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잠들어 있는 사람

그날 다시 전화를 걸면서 나는 「골짜기에 잠들어 있는사람(Le Dormeur du val)」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배운 아르튀르 랭보의 소네트였다.

초록빛 골짜기, 그곳에는 풀밭에 은빛 잔해를미친 듯이 쏟아내는 강이 노래하네.
태양은 우뚝 솟은 산에서 빛나네.
그것은 햇빛으로 넘쳐나는 작은 골짜기.

한 어린 병사, 입 벌리고 모자도 없이,
싱그러운 푸른 풀밭에 목덜미 담근 채

잠들어 있네. 구름 아래 풀밭에 누워 있네,
빛이 쏟아지는 초록색 침대에 창백한 모습으로,

글라디올러스 꽃에 발들을 묻은 채 잠들어 있네.
병든 아이가 미소 짓듯 웃으며 꿈꾸고 있네.
자연이여, 따뜻하게 그를 재워주기를,
그는 추워하네.

향기에도 그의 콧구멍 떨리지 않네.
햇빛 속에 그는 잠들어 있네, 평온한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오른쪽 옆구리에 붉은 구멍 두 개가 있네.

시는 많은 시대를 거치면서도 전해지는 강력한 힘이 있다. 시를 지을 당시 랭보는 열여섯 살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한창이던 1870년도였다. 또 다른 시대. 또다른 전쟁. 또 다른 비극. 만일 랭보가 21세기에 시를 썼다해도, 시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지금 다라야의 처지를 이야기한다. 젊은 병사의 죽음과 맞선 저항의 표현, 마지막 안식을 향한 길에 울려 퍼지는, 평화로운 자연이 들려주는 선율의 위로.

베벨 광장(Bebelplatz)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때는 1933년5월 10일, 하룻저녁에 히틀러 정권은 나치 군대가 압류한 수천 권의 반체제 작품을 이 광장에서 불태우게 했다. 
이때 제물이 된 작품에는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판단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혹은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Freud)의 책이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정권의 선전을 맡은괴벨은 신세계의 창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정권에 반대하는 책이란 존재할 권리조차 없는 세상이었다.

그 후 수십 년이 흐른 1995년, 이스라엘의 조각가 미하 울만(Micha Ullman) 이 이 장소를 다시 찾았다. 
울만의 부모는 독일의 수도를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울만은 책을 불태운 만행을 기억할 수 있도록, 광장의 포석 아래를 파서 가공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땅을 파고 유리판을 덮어서 만든 공간은 일부러 비워두었다. 
내려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텅 빈 책장들만 놓인 50제곱미터의 지하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몸을 숙여야 했다. 지금 그곳은 ‘침몰한 도서관(Versunkene Bibliothek)‘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처럼 다라야도 언젠가 그들의 베벨 광장을 가질 수 있을까? 

"다라야에 대해 제가 기억에 담고 싶었던 것들이 이런 장면이에요. 결속된 하나의 집단 미래를 건설하려는 공동의 바람, 새로운 생각을 지켜내는 것. 우리는 하나였어요. 결속과 연대감, 다른 도시에도 본보기가 될 수 있는 특별한 경험, 다라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정신입니다."
샤디는 추억에 빠져들었고, 눈빛에는 향수가 깃들었다.
샤디는 다라야의 이야기를 모험담처럼 말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바샤르 알 아사드는 우리를 패배자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자비한 포위 공격 속에서 4년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대승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뒤에서 한 여자 손님이 빵집이기도 한 이 작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양팔에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있던 그 손님은 딸의 생일을 위해 ‘눈의 여왕‘과 ‘백설 공주‘
모양의 케이크 중에 무엇을 고를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다.
"더 힘든 건 그다음이에요." 샤디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비행기를 봐도 떨지 않고, 고요 속에 잠드는 법을 배워야 하죠.
갑자기 모든 것이 불변하고, 영원히 약속된 것이 되었어

모든 현실의 문이 잠겼을 때,
세상의 문을 열어준 책장 속의 책들
도서관은 그들에게 피난처이자 치유의 장소였다.

"책이라고?" 그가 놀라 되물었다.
전쟁 한복판에 책이라니, 사람 목숨도 구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책을 찾아내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마지못해 친구들을 따라 나선 아흐마드는 무너진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현관문은 폭격으로 날아가고 없었다. 마루의 잔해들 사이로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는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서툰 외국어 실력으로 몇 가지 익숙한 단어들을 읽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책의 주제가 아니었다. 
익숙한 대치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그는 미지의 세계로 도망치듯,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흐마드는 천천히 책을가슴에 끌어안았다. 온몸이 떨려왔다. 그것은 지식의 문이 열리는 전율이었다.
"내가 처음 시위에 나섰을 때와 같은 해방의 전율이었어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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