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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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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은 왠지 사람을 더 비참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 보다도,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연말은 희망이나 소망 같은 것들을 꿈꾸게 하지만, 정작 괴로운 것은 비루하고, 소소한 나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도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올 해의 내 삶도 그래왔고 내년의 내 삶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 연말의 나를 우울하게 한다. 하지만 그 우울함이 반드시 불행함은 아니다. 비루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도 사랑도 있고, 웃음도 있고, 슬픔도 있음은 물론이다. 일상의 무서움이란 마치 큰 강물과도 같아서 그러한 감정들을 모두 보듬고 묵묵히 흘러간다는 데 있다.

 

 

최근에 친구의 소개로 김애란이란 작가의 두 권의 단편소설집(<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을 읽었다. 그녀는 이러한 일상의 무거움을 무겁지만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내가 읽어본 작가 중에서는 김소진을 연상시킨다. 김소진이 주로 부모 세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김애란은 동시대 우리의 현재의 삶에 매우 근접해 있다. 내가 그녀의 소설에 더 공감하게 되는 이유는 그녀의 소설의 주인공들의 삶이 주로 중하층의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고,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에서 나의 삶,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을 마주치게 되기 때문이다.

 

 

너무 남루하고 수더분해서 노트에서 찢어내어 휴지통에 구겨넣어 버리고 새롭고 깨끗한 페이지에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인생도 때론 내게 붙어다니는 것들을 좀 떼어내 버리고 새로운 페이지에 시작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가 많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설령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다 하더라도, 새로 시작할 때는 새로운 페이지가 아니라 휴지통에서 꺼낸 구겨진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더 안 좋은 조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데 비극성이 있다. 인생은 결코 새로운 페이지에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 상처로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졌다 하더라도 바로 그 위에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데 인생의 어떤 잔인함과 진실성이 있다. 인생을 깨닫는 다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잔인함과 진실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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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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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 1, 2학년 시절은 ‘하루키와 함께 한 날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던한 밤들을 그의 소설 속에서 보냈고, 그의 글이라면 나오는 족족 읽어 나갔다. 나는 그의 글을 ‘일본’ 소설로 거의 느끼지 못했다. 거기엔 커다란 공통의 감정이 있었고,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하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 마을’을 벗어나듯 하루키 세계에서 빠져 나왔고, 내 일상에서도 차츰 멀어졌다. 10여년 후 하루키의 <1Q84> 열풍이 지나고 헌책방에서 구입한 세 권의 책들을 얼마 전 꺼내 들었다. 며칠에 걸쳐 단숨에 읽어나갔다. 그리고 무언가 더 읽고 싶다는 욕구 속에서 구입한 책이 하루키의 <잡문집>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몇 가지 점에서 내가 하루키의 글에 대한 내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왜 그의 소설이 여전히 그토록 아련하고 가슴 먹먹한지, 마음의 파동을 남기는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다들, 살면서 어떤 하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혹시 운 좋게 찾았다 해도 찾아낸 것의 대부분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고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사려져 버리므로”(444-5쪽). 삶 속에서 끊임 없이 상실과 무력감을 경험하면서도,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의 끈을 놓치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나는 많은 공감과 위안을 얻었다. 그 덕분에 나의 영혼은 어쩌면 조금 더 안전한 장소에 자연 스럽게 연착륙했을 것이다. 

예전부터 그의 소설들을 읽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은 어둠이 일찍 찾아드는 추운 겨울날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하루키 월드는 항상 겨울이었다. 차가운 방 공기는 쓸쓸함을 안겨주면서, 동시에 내 안의 세계에 대한 몰입을 높여준다.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 느끼게 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하루키의 소설과 어울렸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을 때 반가웠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455쪽). 나에게 하루키 세계의 겨울은 항상 따뜻했고, 조금 더 그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잠이 들면 다시 꿈 속에서 그 세계가 펼쳐졌다. 나에게 그의 소설은 "내가 있는 장소를 벗어나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20대 초반의 나와 어렴풋이 재회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모두 하루키 월드를 묵묵히 지켜가고 있는 무라카미 씨 덕분이다. 60이 넘은 나이든 하루키에 당혹감을 느끼는, 한때 하루키 월드에 빠져지냈던 당신이라면, 이 겨울에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의 글들이 마음을 데워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이금이 느는 허리도리를 바라보며 또 한 해를 넘기기가 보다 수월할지도 모른다. 
 

* 여기에는 적지 않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 관한 글들은 뛰어난 사회적 통찰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놀랍게 읽었다. 소설가의 관찰력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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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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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글은 처음 단편을 봤을 때부터 끌렸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녀의 글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유희를 느끼게 하는 장난꾼은 성석제인데, 김애란의 글은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말’과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을 전해준다. 나는 그녀의 웃음 코드가 좋고, 그래서 이번 장편에서도 빵빵 터지며 웃었다. 다른 하나는 그녀의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이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내가 살아왔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삶들을 발견한다(나와 그녀가 비슷한 나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사실과 감정들이 그녀의 글로 고스란히 재현될 때, 삶이란 생각보다 다른 사람과 많은 공통분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기대하는 작가로 생각하고, 이 작가가 앞으로 어떻게 보다 깊게 삶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중에 이번 소설을 접했다. 이번 장편은 과거의 단편들보다 조금 더 깊은 문제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내 기대가 엇나가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폭력성과 무관심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늙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니?”라고 질문하는 작가 언니의 질문은 이것을 대변한다.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황씨 아저씨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니들 눈엔 우리가 다 늙은 사람으로 보이지? 우리 눈엔 너희가 다 늙을 사람으로 보인다!”라는 말이다. “늙음에 데인 것처럼” 놀라고 혐오스러워 하지만, 정작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늙고 병든 “장애인”이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름이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신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말에 아름이는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길 같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히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작가는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란 부모의 헌신적인 돌봄에 의존하며 살아온 삶이다. 내 스스로 나의 능력을 가지고 이렇게 자라온 것이 아니라 아낌 없는 사랑과 돌봄에 의지하며 우리가 커 왔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름이를 통해 따뜻함과 희망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날아 당신 근처까지 갔으면 좋겠다”라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뭇가지를 잔잔하게 흔드는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내게도 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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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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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양보할 재밌는 소설을 발견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삶에서 모처럼 무엇엔가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은 마치 가슴 속에 있는 앨범을 꺼내보는 것처럼 흐뭇한 일이다.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의 기쁨은 대개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남아 있길 마련이라서 다시 좋은 소설을 읽었을 때야만 호르몬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늘진 면이 있듯 단점도 있다. 책장을 다 덮어버렸을 때의 허무함이란, 그 즐거움만큼이나 크다. 소설 속의 삶 속으로 들어가 잠시 일상을 떠나 있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 삶은 다소 낯선 느낌과 허망함을 불러온다. 그러나 그 일상이 오늘처럼 공허한 장소에서 의미 없는 웃음이나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책에 달려있는 많은 리뷰들을 그만큼 책에 대해 느끼는 공감을 표현하는 것일 게다. 어떤 책에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각자가 너무나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세상 속에서는 또 비슷한 감정의 고리들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걸 잘 잡아내는 것이 작가의 힘일테고. 그런 면에서 폴 오스터는 능력 있는 작가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왠지 그의 글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 책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책 속의 책이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하여’이고, 이 책의 제목 또한 어리석은 일들(follies)인 것처럼 살면서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고, 그런 점에서 그러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데 필요한 것이 인간애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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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앳 미 - 일반판
아네스 자우이 감독, 마릴루 베리 외 출연 / 기타 (DVD)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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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를 얼마 전에야 DVD로 보게 되었다. 바로 이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건, 인간의 작음 그리고 연약함이다. 그래서 좀 슬프기도 했다. “나를 봐 주세요”라는 영화 제목처럼 애정에 목말라 있지만, 정작 다른 사람은 따뜻하게 바라볼 줄 모르는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건 나 자신을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며, 따뜻한 애정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나 성공,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배경이나 권력을 이용하려 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원하는 롤리타, 하지만 그 또한 그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 남자들을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배경을 보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들에 대한 남자에 대한 환멸로 끝나고 말지만 말이다.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사랑을 얻고 싶은 그녀는 이러한 사랑이 결국 위선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위선에 바탕한 사랑이라도 자신에게는 절실한 것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롤리타의 아버지 카사드 조차도 자신의 부인이 떠났을 때는 침대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연약한 개인일 뿐이다. 딸이나 아내에게 애정을 표시할 줄 모르고, 타인에게 거만한 그 조차도 애정 없이는 살 수 없 유약한 인간이라는 아이러니. 고상해보이는 음악 선생인 실비아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롤리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녀을 통해 카사드와 만나지만 (물론 그녀는 전부터 카사드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권력에 비굴하고, 돈에 눈 멀어버린 남편일 뿐이다. 롤리타와 함께 파티에 가서 낯선 남자와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한편으로 얼마나 애정에 목말라 있는지 보여준다. 롤리타의 새엄마 카린이나 실비아의 엄마 에디뜨도 비슷하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줄 아는 인물은 롤리타(타인)의 우연한 배려(술에 취에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주는)를 받은 세바스티앙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서 관심[의 시선]을 상징하는 것은 롤리타가 아빠인 카사드에게 녹음해 준 슈베르트 곡의 테입이다. 하지만 카사드는 끝내 그 테입을 외면한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내게 주는 상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들에게 주는 상처는 너무나 쉽게 지나쳐버리는 현실. 자신은 타인의 애정을 필요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상처만 주는 상처의 연쇄고리. 나를 들여다보고, 타인을 바라보면 그들 또한 나처럼 연약한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을... 이토록 가련한 인간인 것을... 눈을 뜨고 있지만 진심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인 것을... 상처의 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작은 관심/배려와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서 실비아가 잠든 집안에 롤리타의 노래를 틀어놓고 떠나는 것도, 롤리타가 아버지를 통해 자신에게 애정을 보여준 카린에게 사과를 전하는 것도, 또 그녀가 자신의 말 때문에 상처 입은 세바스티앙을 떠올리고 그를 ?아가 처음처럼 옷을 덮어주는 것도 감독의 그런 메시지가 담긴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이 영화를 추천해 주신 분은 나의 선생님이셨다. 무엇보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얘기하셨었다. 베르디의 돈 카를로의 베스가 부르는 필립2세의 독백, 몬테베르디, 슈베르트 노래 등은 귀를 맑게 해준다. 특히 시골 교회에서 불려지는 노래들과, 마지막 장면에서 어두운 시골길을 배경으로 울려퍼지는 음악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마음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선생님은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슈베르트의 가곡 ‘An die Musik’을 적어 보내주셨다. 요즘 나는 이안 보스트리지의 음성으로 종종 이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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