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월 동안 자신이 차지했던 모든 공간을 기억해낸다. 그는 기억의 그물을 던진다. 자신을 향해 그물을 덮어씌워 스스로를 끌어올린다. 어부인 동시에 어획물이 되어 그는 과거의 자신이 무엇이었던가를, 자신이 무엇이 되어 있었나를 보기 위해, 시간의 문턱, 장소의 문턱에다 그물을 던진다. 하기야 지금껏 그는 이 날에서 저 날로 건너가며 별생각 없이 살아왔다. 날마다 조금씩 다른 일을 계획하며 아무런 악의 없이. 그는 자신을 위한 숱한 가능성을 보아왔고,이를테면 자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위대한 남자, 등대의 한 줄기 빛, 철학적인 정신의 소유자. - P10

그에겐세계라는것이취소가 가능한 것으로 보였고, 자기 자신까지 취소가가능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는 지금처럼 자신에게 30세가 되는 해의 막이 오르리라고는,판에 박힌 문구가 자신에게도 적용되리라고는 또한 어느 날인가는자신도 무엇을 진정 생각하고, 무엇을 진정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로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한순간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천한 가지의 가능성 중 천의 가능성은 이미 사라지고 시기를 놓쳤다는 혹은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고 나머지 천은 놓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의혹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그는 이제껏 무엇 하나 겁내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야 그는 자신도 함정에 빠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 P12

그가 체득한 것은, 여러 인간들이 한 인간에 대해 과오를 벙한다는 것, 인간이란 모름지기 인간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겐 상처를 받아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다는것누구나가 타인에 의해 죽고 싶도록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체험뿐이었다. 또한 바로 그 자체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심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임에도,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대한 체험이었다. - P19

이 금빛의 9월, 타인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모든 환상을 털어내버린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구름이 저처럼 흐르는 것이라면 나는 대체 누구일까!
내 육신에 기거하고 있는 정신은 그것의 거짓 주인보다 한결 위대한 사기꾼이다. 정신에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을 나는 무엇보다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나자신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개개의 사상이란 한결같이 낯선 데서얻어 온 씨앗이 발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감동시킨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런가 하면 감동하지도 않았던 유의 사물들에 관해서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 P20

나, 온갖 무의식적인 반응과 단련된 의지로 이루어진 한 다발의묶음인 나, 충동과 본능의 부스러기와 역사의 찌꺼기에 의해 길러지는 나, 한 발을 황야에 두고 다른 한 발로는 영원한 문명의 중심가를 밟고 있는 나. 도저히 관통할 수 없는 나, 각종 소재가 혼합되어 머리칼처럼 뒤엉켜 풀 수 없는, 그런데도 뒤통수의 일격으로 영원히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는 나, 침묵으로부터 생성되고 침묵을강요당하는 나..………… 왜 나는 이 한여름 내내 도취 속에서 파괴를 추구해왔던가? 아니면 도취 속에서 승화를 갈구해왔던가 그것도나 자신이 하나의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벌써 오래 전에 누구인가몇 개의 음을 튕겨본 적이 있을 뿐인 버림받은 악기였음을 스스로외면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 음을 어쩔 줄 몰라하며 변주하고,
분노에 떨며 나의 흔적을 지닌 한 가락의 음을 만들어내려고 애를쓰는 것이다. 나의 흔적이라니! 흡사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흔적을지니는 것이 무슨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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