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목록‘보다
‘그럴 수도 있지 목록‘이 더 늘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심한 성격이던 지오가 "어떻게 그런 일이!"를 외치며 벌떡벌떡일어날 만큼 풍파를 겪은 자기는 ‘그럴 수도 있지 목록‘이 더많아진 애어른이 된 것 같았다. 스스로 버린 길에 대한 후회와 미련, 안타까움이 쇠스랑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장에 자국을 냈다. 석주의 무의식적인 과시는 그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영동 애들하곤 연락 안 하냐? 너 이러고 사는 거 애들은모르는 거 같던데."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지오가 물었다. 석주는 태호를보고 숨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태호와 있었던 일을 먼저 이야기해야 했다.
"너, 곽태호 기억나?"
석주가 물었다. 지오는 대답이 없었다.
"넌 같은 반이 된 적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그럼 양근석은 알지? 1학년 처음에 같은 방 썼잖아. 그 패거리야."
"근데 걘 왜?"

"너, 그때 자퇴했을 땐가? 안 했어도 기숙사 층이 달라서모를 수 있겠다. 암튼 나 그놈들한테 생일빵 당했었거든."
지오가 아이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석주가 말했다. 석주는 다른 애들이 생일빵을 당하는 걸 보거나 들었지만 자신도 당할 줄은 몰랐다.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해도 자신은 여전히 엄마 아빠의 비호와 영향권 아래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남한테 일어나는 일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아직 모를 때였다.
석주는 다른 애들이 당하는 걸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남의일이라고 생각했고, 공부하기도 바빴다. 그런데 자신이 당하고 나니까 그보다 더한 치욕이 없었고 그다음엔 분해서 공부가 안 될 정도였다. 어른들에게 일러 봤자 소용없다는 건이미 알려진 일이었다. 석주는 공부에 방해되는 감정들을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어떻게 했어?"
지오가 성마르게 재촉했다. 석주는 지오를 더 놀라게 할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뿌듯했다.
현수라고, 방송반 애 알아?"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잘난척 오지게 하던 놈."

"기억하는구나, 현수한테 상준이 생일빵 장면을 찍자고했어."
"뭐? 기숙사에서 그게 가능해?"
지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석주는 지오의 반응이 놀라웠다. 매사에 냉소적인 채 한발 물러나 있던 지오가 이렇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현수 생일이 상준이 생일 다음이었거든. 두려움이 극에달하면 무모한 용기가 생기는 법이잖아."
지오 말대로 잘난 척이 심한 현수는 곽태호 패거리들이공공연하게 벼르고 있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현수는 석주의 제안에 응해 방송반 카메라를 가져다 화장실에 숨어 촬영에 성공했다.
"동영상 갖고 쫄아? 그런 새끼들이 아닌데."
지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들이 아니라 사감하고 딜했지. 사감이 일진 선배였던거 알지? 사과하면 조용히 끝내겠지만 아니면 일을 크게 벌인다고 공갈쳤어. 우리 엄마랑 현수네 아빠가 학부모 운영위원이었잖아. 걔들이 우리 밟는다고 설치는데 사람이 누르는 거 같았어. 동영상 털리면 사람 잘리고 애들도 퇴학 각이

니까. 사감 앞에서 애들한테 사과받고 그 뒤로 다른 건 몰라도 생일빵은 없어졌어."
석주는 지오를 슬쩍 돌아다보았다. 더 큰 걸 기대했었는지 지오의 표정이 허탈해 보였다. 한동안 잠자코 있던 지오가 말했다.
‘마마보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 동영상 찍는 거 그놈들한테 걸렸으면 개박살 났을 텐데."
고등학생 때의 석주는 마마보이란 말이 너무 싫었다. 누가그렇게 부르면 발끈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더는 마마보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호를 보고는 숨었다. 태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뭔가 창피해서였다.
아직 스스로 선택한 삶에 자신이 없는 거다. 그 고백은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좀 겁나기는 했어. 걸려서 터질 각오도 했지. 근데그 새끼들이 생일도 아닌 우리를 때리면 빼박 폭력인 거잖아 그럼 일 진짜 커질 거고, 우리 학교가 자랑하는 태명 3무중 1빠가 뭔지 너도 기억나지? 폭력이잖아."
석주가 동의를 구하며 돌아보자 지오는 시선을 피했다. 석 주는 지오가 지금까지만 해도 많이 들어 준 거라고 생각했

아저씨 말에 지오는 문득 자기도 아버지한테 한 번만이라도,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응원한다는 말을 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든 생각치고는 너무 강렬해 지오는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우찌 지냈나?"
아저씨가 지오를 궁금해했다. 오는 내내 자기 삶을 더듬어 봤기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지리멸렬이죠, 뭐. 스무살 넘으면 빛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네요."
지오는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지리멸렬‘이란단어만큼 자신의 현재와 딱 들어맞는 말도 없는 것 같았다.
"어데 제절로 나는 빛이 있나. 지오니, 이른 봄 얼음 녹을때 냇가에 가본적있어?".
아저씨의 물음에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지오 머릿속에영화나 소설 등에서 본 이미지들이 조합돼 이른 봄, 얼음 녹을 때의 냇가가 펼쳐졌다.
"물가에 있어 보마 깨진 얼음장이 흘러가다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어, 돌에 걸리거나 수면이 갑자기 낮아져가얼음장이 곧추설 땐 기여. 그때 햇빛이 반사돼가 빛나는 긴

데 그 빛이 을매나 이쁜지 모린다. 얼음장이 그런 빛을 낼라카마 우선 깨져야 하고 돌부리나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않아야 하는 기여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우연으로 시작해서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기라. 사는 기 평탄할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마 그제사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지."
말을 마친 아저씨는 열무 줄기에서 연두색 벌레를 잡아 원두막 옆 수풀로 던졌다. 열무 잎에는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인듯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다. 벌레가 열무 줄기에서 산 삶의 흔적이었다.
정욱 패거리들이 쫓아왔다. 도망치다 보니 그 아이들은근석 패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금방 뒷덜미가 잡힐 것 같은네 다리에 쇳덩이가 매달린 듯 무거웠다. 결국 아버지 손아귀에 잡히려는 순간 지오는 소스라쳐 깼다. 진짜로 달린 양헐떡이며 낯선 주위를 둘러보던 지오는 예전에 석주와 함께샀던 그 방에 있음을 깨달았다.
지오는 잠을 깨운 다리 위의 중압감을 떨쳐 내며 일어나앉았다. 지오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자던 석주는 머리가 바닥

"그전에 난 항상 먼 미래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같아. 근데 여기선 그럴 수가 없어. 나무들은 필요한 걸 제때에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 서은이랑 비슷하다. 서은이는어른들이 어떤 상황이든 저 하고 싶은 걸 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너도 떼쓰는 거 봤지? 휴, 걔 아무도 못 당한다. 처음엔 너무 버릇없는 거 같아서 걱정되는 거야. 그런데 가만히보니까 그때그때 저한테 필요한 걸 원하는 거더라고, 나무가 자라려면 필요한 게 있듯이 그 애도 자기가 잘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 난 서은이를, 미래만 보면서 살았던 나 같은 애가 아니라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알고, 또 하면서 사는 애로 키우고 싶어. 나무가 서은이 같다고 생각하니까 일하는 게 나름 재밌어."
힘들지 않느냐는 지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삶의 진실을 깨달은 것 같은 말들이 어쩐지 비위에 거슬리던 게 기억났다.
석주는 여기 파묻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석주는 의대를 지망하면서도 의사가 된 자기모습이나, 어떤의사가 되고 싶은지는 그려지지 않았는데 사과나무를 키우면서는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해졌다고 했다. 그 일은 과일 품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지오는 졸렬한 질문에 석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의 폭음은 어쩌면 석주로부터 후회한다는고백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는자신을 잊기 위해서였다는 게 더 맞았다.
지오는 벽에 기대앉아 잠자는 석주를 내려다보았다. 생뚱맞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불행하다‘란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불행한 가정들을 집대성해서 그려 놓은 듯한그 책은 한창 가정사 때문에 괴롭던 지오의 마음을 달래 주던 책이었다. 지금은 잔뜩 웅크린채 잠든 석주의 모습이 위안을 주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지오의 질문에 대한 진정한대답인 것 같았다. 지오는 불안하고 외로워 보이는 석주에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런데도 가슴 저 깊숙이 뿌리내린 열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오는 나가서 담배를 피울까 하다가 술은 물론 잠까지 완전히 깰 것 같아 참았다. 정신이 맑아지면 다시 잠들지 못할것 같았다. 

"이른 봄, 얼음 녹을 때 냇가에 가본 적 있어?"
깨진 얼음장이 흘러가다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이 있어, 돌에 걸리거나 수면이 갑자기 낮아져 얼음장이 곧추설 때야. 그때 햇빛이 반사돼 빛나는 건데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지 몰라. 얼음장이그런 빛을 내려면, 우선 깨져야 하고 돌부리나 굴곡진 길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

지오는 자신을 이른 봄, 햇살이 내리쬐는 시냇가로 데려다 놓았다.
깨진 얼음이 곧추선 채 빛나는 그 순간으로.


우연으로 시작해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빛나는 인생에 대하여

이금이 청소년문학
청소년들의 ‘지금과 여기‘를 살피고, 꿈과 미래를 힘껏 응원하는이금이 작가의 청소년문학 시리즈입니다.

유진과 유진 
이름이 장편소설책으로 따뜻한세상만드는 교사들 추천도서 어린이도서연구회 청소년 권장도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청소년 추천도서  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도서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 책 책 읽는 서울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선정 도서  부산시교육청초중고 권장도서  교보문고 선정 마음에 힘을 주는 책  알라딘 독자 선정 청소년문학최고의 책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권장도서  창비어린이 선정 올해의 책 학교도서관저널 「성과 사람 366, 선정 도서  학교도서관저널 추천 성장소설 50선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선정 어린이·청소년 평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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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이금이 소설집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우수문학도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 추천도서 대한출판문화협회 선정 올해의 청소년도서  창비어린이 선정 올해의 책 아침독서청소년 추천도서  네이버 북리펀드 선정 도서

안녕, 내 첫사랑 이금이 장편소설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 추천도서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어린이자료분과추천도서  경기도학교도서관사서협의회 추천도서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선정 우수도서 인터넷교보문고 어린이책 AWARD 선정 도서  소년조선일보 추천도서 아침독서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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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땅에서, 우리 이금이 장편소설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추천도서 아침독서 청소년 추천도서  네이버 리펀드 선정도서

얼음이 빛나는 순간 이금이 장편소설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너도 하늘말나리야 이금이 장편소설초등학교·중학교 국어 교과서 수록 책으로 따뜻한세상만드는 교사들 추천도서 어린이도서연구회 권장도서 책읽는교육사회실천협의회 추천도서  한국출판인회의 선정이달의 책  서울시교육청 교과별 권장도서  경기도교육청 독서감상문 경시 대회 선정 도서  부산시교육청 독서인증제 권장도서  중앙일보 선정 좋은 책 100선

소희의 방 이금이 장편소설한국도서관협회 선정 우수문학도서  한겨레예스24 선정 청소년책 30선 아침독서추천도서  네이버 북리펀드 선정 도서

숨은 길 찾기 이금이 장편소설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청소년 추천도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선정 세종도서 아침독서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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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칠 때마다 근육이 아깝다, 당장 돈 버는 일보다 더중요한 게 있지 않냐 같은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싫은 소리 하시는 건 줄만 알았는데…. 노미야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기대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야. 표현 방법이 거칠어서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몰랐던 게 당연하지. 나도 그랬는걸."
시바는 다정한 말투로 "사람의 속마음은 원래 알기가 어렵잖아" 하고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만으로 판단하면 큰 착각을 하게 되지. 그럼 대체 뭘로 판단하나 싶겠지만, 

내 생각에는 행동 아닐까싶어. 

우라타 씨는 정말로 우리 가게에 오는 게 즐거우셨을거야. 그도 그럴게, 매일 제일 먼저 오셨잖아, 노미야한테 이런저런 뾰족한 말을 했던 것도 분명 우라타 씨 나름의 응원이었을 거야."
노미야가 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라타 씨 생명에도지장 없고, 회복하면 곧 말씀도 하실 수 있을 것 같거든,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한번 해 봐도 좋지 않을까?"

어때? 
시바가 미소를 머금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노미야의 깍지 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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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몰아쳐 배가 요동치는데 나침반이 한 곳만 향한다면 그것은고장난 것이다. 나는 좌우 합작의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입니다. … 내 나이 73,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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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선생의 성은 조 씨이고, 이름은 광조이며, 자는 효직이고 스스로 정암이라 이름하였다.
조 씨는 한양의 이름난 성인데, 7대 조인 양기가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 총관이 되었다. 원 세조 때 부수로서 단 군대를 쳐부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도포와 띠를 주어 격려하였다. 고조의이름은 온_인데, 본조의 개국공신이 되어 한천 부원군으로 책봉되었고, 시호는 양이었다. 한천이 영뒤에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참판이 성균관사예손을 낳으니, 뒤에 예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판서가 원장을 낳으니, 벼슬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이 자가 선생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스로 현감 민의 딸인데, 성화 임인년1482 성종 13 8월 10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좋은 자질을 타고나, 어렸을 때도 장난치며 놀지 않아 이미어른의 풍채와 태도가 있었고, 조금이라도 남의 잘못을 보면 즉시 지적해서 말하였다. 성장하여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을 줄 알면서부터는의연하게 큰 뜻이 있으나 과거 보는 글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성현의 위풍을 사모하여 넓게 배우고 애써 행하여서 이룩함이 있

기를 기약하였다.
열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있으면서 지성으로 안색을 살펴 봉양하여 효성스럽다는 칭찬이 나라에 드러났다. 정덕正德 경오년 1510. 중종 5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 신미년 1511 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을해년1515 여름에 조정의 신하가 효렴으로 천거하여 조지서 사지에 제수되었다. 이 해 가을에 중종이 실시한 알성별시에 응시하여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감찰·예조좌랑·사간원정언으로 옮겼다. 장경왕후의 상에 담양 부사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함께 상소하여 신 씨의 왕후의 위를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이들이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 여겨 체포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되자, 선생만이 극력 간쟁하기를, "신 씨는 실로 복위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에서 논한 것 또한 일리가 있으니, 죄를 주어서 언로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다. 두 공은 이로 말미암아죄를 면하였다.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 교리, 응교, 전한을 지냈다. 정축년1517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모두 "옥당호의 장이 되어 임금의 덕을 기르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여 겨울에 옥당으로 돌아와서 부제학이 되었다.
주상께서 평소 유학을 숭상하고, 문치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우삼대처럼 번성하기를 바랐으므로, 더욱 선생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선생은 이에 세상에 보기 드문 대우에 감격하여서 임금을 존경

받게 만들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유학을 번성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임금의 마음은 다스리는 근본이 되므로, 그근본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가 의지하여 서지를 못 하고, 교화가이로 인해 행해지지를 못한다"라고 하여 입대할 때마다 반드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엄숙히 하여 신명을 대하는 것과 같이해서, 아는 것은 다 말하였고, 말할 때는 충직하게 하였다.
주상께 경계할 것을 진언한 말에,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천지와 같이 크고 춘하추동과 더불어 운행합니다. 그런데 그 이가 욕심에 가려져서 큰 것이 작아지고, 기가 사욕에 얽혀서 운행하는 길이 막힙니다. 보통 사람에게도 그 피해를 이루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임금은 지위가 높아 교만하고 방탕하기가 쉬워서 아름다운 소리와 여색 유혹이 보통 사람보다 만 배나 더한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마음이 한 번 바르지 못하고 기운이 한 번 순하지 못하면 재앙의 징조가 어두운 중에서 상응하고 재앙의 싹이 밝은 곳에서 일어나서 인륜은 막히고 만물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대개 이러하니, 주상께서 하늘을 섬기는 데 마음을 두어서 마땅히 중화의 지극한 공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정의와 사리, 왕도와 패도의 구별과 고금의 성쇠하는 징조와 군자·소인의 거취와 성패에 관한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속에 품은것을 상세히 논의하고 극진히 말하였다. 어떤 때는 해가 기울어질 때까지 하였다. 임금이 겸허한 마음으로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고, 날마다 더욱 장려하였다.
무인년1518 봄에 조정에서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얻고자 하

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으나 오랫동안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만약에 이 법을 행하면 인재를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에서 옥당과 함께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임금이 여러 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정원에 나아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허락을 얻지 못하면 물러갈 수 없다" 하였다. 저녁이 되어 대간은 다 물러갔는데도 옥당은 그대로 머물러서 논계하여 허락을 얻은 후에야 나왔다.
전에 회령부 성 주변에 살던 야인 속내가 몰래 깊은산중에 있는 야인과 공모하여 갑산부의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많이 약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도 병사가 올린 비밀 장계에 따라 먼저 밀지를 보내 함경도에 유시하고, 이지방을 파견하여 틈을 엿보아 덮쳐서 법에 따라 처치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선정전에 거둥하여 파견하려던 때 장수와 재상과 모든 신하가 둘러 모시고 있었다. 선생이 밖에서 들어와 임금을 면대하기를청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도적이 교활하게 속이는 꾀와 똑같으니,
왕으로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도리가 아니고, 또 당당한 큰 나라로서한 조그마한 오랑캐를 사로잡는데 도적의 꾀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욕되게 하고 위신을 훼손하는 것이니, 신은 내심 부끄럽습니다"라고했다.
임금이 즉시 다시 의논하도록 명했다. 좌우의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병가에는 모략과 정도가 있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에는

경도와 권도가 있습니다. 중의가 이미 같은데, 한 사람의 말때문에 갑자기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밭 가는 것은 마땅히 남종에게 묻고, 베 짜는 것은 마땅히 여종에게묻습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정상을 실로 다 압니다. 신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임금이 선생을 대우한 것과 선생이 임금의 마음에 든 것이 다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선류로서 같이 선발되어 임금의 우대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서로 함께 협력하여 사업을 일으켜, 오래된 폐해를 없애고 교화를 닦고 밝혀서 옛날 현철한 왕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하였다. 《소학》을 인재를 기르는 근본으로 삼고, 향약을 풍속을 교화하는 법도로 삼으니, 모든 관리가 자각하여 힘쓰고,
모든 사람이 분발하였다.
그러나 여러 공이 너무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여, 모든 건의하고 시설하는 데 있어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는가 하면 장황하고 과격하였다. 또한, 젊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유리한 기회를 노려 시세에 영합하는 분란을 부추기는 자들이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다. 옛 신하 중에는 시대의 의론에 용납되지 못해 이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선생이 일찍부터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을 보고 도가 행해지기 어려울 것을 알아서 오래전부터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이 해 겨울에임금이 특명으로 선생을 가선대부로 올리고, 사헌부 대사헌 겸 세자좌빈객 동지성균관사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

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여 극렬 간절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은 갈수록 융숭해져서 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선생이 끝내 사양을 허락받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얼굴가득 근심스러운 빛을 띠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고 운운하였다. 기묘년 1519 봄에 김우증이란 자가 사람을 거짓으로 꾸며모함하는 일이 있었다. 일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심문하는데, 선생이사헌부의 장으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 양사에서 선생이 김우증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논박하여 파직시켰으나, 곧 정부가아뢰어서 다시 유임되었다.
그 후에 조정의 의논이 정국공신 중에 공이 없는 자에게 함부로주었던 녹권공을 기록한 문서을 추탈하게 되었는데, 선생이 또한 그의논에 동참하였다. 이때 선생이 이미 물러갈 수도 없게 되었는데,
기강을 세워 탐욕한 자를 물리치고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명령하면시행되고 금지하면 그치게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시세를 돌아볼 때 그때는 크게 근심될 만한 일이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일에 임하여는 조금 조화하려는 뜻을 가지지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에 신상이자, 권벌의 의견이 다 그러하였으니, 이것은 곧 시대를 따르는 의리로써 중도가 아님이 없었다. 그런데도 저과격하고 경솔한 무리는 도리어 선생이 정도에 어긋난 것을 따라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여 그 자취가 간사한 무리와 같다고 하여 여러 번 배척하고 탄핵하였다. 선생은 전날 원망하던 모든 사람이 곁에서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날마다 틈을 노리는 것을 알지 못하였

다. 큰 화가 갑자기 신무문을 여는 변으로까지 되었으니, 슬프다,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그날의 일은 당연히 국가 문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나, 영의정이면서 임금의 옷깃에 매달려 간해서 그 정성이 하늘에 감동되어 다행히 벼락같은 위엄을 조금 그치게 하였다. 그러나 유도들이 궐문을 지키고 울부짖으면서 다투어 의금부에 갇히고자 한 것은, 참소하는 자들에게 더욱 구실을 주었을 뿐이다. 이것은 소식이 자기를 구제하려는 장방평張의 소를 보고 놀라서 탄식한 것과 같다.
선생은 10월 어느 날 능성으로 귀양 갔고, 후명後 최후에 죽음을 내리는 명이 이른 것은 12월 20일이었다. 선생이 곧 목욕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조용히 도사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내리시니마땅히 죄명이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죄명을 공손히 듣고 죽겠노라" 하니, 도사의 대답이 없었다.
선생이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와 같이 하였으니, 하늘의 해가 나의 속마음을 비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이었다. 이듬해 모월 어느 날에 용인현 어느 동리 선인의 묘소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특이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마치 화려한 난새가 머무르고 고상한 고니가 우뚝 선 것과 같고, 옥같이 윤택하며 금같이 순수하고, 또 무성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밝은 달이빛나는 것과 같았다. 17, 8세에 분연히 도학을 공부할 뜻을 가졌다.
그때 참판공아버지이 어천 찰방이 되었는데, 때마침 한 김 선생김굉필이 희천에 귀양 가 있었다.

선생이 본래 한훤의 학문이 근원이 있음을 들었으므로, 그곳으로가서 부친을 모시고 있으면서 한훤에게 찾아가 종유하며 학문하는큰 방법을 들었다. 대개 우리 동국의 선현 중에 도학에는 비록 문왕같은 성군을 기다리지 않고도 창시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는절의·장구·문사를 닦는 데 그쳤다. 진실로 실천하는 것으로서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이는 오직 한훤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능히 험난함을 무릅쓰고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비록 그 당시 강론하고 주고받은 뜻은 직접듣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이 그 후에 그처럼 도학을 공부하는 정성과업적이 탁월한 것을 보면 그 발단이 진실로 여기에 있었다. 우선 볼수 있는 실정만으로 말하면, 학문하는 데 있어 《소학》을 독실하게 믿고 《근사록》을 존중하여 모든 경전에 적용하였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는 밤낮으로 몸가짐을 살피고 삼가서 의젓하고 엄숙하여 의복과 태도가 조금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았다. 말씀하실 때나 행동을 하실 때는 반드시 옛 훈계에 따랐으니 아마도지경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언젠가 천마산에 들어갔고, 또 용문산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 여가에 꼿꼿이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대하는 것과 같이해서 본심을 함양하기를 힘쓰는 것이 남이 미칠 수 없었다. 아마도 꿋꿋하게 애써 정을 주로 하는 학문을 하였기때문이리라.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마다 가묘에 절하고, 어버이를 봉양하고 뜻을 어김없이 받드는데 모두 곡진하였다. 집을 바르게 다스려서 안과 밖의 분

별이 엄하였고 사랑과 훈계를 같이 베풀었다.
깨끗한 절조로 자신을 갈고닦고 몸가짐을 빈한한 선비와 같이하였다. 언젠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랏일을 전심하여 집안일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고는 가정 살림에 신경 쓰지 못했으며, 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거마비를 받지 않았다. 자신을 살피고 사욕을이겨내는 데에는 항상 남이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다. 젊은 날 우연히 여색을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으나 곧 물리쳐 피하였고, 더욱 술이성품을 해친다는 경계를 지켜서, 친구가 술을 마시고 체통을 잃는 것을 보면 준절하게 책망하였다.
상중에는 지극히 슬퍼하고 제사에는 정성껏 공경을 다 하였으며,
후생은 각각 그 재질을 따라 장려하여 이끌고, 이단을 물리칠 것을 논하되, 먼저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평소의 행동이 널리알려진 데다 재주가 세상을 영도하기에 충분하였고, 영특한 기품이밖에 드러나니, 풍모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일찍이 하련대에 임금이 앉았을 적에, 선생이 대사헌으로 시종하다가 일이 생겨서 몸을 빼 나가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몸을구부리고 앞으로 지나기도 하였는데, 그 몸가짐을 바라보고 백관이다 주목하였다. 교문橋에 둘러섰던 자가 감탄하며 말로 표현할 바를 몰랐으니, 한 시대의 존경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지워 우리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우리 백성을 어질고 편하게 사는 지경에 오르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충성은 금석을 뚫고, 그 용맹은분육 전국시대의 장사보다 뛰어났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왕의 일만을 생각하는 신하로서

착한 임금의 성대한 시대를 만나, 조정에 나아가서는 날마다 세 번씩알현하고, 물러나서는 사람들이 다투어 손을 올려서 존경하였다. 이는 상하가 서로 기뻐하여 천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좋은 때라고 할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서 하늘이 그 사이에 마가 들게 하여 위로는 그뜻이 크게 행하여지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혜택이 넓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이것은 시대의 운수와 나라의 액운과도 관계되니 천지에 유감된 일이며, 귀신이 농간을 부린 것이니, 선생인들 어찌하리오, 더욱이 선생은 언젠가 상사 허백기와 함께 "철없는 젊은이들이 세속을 놀라게 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수재 성수침을 만나서는 향약의 실행하기 어려운 점을 근심하였으니, 자신의 맡은 일은비록 중대하였지만, 고집해서 반드시 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가 사헌부의 대사헌 자리를 힘껏 사양하다가 허락받지 못했을때 그처럼 깊이 근심하였고, 기준이 언젠가 산림에 홀로 갔으면 하는탄식을 하니 자주 칭찬하며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을 보면, 물러서기어려울 때 용감하게 물러서는 것은 평소 선생의 뜻이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사대부를 대우함이 예전 의리를 따르지 않아서물러가기를 구하여 허락을 얻은 예가 없고, 신하가 벼슬에서 물러가는 길이 끊겨, 한 번 조정에 서면 병으로 폐하거나 죄로 물러나는 것외에는 국사를 떠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비록 선생이 화합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도모하고, 기미를 보아 일어나고자 했으나, 어찌 자기 뜻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미 선생이 물러나려는 뜻을 이루지못했으니, 또 어찌 화가 오는 것을 지혜와 피로써 면할 수 있었겠는

가. 이것이 선생의 더욱 어려웠던 점이다.
그러나 일월의 빛은 전처럼 가렸던 구름이 사라지면 밝아지고, 의리의 감정은 오래될수록 더욱 시비의 판단이 명백해지기 마련이다.
중종이 말년에 하늘의 뜻을 통찰하고 여론도 선생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여, 실로 이미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묘당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중종의 뜻을 따라서 선생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아아, 천도는 본래 바르고 인심은 진실로 속이기 어려운 것이니,
요 임금이 뜻했던 바를 순 임금이 이어받아 실행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선비의 학문은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다스림은 이로인해 거듭 밝아질 수 있었다. 도학은 이에 힘입어 타락하지 않을 수있었다. 나라의 기맥도 이에 힘입어 무궁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당대의 사람의 화는 비록 슬프다 하겠으나, 선생이 도를 높이고 학문을 창도한 업적은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가지의 말이 있으니, 주나라가 쇠망한 이래로 성현의 도가그 당대에는 행해지지 못했으나, 만세에는 행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것이다. 대개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덕과 재주는 그것을 써서 왕도를 일으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인데도 결국에 성취된 것은 교훈을 세워서 후세에 남기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것은 본래 알 수 없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도 역시 일괄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선생이 추구한 도를 이미 공자·맹자·정자· 주자의 도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세

상에서 큰일을 못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다만 벼슬길에서 물러나 그 도의 실상을 크게 천명하여 우리 동방의 후세 사람들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또 대개 하늘이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 어찌 젊을 때한 번 이룬 것만으로 대번에 만족하게 여기겠는가. 필시 중년과 말년에 풍족하게 공을 쌓은 후라야 자격이 크게 갖추어진다. 가령, 선생이 애초 성세포에 갑자기 등용되지 않고 집에서 한가히 지내며 궁벽한 마을에 숨어 살며 더욱이 학문에 힘을 다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이 연구했더라면, 연마한 것이 관철되어 더욱 고명해지고, 수양한 것이 높고 깊어 더욱 넓고 해박해져서 환하게 낙건 정자와 주자의 근원을 찾고, 수사 중국 산동성의 강 이름, 즉 공자를 말함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개 이처럼 되었더라면 당대에 임금으로부터발탁을 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믿는 것은 이 도와 이 사람의 처지가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한 가지 일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선생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첫째불행은 등용되어 발탁된 것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것이고, 둘째불행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것이고, 셋째 불행은 귀양 가서 일생을 마친 것이어서 앞에 말한 중년 말년에 풍족하게 공부할 만한 겨를이 없었다.
교훈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사람에게 큰 책임을 내린 뜻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이 때문에 오늘날 선생이 남긴 것을 찾아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하고 바른 학문을 열어 주는 방법으로 삼으려 하여도, 의거할 만한 단

서가 거의 없었다. 헐뜯는 무리의 끝없는 담론이 화복과 성패의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여 세도가 더욱 투박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멋대로 지목하여 서로 헐뜯자, 몸조심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꺼리고, 자식을 가르치는 자는 이를 경계로 삼았다. 선량한 이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게 되어서 더욱 우리도에 병폐가 되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실로 요 임금의 유지를 순 임금이 계승하여 이 도학을 보호하고 나라의 기백을 길이 이어가게 하는 장한 뜻이겠는가. 이것은 또 뒤에 오는 어진 임금과 현명한 재상및 무릇 세상을 다스릴 책임을 진 자가 마땅히 깊이 근심하고 영구히 거울삼아서 힘써 구제할 점이다.
그러므로 몇 년 전부터 태도를 바꾸어서 새롭게 혁신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하게 보인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선비된 자가 여전히 왕도를 높이고 패술을 천하게 여길 줄 알며, 바른학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며, 정치하는 도리를 반드시 몸을 닦는 데에 근본을 두어서, 모시고 심부름하는 것으로부터 이치와 성性을 연구하는 데 이르게 되어서 점차로 분발해 일어나서 하고자 하는것이 있게 되었다. 이것이 누구의 공이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하늘의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겠고, 성조의 교화가 여기에서무궁하게 될 것이다. 선생의 아내는 첨사 이윤형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이는 정인데 일찍 죽었고, 막내는 용인데 지금전주의 판관이다. 선생이 돌아가실 때 두 아들이 다 어렸고, 또 세상을 두려워하여 피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선생의 뜻과 행적을 기술

하는 일을 오랫동안 부탁한 일이 없어서, 사람의 이목에 남을 사적이점차로 인멸되기에 이르렀다.
행장 하나를가중간에 상사숨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사람 홍인우지었는데, 지난해에 판관 아들이 그 종질인 충남 보내와서 홍을상사가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비석은 이미 마련되었으니, 명문을 지어 묘 앞에 표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내가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비문을 짓고자 하면 마땅히먼저 행장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홍상사가 지은행장을 보니 너무간략합니다. 반드시 다시 널리 방문하여 많은 사적을 찾아내고 당대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행장을 보완한 후에 천천히 비문을 만들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근래에 판관이 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고, 아울러 《음애일록》등 두 가지 서적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사적을 더 찾을 수가 없고, 사방으로 돌아보아도 저의 선인을 위하여 기꺼이 붓을 잡을 자가 없으므로 감히 두 번 세 번 번거롭게 청합니다" 하였는데 사정이 매우 애처로웠다. 내가 혼자,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에게 받은 영향은 많은데, 이미 비명을 사양한 데다 또 행장을 짓지 않는다면, 어찌 정이 지극하면 일이 따른다고 하겠으며, 또홍 상사는 학문에 뜻을 둔 선비요, 또 선생과 한 동리 사람이니, 그행장이 비록 간략하더라도 필시 증거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적은 것을 바탕으로 하고 나중에 얻은 서적을 참작해서 가감하여 이 글을 지었다. 이는 우선 조금이라도 판관의 효성에보답하고자 해서요, 또 이어서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행장을 완성하는 자료로 삼고자 해서이다. 만약 이것이 뒷날 사필 잡는 자의 참고가 될지라도, 선생의 학문과 사업, 언론과 풍을모가 사책史에 실려 있고, 추모하는 노래에 스며 있는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니, 어찌 이 행장에만 국한되겠는가.

가정 43년 갑자1564 0월 0일진성 이황이 삼가 적다출처: 한국고전종합DB 퇴계 선생문집 제48권 ‘정암 조선생 행장‘

ⓒ 한국고전번역원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공역)

조광조 가계도

1세(시조) 조지수(趙之壽): 한성부 출신으로 고려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냄.
2세 휘(㎜): 원에서 쌍성군총관을 제수함.
3세 양기(): 고려 총관 벼슬을 지냈고, 김방경을 수행해 일본군을 정벌하고 무사히 귀환했고, 합단병 토벌에 나서서 공을 세움.
돈) 홍건적 격파로 일등공신에 올랐고, 예의판서로 검교 밀직부사였고, 용성군에 봉해짐.
5세 인벽:보리공신으로 용원부원군에 봉해졌고, 고려 공민왕 때 사망했지만 조선 건국에 공이 있는 아들 온으로 인해 좌명공신 우정승 한산백에 봉해짐.
6세 온 : 조광조의 고조로 조선 개국공신으로 한천부원군에 봉해짐.
7세 육(): 조광조의 증조로 의영고사를 지냄

8세 충손(): 조광조의 할아버지로 성균관사예를 지냄.
9세 원강: 조광조의 아버지로 감찰을 지냄.
10세 광조(祖)

[조광조 연보]

1482년(성종 13년 8월 10일한성부 향교동 동지제지금의 서울 종로구 경운동 18번지에서 아버지 조원강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남.
● 1486년(성종 17년)놀고 장난함이 성인의 거동과 도량이 있었으며, 예 익히기를 좋아하고, 어김있는 자를 보면 어른일지라도 풍자하여 멈추게 함.
● 1498년(연산군 4년)열일곱 살 나이에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갑자사화로 희천에서 유배 중인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서 사사.
ㅇ 1499년(연산군 5년)열여덟 살 때 한산이씨 이윤형 딸과 혼인.
1500년(연산군 6년)부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름.
1502년(연산군 8년)부친 삼년상 마치고 용인 선영 아래 서너 칸짜리 집 짓고, 소학, 근사록, 사서,
동감강목 등을 읽으며 공부에 전념.
1504년(연산군 10년)배소를 순천으로 옮긴 스승 김굉필 사ㅇ 1506년(중종 1년)중종반정으로 연산군 폐위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중종에 즉위.
1510년(중종 5년)봄: 진사시 합격하고, 5월에 천마산 성거산 두산에 가서 소요함.
여름: 송도 개성의 여러 산 다니며 글공부.

0 511년(중종 6년)모친 민 부인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름.
1514년(중종 9년)경원 임지로 떠나는 삼촌 조원기에게 시와 서 증정하자 삼촌은 조광조에게학문에 힘쓰기를 권장하는 글을 줌.
ㅇ 1515년(중종 10년)아들 정 출생.
봄: 양평 용문사에서 글공부,
여름: 성균관 추천으로 이조 선무랑에 준하는 주부직 제수,
가을: 안성시에서 을과 장원전체 차석 급제, 성균관전적 제수.
11월 : 사간원 좌정원 제수됐으나 박상과 김정의 상소에 대해 죄 주는 것이 언로를 막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사간원 관료들 파직 상소.
1516년(중종11년)봄: 이조정랑,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제수겨울: 계심잠 지어 올림.
1517년(중종 12년)지방에서 도학 정치 확대 위해 교리로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
향촌의 상호 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함. 향약을 보급하는방법으로 기존 훈구세력들이 장악한 지방에 향음주례나 향사례의 실천을 중시하고, 소학을 실천할 것을 주장함.
2월 홍문관 교리 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주서 등 5품관으로 승진.
7월: 응교정4품관 승진.
8월: 정몽주 · 김굉필에게 벼슬과 시호 및 문묘 종사 청함.
1518년(중종 13년)정원: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승진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말에서 떨어져 다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문병하고 치료함.
3월 : 조정에서 현량과 설치 건의 및 실시.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이동.
7월 소격서 철폐 건의 상소

11월 가선대부 정2품관 동지성균관사 제수, 사헌부 대사헌 겸 원자 보양관으로 이동.
1519년(중종 14년)아들 용 태어남6월: 장인 이윤형 상을 당하여 임금에게 허락을 얻고 장례 치름.
7월 : 병으로 사임 요청하였으나 불허됨.
11월 : 정국공신 공훈 삭제 단행, 기묘사화로 귀양.
12월 : 사사1520년(중종 15년)봄에 용인 심곡리 선영으로 이장하여 장례식.
○ 1545년(인종 원년)복직.
ㅇ 1557년(명종 12년)같은 산 서쪽으로 옮겨 이 해에 사망한 부인과 합장.
ㅇ 1568년(선조 원년)O3월: 태학생 홍인헌 문묘 종사 청원4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영사관상도감 추증.
ㅇ 1569년(선조 2년)시호를 문정공으로 내림.
1570년(선조 3년)능주에 죽수서원 설립하여 조광조 배향.
ㅇ 1573년(선조 6년)양주에 도봉서원 설립.
1581년(선조 14년)이이이황과 더불어 문묘 종사 청원.
ㅇ 1605년(선조 38년)심곡서원 설립하여 조광조 배향.
ㅇ 1610년(광해 2년)문묘 종사

"대도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이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 · 과부 ·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떤가.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표로 두고 싶은 사회가 아닐까 싶다. 조광조 역시 정치적 목표를 여기에 두고 있음은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책문은 미리 알고 있는 물음처럼 친숙했다. 물론 그 답을 찾는 것은 별개의 일이겠지만, 
조광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보다는 궁구하던 화두이기에 접근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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