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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나의 대학 1, 2학년 시절은 ‘하루키와 함께 한 날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던한 밤들을 그의 소설 속에서 보냈고, 그의 글이라면 나오는 족족 읽어 나갔다. 나는 그의 글을 ‘일본’ 소설로 거의 느끼지 못했다. 거기엔 커다란 공통의 감정이 있었고, 내 마음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하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 마을’을 벗어나듯 하루키 세계에서 빠져 나왔고, 내 일상에서도 차츰 멀어졌다. 10여년 후 하루키의 <1Q84> 열풍이 지나고 헌책방에서 구입한 세 권의 책들을 얼마 전 꺼내 들었다. 며칠에 걸쳐 단숨에 읽어나갔다. 그리고 무언가 더 읽고 싶다는 욕구 속에서 구입한 책이 하루키의 <잡문집>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몇 가지 점에서 내가 하루키의 글에 대한 내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왜 그의 소설이 여전히 그토록 아련하고 가슴 먹먹한지, 마음의 파동을 남기는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다들, 살면서 어떤 하나의 소중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혹시 운 좋게 찾았다 해도 찾아낸 것의 대부분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찾고 추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의미 자체가 사려져 버리므로”(444-5쪽). 삶 속에서 끊임 없이 상실과 무력감을 경험하면서도,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의 끈을 놓치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나는 많은 공감과 위안을 얻었다. 그 덕분에 나의 영혼은 어쩌면 조금 더 안전한 장소에 자연 스럽게 연착륙했을 것이다.
예전부터 그의 소설들을 읽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은 어둠이 일찍 찾아드는 추운 겨울날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하루키 월드는 항상 겨울이었다. 차가운 방 공기는 쓸쓸함을 안겨주면서, 동시에 내 안의 세계에 대한 몰입을 높여준다.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 느끼게 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하루키의 소설과 어울렸다. 그래서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을 때 반가웠다.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캄캄하고 밖에서는 초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치는 밤에 다 함께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소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제 온기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온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설. 어디까지가 자기의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누군가의 꿈인지 경계를 잃어버리게 되는 소설.”(455쪽). 나에게 하루키 세계의 겨울은 항상 따뜻했고, 조금 더 그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잠이 들면 다시 꿈 속에서 그 세계가 펼쳐졌다. 나에게 그의 소설은 "내가 있는 장소를 벗어나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20대 초반의 나와 어렴풋이 재회하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모두 하루키 월드를 묵묵히 지켜가고 있는 무라카미 씨 덕분이다. 60이 넘은 나이든 하루키에 당혹감을 느끼는, 한때 하루키 월드에 빠져지냈던 당신이라면, 이 겨울에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몇 편의 글들이 마음을 데워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이금이 느는 허리도리를 바라보며 또 한 해를 넘기기가 보다 수월할지도 모른다.
* 여기에는 적지 않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 관한 글들은 뛰어난 사회적 통찰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놀랍게 읽었다. 소설가의 관찰력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