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삶이 ‘망‘이라는 한 글자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말인가! 얽매이고 구속받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상은 무조건 물리쳐야 할 해악인가?
그렇지 않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지배당한 조선 사대부에게는 마음을 제멋대로 풀어놓는 상태인 ‘방심‘, ‘잡념,
‘‘망상‘, ‘상념‘이 자신을 망치는 가장 해로운 적이었다. 그러나 성호학파의 문인 이학규(李學)는 오히려 망상을 통해절망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와 활력을 찾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망상 덕분에 유배지에 갇혀 있는이 몸도 크게는 온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작게는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터럭 끝까지도 헤매고 다닐 수 있다고, 망상을 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할 만하다고. 만약 지금 마음속 한 가닥 망상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의 삶은 불씨가 죽어 버린 잿더미처럼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영원히 살아 움직임을 증명할 수 있는것은 망상에 있을 따름이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얽매이고 구속당하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른바 ‘망상예찬‘이다. 망상이 있어야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비로소 사상의 한계와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 무한과 무궁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망상이 없다면

사상의 한계와 사유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망상하고 또 망상하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삶이 바로 그 망상 속에 있다.

망과 망상무릇 사람이 스스로를 포기해 제 한 몸 공경하지 않는 자는 어렸을 때부터 해가 뜨면 일어나 망령된 말과 행동만 한다. 한가로이 홀로 앉아 있으면 망령된 생각이 번잡하고 어지럽게 일어난다. 잠자리에 들면 밤새도록 망령된 꿈을 꾼다. 끝내 늙어 죽을 때까지 ‘망(妄)‘이라는 한 글자로 평생을 마치고 만다. 아아!
슬프다.
凡人之暴棄 不自敬身者 自幼時日出而起 妄言妄事 閑居而獨坐 妄思粉拏 寐則終夜妄夢 至老死不過以妄之一字了當平生 塢呼悲矣.
- 이목구심서 1망상이 분주하게 일어날 때는 구름 한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쳐다보자. 온갖 잡념이 일시에 사라질 것이다. 바로 정기(正氣)가 돌기 때문이다.
妄想走作時 仰看無雲之天色 百慮一掃 以其正氣故也- 이목구심서 2

아첨하는 사람

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고 아양떨며 일생 동안 남을 기만하는사람이 있다고 하자. 비록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꾸미는 데 익숙해져 스스로 편하거나 이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막고 가란것이 아주 얇고 좁아 감추려고 할수록 더욱 드러날 뿐이다. 제아무리 애써 봤자 고생스럽기만 할 것이다.
很有巧詐超響 一生騙人 雖慣於粉餚 自謂便利 然其障蔽於人者 甚薄我預定隨境 極芬苦战- 이목구심서 3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는 짓에도 최상과 중간과 최하의 등급이 있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하게 하고, 명예나 이익에 초연하고, 상대방과 사귀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척하는 인간 부류는 최상 등급이다. 간곡하게 바른 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활용해 뜻이 통하도록 하는 인간 따위는 중간등급이다. 발바닥

이다 닳도록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돗자리가다 떨어지도록 뭉개고 앉아 상대방의 입술과 안색을 살피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좋다고 하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조건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이런 아침은 처음 들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자꾸 듣다 보면 도리어 싫증이 나는법이다. 그러면 아첨하는 사람을 비천하고 누추하다고 여겨끝내는 자신을 갖고 노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인간들은 최하 등급이다. 박지원이 스무 살 무렵 세태를 풍자해 지은 소설 「마장전(馬傳)」에 나오는 말이다.

몹시 서글픈 일해진 솜의 터진 옷솔 틈에는 반드시 이(蝨)가 떼를 지어 모인다. 황폐한 담장과 오래된 부엌에는 반드시 쥐가 집을 짓는다.
여우가 요염하게 묘사를 부려 사람을 흘리는 것은 반드시 김숙한 숲의 어둡고 음산한 곳이다. 올빼미의 울음소리는 반드시어두운 밤 으슥하고 캄캄한 곳에서 나온다. 멀리 떨어진 굴속에는 도적들이 무수하게 모여든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사당은 귀신과 도깨비의 보금자리가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밝은 해가 환히 비치면 그 어두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취를 몰래 숨길 수 없게 되고 조금이라도 음산하고 어두운 계교를 부릴 수 없게 된다. 무릇 소인은 눈을 휘둥그렇게뜨고 희번덕거리면서 눈짓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교활함과 거짓됨이 마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처럼 한다. 평소 말을 내뱉을 때조차 항상 그 은밀하고 컴컴한 것이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재산을 경영하고 자기 몸을 살찌게 하는 일과 물건을 손상하고 사람을 모함하는말 속에 숨어 있는 그 음흉함과 교활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몹시 서글픈 일이다.

有色炒灣 必把黑夜之管暗也 精室遼枪 盜賊之藝焉 最问昏臀 鬼魅之技部公椅 風必聚族 荒埔古耀 鼠必營宅 狐之妖姬 必於幽林之陰森也家用 此我白日昭刑 無幽不遇 則不惟不掩其迹 不能少措其昏之計文小人物好本張 目語精練 處零碎之事 其巧誘如訊 出恒平之語 其隱有如謎 若失營財肥己之事 戕物陷人之首 其陰獲向何言哉 悲矣悲矣- 이목구심서 11사악함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결코 속일 수 없는 이가 한 명 있다. 조물주나 하느님, 부처님 같은 존재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어느누구도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세상 단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현대 한국 불교 최고 선승(禪僧) 중 한 사람인 성철(性) 스님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 있다. ‘무자기(無)‘, 즉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학(大學)』에도이와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바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 삼간다(君子必愼其獨)"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않는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조차 맑고 밝게 처신한다면 그사

람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바로 세웠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쉽겠는가? 성인(聖人)이나 현자조차도그 어려움을 알기에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자신에게 물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일은 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끄럽다면 해서는 안 된다. 물론이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뜻과역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라 달라질 뿐이다"라고 공자(孔子)의 수제자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회顔)를 어질다고 하는 까닭은 ‘불이(不過)‘에 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로(子路)를 두고 용맹하다고하는 이유는 ‘희문과(喜聞過)‘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듣는 일을 좋아했다는 뜻이다. 진실로 뉘우친다면 잘못은 허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작은 잘못은 조금 뉘우치고 잊어버려도 괜찮지만, 큰 잘못은 고치더라도 매일같이 뉘우침을 잊지말아야 한다.

관상과 사주쉽사리 관상이나 사주 같은 이야기에 현혹되어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환난이나 영리를 마주했을 때, 내가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
易惑於風鑑星數之說 而喜懼無常者 當患難榮利而得其正 吾未知信也- 이목구심서 24박지원 또한 「호질(虎)」에서 무당을 무함의이라는심과 거짓으로 먹고사는 인간 군상으로 풍자했다. 호랑이의입을 빌려 무당은 귀신을 속이고 사람을 현혹시켜 일 년에도 몇 만 명씩 예사로 사람을 죽인다며 심하게 꾸짖었다. 사기꾼의 말에 현혹되는 사람은 과욕과 탐욕 때문에 진위 여부를 판단하지 못한다. 무당의 말에 현혹되는 사람 역시 이와다르지 않다. 이익과 권세와 명예와 출세에 대한 과욕과 탐욕 탓에 무당의 말을 추종한다. 더욱이 불행과 질병과 환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무당의 말을 맹신한다. 하지185

람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바로 세웠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쉽겠는가? 성인(聖人)이나 현자조차도그 어려움을 알기에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자신에게 물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일은 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끄럽다면 해서는 안 된다. 물론이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뜻과역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라 달라질 뿐이다"라고 공자(孔子)의 수제자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회顔)를 어질다고 하는 까닭은 ‘불이(不過)‘에 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로(子路)를 두고 용맹하다고하는 이유는 ‘희문과(喜聞過)‘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듣는 일을 좋아했다는 뜻이다. 진실로 뉘우친다면 잘못은 허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작은 잘못은 조금 뉘우치고 잊어버려도 괜찮지만, 큰 잘못은 고치더라도 매일같이 뉘우침을 잊지말아야 한다.

만 이익과 권세와 명예와 출세는 자신의 운과 능력과 행동에따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이지 무당의 말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행과 질병과 환란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고, 덮고 싶다고 해서 덮어지고, 외면하고싶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당의 말 때문에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건강하게 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환란을 당하거나 피하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세상 모든 일은 그렇게 된 원인이 없는것이 없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인생이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필연보다 우연에 지배받는 존재다. 아무리 치밀하게 예측해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계산해 대비한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우연의 힘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갈뿐사주나 관상과 같은 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피할 수 있는 일이면 어떻게 해도 피하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일이면 어떻게 해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남녀가 사주궁합이 안 맞는다고 결혼을 포기하겠는가? 결혼할마음이 없는 남녀가 사주궁합이 잘 맞는다고 결혼하겠는가?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亦不치자연 만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질서 속에는 어린아이의 자리도 존재한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아이 역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자연 만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낀다. 그것을 어른의 방식으로 억지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이를 혼란에 빠뜨릴뿐이다. 어린 시절을 혼란스럽게 보내는 것은 이후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루소가 「에밀」에서 한 말을 인용해 보았다.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그 뜨거운 피와 팔딱거리는 활력이 당신을 다시 젊게 만드는가? 그러면 당신의 심장과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재생(再生)의 동력이다.
정월 초하루를 전후해 즐겁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던 이덕무 역시 문득 다시 약동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아이

의 어린 시절은 물론 어른의 어린 시절 또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로부터 삶의 활력과 재생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호미질과 붓질

아침에 일어나 오이밭을 호미질하다가 마루에 올라가 붓을 잡으면 팔이 몹시 떨려 마치 바람 속에 배가 요동치듯 한다. 어떤사람이 기이한 것을 좋아해 짐짓 전필 힘을 가해 마치 손을떠는 것처럼 쓰는 서체)을 쓰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병을 짐짓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병이 아니기 때문에 떨리는 정신을반드시 꾸짖어 버리는 것이다. 유월 아침에 형암은 원각탑(圓覺塔) 동쪽에서 쓴다.
朝起鋤茂畦上堂把筆 腕大戰如風中舟歟 或疑好奇 故作顫筆 病固可以故作乎 匪病故顫 神必呵之 六月朝 炯菴書于圓覺塔東- 이목구심서 24원각탑은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이다.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은 대부분 백탑(白塔)이라고 불렸던 이 원각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내가 열아홉, 스무 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중략)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대하고 있었고, 낙서(洛瑞) 이서구의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觀齋徐修)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이덕무와 가장 절친했던 박제가가 남긴 증언이다. 필자 역시지금 삶의 일부와 같은 집필실 겸 연구실이 탑골공원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간혹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친한 벗들과 어울려 지낼 때면, 마치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어쨌든 붓을 잡는 손으로 호미를 잡는 일이 쉽겠는가?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나자신을 생각하며 이덕무의 자책 속에 담긴 뜻을 수백 수천번 되새김질해 본다.

본분을 지키고 형편대로 살다본분을 지키니 편안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사니 즐겁다. 모욕을 참으니 관대하다. 이것을 가리켜 대완(大光)이라 한다.
守分而安 遇境而歡 耐辱而寬 是謂大完- 선귤당농소」자기 본분을 지켜 편안하고, 높든 낮든 귀하든 천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닿는대로 즐겁게 살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사람도 모두 용납할 수있다면 완전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가졌다면 완전한인격은 아니더라도 참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얽매일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뜻이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삶이 차라리 낫다.

고금과 삼일고금(古今) 역시 크게 눈을 깜빡이거나 크게 숨을 내쉴 정도로짧은 순간이다. 또한 눈 한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이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짧은순간이 쌓이면 고금이 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새롭고 다시 새로울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 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일(三日)‘,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一古一今 大瞬大息 一瞬一息 小古小今 瞬息之積 居然爲古今 又昨日今日明日 輪遞萬億 新新不已 生於此中 老於此中 故君子着念此三日- 선귤당농소고(古)와 금(今), 고(古)와 신(新)의 관계는 이덕무와 박지원이 평생 고뇌한 문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문제다. 이덕무는
‘작고양금(수)‘,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이덕무는 말한다. 세속에 초탈한 선비는 하는 일마

다 ‘고‘만을 따른다. 세속에 물든 선비는 하는 일마다 ‘금‘만을 따른다. 서로 배격하고 비난하는데 중도에 들어맞지 않는다. 스스로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 이것이 바로 작고양금의 철학이다. 또한 박지원은 말한다. "어떻게 문장을 지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세상에는 괴상한 헛소리를지껄이며 도리에 어긋나고 편벽되게 문장을 지어 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지원이 제자 박제가의 시집 『초정집 (楚亭集)』에 써준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옛것을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춰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글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옛것을바탕으로 삼되 새롭게 창조하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법고창신의 문학이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되 항상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의 발견과 창조에는 이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한다면 옛것과 지금의 것과 새로운 것은261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내가 열아홉, 스무 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중략)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문이 그 북쪽에 마주대하고 있었고, 낙서(瑞) 이서구의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觀齋 徐修)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이덕무와 가장 절친했던 박제가가 남긴 증언이다. 필자 역시지금 삶의 일부와 같은 집필실 겸 연구실이 탑골공원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간혹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친한 벗들과 어울려 지낼 때면, 마치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어쨌든 붓을 잡는 손으로 호미를 잡는 일이 쉽겠는가?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나자신을 생각하며 이덕무의 자책 속에 담긴 뜻을 수백 수천번 되새김질해 본다.

본분을 지키고 형편대로 살다

본분을 지키니 편안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사니 즐겁다. 모욕을 참으니 관대하다. 이것을 가리켜 대완(大完)이라 한다.
守分而安 遇境而歡 耐辱而寬 是謂大完- 선귤당농소」자기 본분을 지켜 편안하고, 높든 낮든 귀하는 천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닿는대로 즐겁게 살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모두 용납할 수있다면 완전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가졌다면 완전한인격은 아니더라도 참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얽매일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뜻이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삶이 차라리 낫다.

고금과 삼 일고금(古今) 역시 크게 눈을 깜빡이거나 크게 숨을 내쉴 정도로짧은 순간이다. 또한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이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짧은순간이 쌓이면 고금이 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늘 새롭고 다시 새로울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 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일(三日)‘,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一古一今 大瞬大息一瞬一息 小古小今 瞬息之積 居然爲古今 又昨日今日明日 輪遞萬億 新新不已 生於此中 老於此中 故君子着念此三日- 선귤당농소」고(古)와 금(今), 고(古)와 신(新)의 관계는 이덕무와 박지원이 평생 고뇌한 문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문제다. 이덕무는
‘작고양금(수)‘,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이덕무는 말한다. 세속에 초탈한 선비는 하는 일마

다 ‘고‘만을 따른다. 세속에 물든 선비는 하는 일마다 ‘금‘만을 따른다. 서로 배격하고 비난하는데 중도에 들어맞지 않는다. 스스로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 이것이 바로 작고양금의 철학이다. 또한 박지원은 말한다. "어떻게 문장을 지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세상에는 괴상한 헛소리를지껄이며 도리에 어긋나고 편벽되게 문장을 지어 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지원이 제자 박제가의 시집 『초정집(楚亭集)』에 써준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옛것을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춰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글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 "옛것을바탕으로 삼되 새롭게 창조하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법고창신의 문학이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 항상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의 발견과 창조에는 이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한다면 옛것과 지금의 것과 새로운 것은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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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다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훗날 반드시 문득 깨치는 날이 있다.
면 바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때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관청의 수령이 평온하고 조용한 성품을 갖춰서 이렇다 할일을 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베푼 혜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그 후임으로 온 수령이 몹시 사납고 잔혹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비로소 예전 수령을 한없이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無事時至樂存焉 但人自不知耳 後必有忽爾而覺 為此憂患時也 如前官恬靜 別無施惠於民 及其後官稍猛鶯民 始思前官不已也이목구심서 2무위도식(無爲徒食)‘과 ‘무위지치(無爲之治)‘라는 말이 있다. 모두 무위를 말하지만, 전자는 무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행위라고 하는 반면 후자는 무위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진리라고 한다. 같은 말을 갖고 어찌 이리도

다르게 사용한단 말인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말까지 제멋대로 써먹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를 다스리는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들의 무위는 지극히 높고 바른 것이지만 자신들을 위해 피땀 흘려 일해야 할 자들의 무위는 결코용납되어서는 안 될 천하의 몹쓸 짓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위지치는 최선의 용어가 된 반면 무위도식은 최악의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무위치가 최선이라면 무위도식 역시 최선이며, 무위도식이 최악이라면 무위자치 역시 최악이다. 어째서누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고, 누구는 피땀 흘려 일하는 것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려야 한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서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익과 명예와 권세와 출세를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이기도 한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게으를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이나 좋아하지 않는 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기계처럼 일하다 폐기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권력의 도구가 되어 뼈 빠지게 일하다가 버

려지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거부의 전략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무위도식이다. 흔히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을 사람들은 무위도식한다고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 일하지 않고도 돈을 벌어 온다면, 세상 누구도 그를 무위도식한다고 비난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열심히 일하는 데도 돈을 벌어 오지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위도식한다고 손가락질하고비난하며 조롱한다. 사실은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돈을 벌어 오느냐 벌어 오지 않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를내리는 것이다. 뭐 이따위 용어가 있단 말인가? 돈과 권력을위해 일하지 말라. 그저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일하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무위의 지극한 즐거움이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려면 오히려 무위도식하는 삶을 긍정하고 창조해야 한다.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얼굴에 은근하게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과는 더불어 고상하고 우아한 운치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의 가슴속에는 재물을 탐하는 속물근성이 없다.
眉宇間 隱然帶出澹沱水平遠山氣色 方可與語雅致 而胃中無錢癖- 선귤당농소」얼굴에 맑은 물과 먼 산의 기색을 띤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지금까지 만나고 살펴본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지만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재물을 탐하는 속물의 티를 벗은 사람은 어떠한가? 이삼십 대 때에는 그러한 사람을만났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마흔 이후로는 그와 비슷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속물티를 벗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속물에 가까워지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든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이십 대 시절이 가장 뜻이 맑고 기상이 높았다. 삼십대 때는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

소인의 마음과 대인의 마음간사한 소인(小人)의 흉중에는 마름쇠 한 곡)이 들어 있다.
속된 사람의 흉중에는 티끌 한 곡이 들어 있다. 맑은 선비의 흉중에는 얼음 한 곡이 들어 있다. 강개한 선비의 가슴속은 온전히 가을빛 속 눈물이다. 기이한 선비의 흉중에는 심폐가 갈라지고 뒤엉켜서 모두 대나무와 돌을 이루고 있다. 대인(大人)의가슴속은 평탄해 아무런 물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壬人胃中 有鐵蒺藜一斛 俗人訇中 有垢一斛 满士智中 有氷一斛 慷慨士國中 都是秋色裡淚 奇士简中 心肺槎枒盡成竹石 大人智中 坦然無物- 선귤당농소」마음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뜻은 애써참으려고 해도 표현하게 되어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떻게든지. 마음을 도저히 감출 수 없고, 뜻을 도저히 참을 수없을 때 나오는 말과 글이 바로 진실한 말이고 참된 글이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망령된 사람과 더불어 시비나 진위나 선악을 분별하느니 차라리 얼음물 한 사발을 마시는 것이 낫다.
與妄人辨 不如喫冰水一碗- 선귤당농소」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 전갈과 같은 사악한자를 만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보자. 사막을 건너다가 우연히 전갈을 만났다고 하자.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죽느냐 전갈이 죽느냐 생사의 결판을 내야 하는가? 아니다. 전갈은 그냥 무시하고 갈 길을 가면 된다. 사악한자도 전갈과 다르지 않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과할 수 없는 일을 하려는 사람만약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일을 갖고 생계를 도모하지 않는 사람은 버려진 백성이다. 그러나 능력과 계획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다면,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어떻게 할 길이 없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애써 하려고 하면 범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적다. 이것이 바로 공교롭게 하려다가 졸렬해지는 경우다. 하늘의 뜻에 따르고 운명을 편안히 여기는 것만 못하다.
若有可爲之路 而不資生者 棄民也 然力與謀不相入 顧無如何矣 勉強其所不能爲 則其不犯辟者小 是欲巧而拙也 不如聽天安命而已- 이목구심서 34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나는 능히 한다. 사람들이 능히 하는일을 나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거나 과격해서가 아니라 선(善)을 선택한 것일 따름이다. 사람들이 하지않는 일을 나 또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능히 하는 일을 나또한 능히 한다. 이것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사람들을따르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에 나아갈 따름이다. 이러한 까닭

에 군자(君子)는 안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人之所不爲我則能爲之 人之所能爲 我則不爲之 非矯激也,擇善而已人之所不爲 我亦不爲之 人之所能爲 我亦能爲之 非詭隨也 就是而已是故君子- 이목구심서 34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자신의 당호(堂號)인 여유당(與猶堂)에 붙인 기문(記文)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지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다. 하고싶지만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서 하지 않는 일은 그만둘수 있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이란 항상 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내켜 하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중단된다. 반면 하고 싶은 일이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또한 때때로 그만둔다. 이렇다면 참으로 세상천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거리낌도 없고 막힘도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산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인가?

모략과 비방마음을 화평하고 기뻐하며 온화하고 평온하게 가져서 거역함이 없이 순리에 따르는 것이 바로 인생의 큰 복(福)이다.
마음을 관대하고 평안하며 고요하게 지니면 추울 때도 더울 때도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 옛사람이 불길에 뛰어들어도 타지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하의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은 아무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비방해 잘못을 덧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는 비방은 결국 곧바로 탄로 나는 법이다. 이ㅐ 비방을 듣는 사람이 만약 떠들썩하고 어지럽게 자신의 결백을 변명하기라도 하면 역시 시끄럽고 복잡하게 될 뿐이다. 비방의 경중을 가려서 더욱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得心和悅溫 無拂逆其順適 是人生大福力 持心要寬平安靜 寒暑有時乎不入 古之人火不焦入水不漏云者 指此也 天下之最不祥 以無根之誘 橫加於人也 然其所謗 畢竟卽綻 開謗者若紛紛辨白 亦系燥擾也且有輕重 尤審慎- 이목구심서 3

남이 모략한들 어떻고 비방한들 어떤가?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갈 뿐이다. 필자는 백호 윤휴(湖)의 "천하의 진리는 한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만약 누군가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옛사람의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끝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는 대로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서계 박세당(西溪堂)이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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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인지 눈물인지 좀체 분간할 수 없는 것이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건네드렸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나직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알아,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니.…."
나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높다란 언덕에서 떨어진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받아낼수 없었다. 더러운 말의 꼬리를 붙잡지 못해 죄송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밤새 뒤척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수양서인 《사소절小》에서 성인이 알아둬야 할 행실과 언어생활에 대해소상하게 적었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재빨리 마음을 짓눌러야 한다.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거친 말을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위성176

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는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번지르르한 말 속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상처를안겨준다면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거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는 고막을 두드리며 몸으로 스며든다. 하지만소음은 고막을 찌른다.
소음이 들쑤시면, 사람은 귀를 틀어막는다. 소음은스며들지 않고 금세 소멸한다. 가끔은 내 입술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가 말 그대로 소리인지, 소음인지찬찬히 되짚어봄직하다.

"당신 멋져!"
몇 해 전 송년회 자리에서 접한 건배사다. 여기에는이중적 의미가 있다. "당신이 멋있다"는 겉뜻을 벗겨내면 "당당하게, 신나게 살고, 멋지게 져주자"는 속뜻이 드러난다.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앞의 두 어절을 발음할 때는별 감흥이 없었으나, 마지막 어절인 "멋지게 져주자"
를 외치는 순간에는 어딘지 모르게 속이 뜨끔했다.
사과할 줄 모르고 지는 데 익숙하지 않은 작금의 세태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 듯했다. 덩달아
"그래, 당신 멋져!"를 부르짖던 동석자들도 허허로운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주변 사람과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구1

성하는 존재는 ‘나‘와 ‘우호적인 타인‘과 ‘비우호적인타인‘, 이렇게 셋뿐이다.
승부의 각축장에서는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사람이 있다. 무언가를 겨루는 일은 필연적으로 갈등과앙금을 남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갈라진 감정의 골을 봉합하고예전의 관계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패배를 말끔하게인정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승세가 상대편으로 기우는 순간 ‘지는 행위‘ 자체를사회적 혹은 심리적 죽음으로까지 간주하는 이들도있다.
누군가와 승부를 겨루었는데 갈등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부풀려지고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면 아래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으면 한다.

기 고양 오류 self-serving bias‘라고도 한다.
그 때문에 몸담은 조직이나 단체의 구성원들 앞에서부당한 지적과 모욕을 당하면 자존심이 몇 곱절 더상하게 마련이다.
말이라는 흉기에 찔린 상처의 골은 너무 깊어서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다. 어떤 말은 그 상처의 틈새로파고들어 감정의 살을 파헤치거나 알을 낳고 번식하기도 한다. 말로 생긴 상처가 좀체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삼 고려 때 문신 추적이언과 명구를 모아엮은 <명심보감明心의 글귀가 떠오른다. 《명심보감> <언어> 편을 펼치면 말의 본질과 관련해,
"이인지언 난여면서 상인지어 이여형극, 일언반구중치천금 일어상인 여도할綿絮 傷人之語利如荊棘,一言半句 重値千金 一語傷人 痛如刀割"이라는 문장이눈에 들어온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처럼 따듯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다. 한마디 말의 무게는 천금과 같으며 한마디 말이 사람을 다치게 하면 그 아픔은 칼로 베이는 것과 같다."
TV 뉴스를 보면 명절 때마다 ‘명절증후군‘이라는어가 자주 등장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육체적 피곤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신적인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절을 맞아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일가친척을 향해 "결혼은 언제 할 건데?" "눈높이를낮춰야 취업에 성공하지!"처럼 핀잔과 훈계가 범벅된 말 폭탄을 힘껏 쏘아 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매정하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단서를 단다. "사실은 너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라고글쎄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든다.
상대에게 관심이 없으므로 그렇게 쉽게 지적을 남발L탑194

계는 무효했고 미래를 향한 제안은 유효했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와의 공통점을 찾는 게 그리 특별한 기술은 아닐 것이다. 필요한 건 테크닉이 아니라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지과학에서는 인간의 사고 유형을 크게 ‘굳은 사Chard thinking‘와 ‘부드러운 사고soft thinking‘로 분류한다. 전자는 어떤 대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하는 사고 체계이며, 후자는 상대를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가령 "고양이와 냉장고의 공통점이 뭘까요?" 하는질문에 굳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가전제품과 살아있는 동물한테 공통점이 있어?"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둘 다 색깔이 다양하고, 부엌을 좋아하고, 꼬리 비슷한 게 달렸지요"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유연한 덕분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 <계명우기鷄鳴記> 편에는 네가지 사귐의 유형이 나온다.
첫째는 의리를 지키며 서로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친구 ‘외우畏友‘, 둘째는 친밀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친구 ‘밀우友‘, 셋째는 즐거운 일을 나누면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 ‘일우,
넷째는 평소 이익만 좇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책임을 떠넘기는 친구 ‘적우‘다.
링컨과 스탠튼의 관계는 밀우와 외우의 중간쯤 되지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밥벌이를 위해 내몰리는 이세상에는 위 네 가지 친구가 적당히 뒤섞여 있을 테지만 말이다.

뎃잠을 자는 이들을 초대해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교황 특유의 소탈하고 깊이 있는 화법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교황의 어조는 자장가처럼 부드럽지만, 말에 담긴 의지는 단호함으로 똘똘 뭉쳐 있다.
특히 교황은 강론할 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전임자들이 추상적인 어휘로 교리를 길게 나열한 것과달리,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적 언어로 신앙의 기본을 얘기한다.
교황이 지닌 언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교황은 기자회견이나 대중 연설 자리에서 특정한 편을 가르거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선과 악, 동과 서를 구분하는 법이 없다.
이러한 말씨와 세계관은 흥미롭게도 공자가 《논어》<위정爲政> 편에서 언급한 군자의 덕목과 동일한 사

271110 1019.
상의 궤적을 그린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부주子周而
"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군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무리를 짓지 아니하고, 소인은 무리를 지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는 편당하지 않는 것, 즉 한쪽 세력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는 자세야말로 군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뜻이다. 군자는 한 군데에만 쓰이는 그릇인물이 아니라는 의미로도 헤아릴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불편부당한 언행은 자기를 둘러싼 유무형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때 가능하다.
거칠게 요약하면, 서구의 근대는 울타리로 경계를 짓거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으면서 시작됐다고 해도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구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나만의 체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은 분명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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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言無患107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에 힘을 뜻하는 역자를 붙인 ‘둔감력‘이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자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즘으로 일컬어지는 ‘후흑학‘
에도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청나라 말 사상가 이종오李宗는 동명의 책에서 "난세를 평정한 영웅호걸의 특징은 ‘후‘와 ‘흑黑‘으로 집약된다"고 했다.
여기서 ‘후‘는 얼굴이 남보다 두터워 감정을 쉽게 들키지 않음을 뜻한다. ‘흑‘은 글자 그대로 검은 것이다. 그냥 검은 게 아니라 타인이 마음을 간파할 수

E115귀가를 어떤 방식으로 유도할까.
이때 상당수 부모는 "그만 놀아 어서 들어와!"처럼직선을 닮은 명령형 문장을 힘차게 내던지거나,
"배 안 고프니? 저녁 먹지 않을래?" 식의 곡선을닮은 청유형 문장을 흘린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전혀 다른 유형의 문장을 동원했다. 그녀는 아들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로 다음과같이 외쳤다.
"스파이더맨, 무턱대고 거미줄을 쏘면 부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어. 인명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그럼 임무 마친 뒤 무사히 귀환하도록!"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은 영화배우가 극 중 배역에몰입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열연하는 메소드 연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아이는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듯이 화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곧 귀환하겠습니다. 오버!"

묻고 또 묻는 게 아닌가.
"얘야, 여기가 무슨 역이냐?"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들을 쳐다보았는데 눈동자가 또렷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과거의 어느 시점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핏 치매를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거듭되는 노모의 질문에 아들이 입을 열었다. 아들은늙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마치 갓 태어난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어머니, 여긴 녹번역인 것 같아요. 참, 기억나세요?
내가 어릴 때 버스만 타면 정류장 이름 알려달라고귀찮게 굴었잖아요. 그때마다 어머니는 화도 안 내시고 열 번, 스무 번씩 대답해줬어요. 그때가 엊그제같은데..."

水言無忠127아내리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 사람은 칭찬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상대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상대방을 뒷담화로 내리찍어 자기 수준으로 격하시켜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에는 묘한 뜻이 숨어 있다.
두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을 열어야 비로소말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는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바로 언품이다.
뒷담화가 우리 삶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뒷담화는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사람의 입을 옮겨 다니다가언젠가 표적을 바꿔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혀와가슴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는지 직원의 시선이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들키지 않게 직원의 얼굴을 할끔 곁눈질하면서 혼자 엉뚱한 상상을 떠올렸다.
‘사내가 만약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다면 한 잔 값으로 얼마를 치러야 할까?‘
1만 원 이상을 내야 한다. 커피 한 잔치고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카페에서는 예의 없는 고객에게 돈을 더 받기 때문이다.
다음은 카페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우리말로 옮긴것이다.
•· "커피" → 7유로●
"커피 주세요" → 4.25유로
"안녕하세요, 커피 한잔 주세요" → 1.40유로조금 매정하기는 하지만 기발한 가격표 아닌가. 고객이 커피를 주문할 때 구사하는 말의 품격에 따라

37음료의 가격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이성대중잡기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에번 심무자 기사황內不足者其辭煩心無者 其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있다.
말과 글에는 사람의 됨됨이가 서려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사람의 품성이 드러난다. 말은 품성이다. 품성이 말하고 품성이 듣는 것이다.
격과 수준을 의미하는 한자 ‘품‘의 구조를 뜯어 보면 흥미롭다. 입 ‘구ㅁ‘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체취, 사람이 지닌 고유한 ‘인향‘은 분명그 사람이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언어처럼 극단을 오가는 것도 드물다. 내 말은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도 있으나 반대로 창이 될 수도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는커녕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더러운 말이 마음에서 떠올라 들끓을 때 입을 닫아야 한다. 말을 죽일지 살릴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그리고 끝내 만 사람의 입으로 옮겨진다.

곡선과 같아야 한다. 때로는 능수능란하게 휘둘러서도려낼 것을 도려내야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친친둘러 감아서 껴안을 대상을 껴안아야 한다.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재난 상황이라면 리더는 위기의 본질을 꿰뚫고 흐트러짐 없는 말로 신속하게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런 면에서 줄리아니 시장의 언어는 정곡을 찔렀다고 볼 수 있다. 줄리아니의 말은 헛되이 흩날리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말로 상황을 장악했다.
무엇보다 언행이 일치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미술기법에 비유하자면 데칼코마니 같았다. 도화지 절반에 물감을 뿌린 뒤 종이를 접으면 반대편 도화지에똑같은 그림이 묻어나듯, 줄리아니의 말과 행동에는차이가 없었다.
말과 행동의 관계는 오묘하다. 둘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행동은 말을 증명하는 수단이며 말은 행동과부합할 때 비로소 온기를 얻는다.
언행이 일치할 때 사람의 말과 행동은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상대방 마음에 더 넓게, 더 깊숙이 번진다.
이는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이 가운데 대략 80퍼센트가 시각에 의한 것이다.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때 단순히 청각적 정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대방을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상대의 말과 행동을 비교 또는 대조하게 된다. 우리가 구사하는 말과 취하는 행동이 하나로 포개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없다. 행동은 말을 증명하는 수단이며 말은 행동과부합할 때 비로소 온기를 얻는다.
언행이 일치할 때 사람의 말과 행동은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상대방 마음에 더 넓게, 더 깊숙이 번진다.
이는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이 가운데 대략 80퍼센트가 시각에 의한 것이다.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화를 나눌 때 단순히 청각적 정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상대방을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상대의 말과 행동을 비교 또는 대조하게 된다. 우리가 구사하는 말과 취하는 행동이 하나로 포개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자는 일찍이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 "선행기언이후종지其言而後從之"라고 했다.
행동을 옮겼다면 말이 꼭 뒤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말과 행동의 괴리가 없어야 함을 강조한 셈이다.
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사상도 의미가 부합한다. ‘무실‘은 참되게 힘쓰자는 뜻이고 ‘여행‘은 뒤로 미루지 말고 현재에 충실히 하자는의미다. 이 역시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흡사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문구 ‘just do it!‘을 연상케 한다.
적어도 한국과 중국 등 동양 문화권에서는 언행일치가 보편적 가치관이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은대중이 본받아야 할 어른으로 추앙받지만, 둘 사이의간극이 지나치게 크면 예나 지금이나 조직 생활과 인간관계에서 손해를 입게 된다. 번지르르한 말만 앞서는 ‘언행불일치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입으로 내뱉는 말과 몸으로 취하는 행실의 관계는떼려야 뗄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음식과 양념처럼말이다.
음식을 조리하면서 어울리는 양념을 적당히 가미하면 맛은 배가되지만, 양념 양을 조절하지 못하거나엉뚱한 양념을 치기라도 하면 음식 고유의 맛과 풍미가 사라진다. 요리를 망치고 만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 펼쳐놓는 요리와 애써 뿌린 양념 행동의 궁합이 잘 들어맞는지, 음식 맛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입 밖으로 꺼낸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거리가 이 세상 그 어떤 거리보다 아득하게 멀지는 않은지....

의"라고 강조했다. "말과 문장은 뜻을 전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무작정 현란하게 말하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말 속에 담아야 할 본질적인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얘기다.
영화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의 언품을극명하게 대비한다. 한 명은 파시즘의 핏빛 광기로독일을 어둡게 물들인 아돌프 히틀러, 다른 한 명은앞서 소개한 말더듬이왕 조지 6세다.
두 사람의 어법은 극과 극이다. 히틀러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의 성찬을 쏟아내는 다변과 달변의 소유자다.
반면 조지 6세는 세련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서말할 줄 아는 인물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누가더 뛰어난 언사를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라고 강조했다. "말과 문장은 뜻을 전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무작정 현란하게 말하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말 속에 담아야 할 본질적인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얘기다.
영화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의 언품을극명하게 대비한다. 한 명은 파시즘의 핏빛 광기로독일을 어둡게 물들인 아돌프 히틀러. 다른 한 명은앞서 소개한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다.
두 사람의 어법은 극과 극이다. 히틀러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의 성찬을 쏟아내는 다변과 달변의 소유자다.
반면 조지 6세는 세련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서말할 줄 아는 인물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누가더 뛰어난 언사를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인류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켜내고, 말과 말 사이에 진심을 심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을 우위에 놓아야 할 것이다.
타인을 향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는 만인이 고민하는 숙제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상대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지 못하고,
혹자는 누군가의 화법과 말투를 무작정 따라 하다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말에 비법은 없다. 평범한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차분히 기고 자신의 말이 그려낸 궤적을 틈틈이 점검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법을 찾고 꾸준히 언품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이유는 단 하나다. 말하는 기술만으로는 당신의 건심을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땀인지 눈물인지 좀체 분간할 수 없는 것이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건네드렸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나직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알아,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니…."
나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높다란 언덕에서 떨어진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받아낼수 없었다. 더러운 말의 꼬리를 붙잡지 못해 죄송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밤새 뒤척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수양서인 《사소절小》에서 성인이 알아둬야 할 행실과 언어생활에 대해소상하게 적었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재빨리 마음을 짓눌러야 한다.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거친 말을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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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병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순신 장군은 왜 운주당의 출입문턱을 낮추었을까?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전쟁 대비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적군은 칼을 휘둘러 상대할 수 있었으나, 해안의 물길과 지형처럼눈에 보이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정보는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해당 지역에서 태어난 병사는 물론 종종 민간인까지 운주당으로 불러들였다.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기울였다. 현장에서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031 갔을지도 모른다. 상상력을 발휘해봤으면 한다.

사람의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닮은 소우주다. 인간의 말은 작은 우주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러므로 들리는 것을듣는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음성에서 숨겨진 메시지를 포착해 본질을 읽어내야 한다. 상대방이 가슴에서 퍼 올린 말을 귀가 아닌가슴으로 느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 책의 낱장을 넘기면서 곰곰 생각해봤으면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본 적 있는지,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에서 크게 중폭시켜 헤아려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만한 ‘자신만의 운주당‘이 있는지...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늘 무력하다. 다만 살아갈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는 지독한 허탈감과 무력감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는지 모른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운주당을 세워봤으면 한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입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귀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인은 사람 인ㅅ에 두 이를 더해 만든 한자다. 여기에는 단순히 ‘마음 씀씀이가 야박하지 않고 인자하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여기는 마음가짐 혹은 그러한 행위까지 내포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는 ‘인‘을 인간이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관계 속에서 ‘인‘을 실천하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의 반대는 ‘붙인‘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 동양 의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
"신체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타인과 정서적으로도 감정이 통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면 자신의고통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아픔과 속사정을 짐작하

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전방위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약품이 깃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개념을 구체화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체포해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을 총괄한 책임자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의무를 준수했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변명에는 죄의식은커녕 고민의 흔적조차묻어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거악을 창안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거악과 손을 잡거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일갈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있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어느 시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넘기다가 그녀의 주장이 지닌 무게가 너무 무거워책 모서리를 쥔 채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일까? 그녀가 거창한 단어를 문장 곳곳에 집어넣어서 자신의 주장을 부풀린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녀의 말처럼, 악은 인간의 내부에 잠입해 똬리를틀고 앉아 우리의 윤리적 고민과 성찰을 방해한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내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상황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제2, 제3의 아이히만

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공감과 무공감, 사유와 무사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틈틈이 내면의 민낯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이러한 그루밍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은 구성원 간 친밀감 형성이 주된 목적이며, 큰 틀에서 보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누일 곳이 필요하다.
몸이 아닌 마음을 누일 곳이물론 그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뿐만이 아니라 사람의마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고민을종종 타인에게 털어놓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고민을 해결하려는 목적보다는 마음을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나 역시 세상살이에서 생기는 근심과 답답함을 주변사람과 나눌 때가 있다. 그런데 이때 형식적인 위로나 격려보다는 마음의 장막을 먼저 풀어헤치고 다가와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라고 덤덤하게 말해주는 이들의 위로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마음 깊은

피지 않을 수 없다.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말아야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손자병법》 <모공> 편에서는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居人之"라고 말하기도 했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강조한 것이다.
손무가 강조한 상책 가운데 하나가 협상이 아닐까싶다. 서로의 흠집과 맹점을 찾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공세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과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싸우지 않고 양측 모두가 이기는방법을 찾는 합세의 대결말이다.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골프채의 스위트 스폿으로 공을 쳐야 최대비거리를 낼 수 있다.
협상학에도 스위트 스폿이 존재한다. 다만 비거리를

최대화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환경을 최적화하는 역할을 한다.
양측의 이익이 하나로 포개지고 협상 참여자들이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심리 타점이라고도 한다.
극단 사이에서 절충의 지점을 찾는 일은, 중국 노나라 때 학자 자사가 주창한 중용中庸과 맥이 닿아있다.
여기서 ‘중‘은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도리에 맞는상태를 일컫는다. ‘용‘은 보편적이면서 변하지 않는성질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양극단 사이에서 절충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를 서구적 시각으로 풀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중용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반대편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제로섬 zero-sum 게임이 아니다. 이해 당사자 모두가 실리를 챙기는 포지티브섬 positive-sum 게

임에 가깝다.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유연한 흔들림이라고 할까.
바다를 떠다니는 배도 중용의 힘으로 파도를 밀쳐내고 물살 위에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대개 선박은출항 전 배 밑부분에 평형수平衡k, ballast water 를 집어넣는다. 파도를 만나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가만히있던 평형수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서 선박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평형수가 제 위치를 절충중용하는 덕분에 배가 뒤집히지 않고 순항할 수 있는 것이다.
절충과 협상 과정에서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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