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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혜 ㅣ 동문선 현대신서 14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권유현 옮김 / 동문선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굳이 철학적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그 수준에 있어 최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출판사가 동문선이라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편집자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잘 읽혀지지 않는 부분들을 수정하고, 기본적인 번역어를 정리했더라면 이 책의 소중한 내용들이 보다 더 감동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보고, 읽기엔 동문선에서 낸 프랑스 책 번역서들은 읽혀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의 책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 편집이 없다고 생각된다.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면, (그 책이 아무리 난해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런 책들을 막 찍어 낸다는 것은 출판사의 임무방기라고 생각한다. 이건 소비자에게 불량식품을 파는 것과 같다. 동문선에서 판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좋은 책들이 국내에서 이렇게 푸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들이 알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말을 들으면 동문선에 계시는 분들이 기분 나빠하실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책을 구입한 한 명의 소비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고, 그 분들에게 한 명의 ‘타자’로서 최소한의 윤리성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제발 나와 같은 타자들을 ‘무관심한 소비자’로 보지 마시고, 목소리 없는 대상으로 규정하지 마시고, 책과 독자를 좀 더 ‘사랑’해 주시라고 말이다. 나의 이러한 말이 동문선 여러분께 심각한 결례가 되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
번역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원 저작 자체가 워낙 좋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동문선이 어떤 기준으로 책값을 정하는지 모르겠는데, 국내에서 이미 알려진 학자들의 책은 무진장 비싸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의 책은 비교적 싼 것 같다(이것도 판권 가격 차이를 잘 모르는 나의 오해였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 책에 담긴 내용에 비하면, 이 책의 가격은 거저나 다름 없다. 이 책은 사실상 레비나스 철학의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려운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더구나 다른 문학/철학 작품들을 인용해서 현재적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며 글을 전개해 간다는 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도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에세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인생 자랑이나, 말도 안 되는 개똥 철학(개똥을 무시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프랑스의 엣세는 깊은 사유가 글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정말 기분 좋은 독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더구나 상아탑 속의 철학이 현실과 좀처럼 교류할 줄 모르는 우리의 풍토에서, 철학은 현실의 ‘내’ 경험을 성찰케 해주는 하나의 평범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상식적인 사실을 이 책은 잘 증명해준다.
이 책의 내용을 “사랑이란 타자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며, 끊임없이 나에게서 도망가는 타자로부터 나는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지혜란 이 알 수 없고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역자)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은 훨씬 더 풍부하다. 나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거움,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주는 감정의 혼란스러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에 대한 폭력적 대응 양식으로 설명되는 파시즘의 경험 등 이 책은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꺼리를 지니고 있다. 조금씩 나눠 먹어야 제 맛인 음식처럼, 이 책도 여유를 갖고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면서, 글도 옮겨 적어보고 내 생각도 적어보면서 읽게 되는 그런 책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 삶은 왜 이렇게 무료해지고, 무의미해지는 것일까?”라는 고민 중에서 이 책을 만났고, “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이토록 무관심해 지는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기는 커녕 점점 더 폭력적으로 대하는가?”, “파편화된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안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타자에 의한 사랑의 호소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찾아오고, 내 마음을 흔들 때 이것에 대해 무관심 또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다가갈 수 있게 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해소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 때문인가 아니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양심 때문인가. 나의 짧은 지식으로 대답을 구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