시다가는비랄보한테 내 삶에 대해서 얘기할까 봐 걱정이었다.
"사람은 체념하지 않아."
비랄보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해서, 나는 그 속에 담긴분노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그것도 가톨릭 미신이지. 사람은 배우고 또 경멸하는 법이야."
- P19

그 곡은 [리스본]이라는 노래였다. 예전에 들었던 곡이었지만, 나는 누군가가 꿈속에서 어떤 도시로 돌아가듯 다시 산세바스티안에 와 있었다. 도시는 사람의 얼굴보다 빨리 잊힌다.
기억이 있던 곳에는 후회나 공허가 남는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도시는 기억속에 남아 있다.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잠자는 동안 보았던것을 늘 기억할 필요는 없다. 어째든 그 꿈은 몇 시간 후면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 화장실의 찬물을 향해 몸을 기울이거나 커피를 마시는 단 몇 분 만에 잊어버리고 만다. 산티아고 비랄보는 그 불완전한 망각의 고통에 면역이 된 것처럼 보였다. - P56

그러나 음악이 과거와 아무 상관 없이 순수하다는 비랄보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노래 「리스본」은 밀폐된 유리병에 보관된 듯이 투명하고 건드리지 않은 시간의 어떤 순수한 느낌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혀 이상하지 않게두 사람의 모습을 한데 합친 것 같은 꿈속의 얼굴처럼 그것은리스본이면서 동시에 산세바스티안이었다. 처음에는 노래 사이에 침묵 속에서 돌아가는 음반의 바늘 소음처럼 들렸다. 그다음에는 드럼의 금속 접시를 주기적으로 스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심장 박동과 비슷했다. 그 뒤에는 트럼펫만 조심스럽게 멜로디를 냈다. 빌리 스완은 누가 깰까 두려운 것처럼 연주했고,
1분 후에야 비랄보의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어둠 속에 잃어버린 길을 모호하게 가리키는 듯했다. 음악이 한창 고조되었을 때 그 길이 다시 나타나 멜로디의 전체적인 형태를 보여 주었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가 햇빛으로 뿌예진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간것처럼 말이다.
- P57

‘아쿠아리움의 계단을 따라 항구로 내려갔다. 몽롱한 정신에, 허기지고, 술기운도 약간 있었다. 행복이나 불행 같은 것과 동떨어진, 그런 것들보다 더 앞서거나 아니면 그런 것과 무관한 심적 흥분에 밀려 걸어 내려갔다. 뭔가를 먹고 싶다거나 담배라도 피워야겠다는 욕구 같은 것이었다. 걸으면서 이전에 루크레시아가 항상 좋아했고, 그녀와 말콤이 레이디 버드에 들어설 때면 연주하기 시작했던 노래의 몇 구절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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