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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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조각

-축제는 축제를 견디려 종일 서 있었다
잠시 그들의 일부가 되어주기로 하였으므로
음악이 흐르고
불빛이 내리고
나는 잘 죽어야 한다
하루를 사는 일
이건 녹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저들 삶과 얼마나 다를까
잠시를 영원으로 아는 사람 눈먼 사람 말이네
모든 날들인 하루
그래 하루라는 건 결코 허한 시간이 아닌 거야
부재하고 싶었어 멸하고 싶었어 저 실상으로부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목이 가늘어지지만
나는 서서히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죽는 방식이 사는 이유가 되었니
카펫을 적시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적막을
투명하다는 건 힘이 될 수 없지만
어떤 패도 지킬 수가 없지만
버티어온 힘으로
그러니 다시 고쳐서 말해보자
죽음이 이미 거기
있었으모로. - P19

역류성 식도염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역류하였을까
누추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으려는 몸
물이 물 아닌 시름
내 슬픔의 경로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인데
살아 자주 역류했다.
당신이
관념이
아름다움이
세상모르고 거기 있을 때
서러운 풍경은 모이거나 흩어졌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과 문 사이에서 앞날을 흔들어보기도 했으나
거꾸로 서서 내일을 본 적 있니
웃어본 적 있니
물구나무서서 보는 일은 좀 괜찮았는데
무언가 잘 안 되어 생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면
모쪼록
이것도 역설의 방식이라 하면 안 될까
나도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너우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 P27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깜짝 눈길을 때 연두와 눈물 때 연두가 같지 않고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내가 있었음과 당신의 없었음은
또 어떻게 말할까
늦은 오후에 후둑 비 떨어진다
비와 비
그 사이가 바로 연두
말하려다 만다
연두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일처럼
사랑도 그러했는데
다 듣고는 믿지 않을 거면서
당신들은 말하라 말하라 다그친다
설명하라 한다
할수록 점점 다른 뜻이 되어가는
절망 배신 희생 죽음 따위와 뭐가 달라
그들 생애엔 순간을 포함하지 않았으리
비루하지도 않았으리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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