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이거나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맨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P13

김태정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
천장의 쥐들도 대거리 할사람 없다고 너무 외로워 마세요.
자라는 이빨이 성가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살 부러진 검정 우산에게도 이제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귀 어두운 옆집 할머니와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
더는 널어 말릴 양말도 속옷 빨래도 없으니 늦여름 햇살들은 고추 말리는 데나 거들어드리세요.

김태정 중 - P18

화양연화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걸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P41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
서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란다 여기선
일러주는 이름이나 외고 있다가
코밑이 시커메지면, 겨드랑이에 털이 돋으면
낮은 돈에 취하고, 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뻘밭에 쓰러져 눕는 거란다.

눈에는 핏발이 오르고
더러운 냄새를 입에 풍기며
제 말만 게워내는 어른이 되지.
모를 것도 물을 것도 더는 없어져
날개옷이 있어도 소용없다네

떠날 날 문득 닥치면
또 무섭고 서러워 눈물 흐르지
이곳 어디였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나도 두렵단다. 여기는 어딘지
나도 모른단다. 아아 아가들아
네가 누군지
나는 또 무엇인지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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