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를 딛는 틀은 첫바퀴다. 대개는 나무들을 만들어 쓰지만,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서는 그물망이 빠져나간 천체를 사용했다. 정결한 무명 자루에 뜨거운 콩을 담아 그 둥근 테두리 안에넣은 다음 깨끗한 흰 버선을 신고 가만히 올라서서 꼭꼭 디뎠다. 뜨거울 때 디뎌야 콩이 잘 으깨지므로 엄마는 발바닥이 뜨거워간간히 바닥으로 내려서곤 했다. 그래도 뜨겁다거니 힘들다거나졸립다거니 내색하지 않았다. 밤새 메주를 디뎌도 엄마는 졸린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안동의 옛사람들을 지배하던 유교 정신의 본질은 경이었다. 우주 만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정성을 다하려는마음가짐이었다. 위대한 사상들이 대개 그렇듯이 유교 역시 까다로운 예법의 껍질을 벗기고 들어가보면 본질은 아주 심플한것이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대학》의 한 구절을 다시 읽었다. 어려운한자가 전혀 없이 간결하고 명료했다. 《대학》은 격물치지가 수신의 바탕이고, 수신해서 제가하고 제가해서 치국하고 치국해서 평
단계별 공부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책이었다. 유교의 공부란 과거시험이 목적이 아니다. 덕을 쌓아 군자 혹은 선비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사서와 삼경은 소가 풀 뜯어먹는헛된 소리들이 아니라 덕을 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기해둔 간명한 지침서였다.
현대 교육이 그걸 왜 그토록 어렵고 멀게만 느끼게 만들었는지돌아보면 의아할 뿐이다. 그건 다름 아닌 삶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인간의 근본이란 소리였다. 마주치는 우주만물을 가벼이 대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들여다보면 거기서 앎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사서와 삼경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어려서 잠깐 <천자문>과 <소학을귓전으로 듣기만 해도 그 본질은 여린 영혼 안에 각인된다. 안동의 삶이 지향하는 것은 분명히 출세가 아니었다. 되레 출세하고 벼슬이 높아지는 것에 살짝 혀를 차는 경향이 있었던 것같다. 그러니 벼슬이 높다고 그 앞에 고개 숙일 리가 없다. 돈을많이 벌었다는 것은 더욱이 살짝 하류로 쳐버린다. 몸에 붙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쌓인 덕이 얼마만 한지를먼저 따지는 정신. 그걸 일컬어 쉽게 선비 정신이라고 불렀겠지만 이 도도한 자본과 물질의 시대에 그런 정신이 도대체 어느 정도 먹힐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고, 현재의 안동에서 그 정신이얼마나 발현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다. 아무튼 그 격물치지와수신제가 사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사이를 다리 놓는 것이
난젓‘, 명태와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
무가 제철이다. 알다시피 제철 채소는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철마다 맛있는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어쩌면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옷을 지어 입는 것도,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운 좋게도 사랑하는사람과 아이를 만드는 것도, 그 아이가 내게 방긋 웃는 것도 땅에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이 덤이 더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나 우린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심각한 어리석음이다. 생의 본질! 그건 가을무의 푸른 어깨에 있다. 땅속에서 서너 달뿌리를 박고 자라면 무는 땅기운을 받아 지면 위로 불쑥 솟아오른다. 거기 맑은 바람과 햇볕이 듬뿍 쏟아진다. 간간이 내려주는빗물을 빨아 마신다. 무를 키운 지풍화수는 바로 내 생명의 본질이기도 하다. 나 역시 무처럼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게다가 땅과 바람과 햇볕과 물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다. 땅 위로 솟아 햇볕을 받은 무는 점차 제 머리 위로 드리운 싱그러운 무청의 빛깔을 닮는다. 가을이 되어,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일, 그런 순도 백퍼센트의 기쁨이 또 있을까. 사람은 그런 순수하고 완벽한 순간에 영원에 닿는다. 그런 순간을 만끽하는 이들만이 우주와 생명의 비밀스런 뜻을 포착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무는 채소지만 전엔 과일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가을무는달고 물이 많아 웬만한 배는 곁에 얼씬도 못했다. 겨우내 우리집부엌에서 채 썰어지고 깍둑 썰어지고 어슷 썰어진 무가 너댓 접은 족히 됐으리라. 무 요리 중 내가 특히 좋아한 건 ‘난젓‘이었다. 난젓! 그건 ‘난타‘의 ‘난‘과 같은 항렬로 마구 두드린다는 의미였다. 겨울이 깊어지면 엄마는 난타공연하듯 도마를 리드미컬하게 두들겼다. 도마 위에 올려진 건 무가 아니라 ‘명태‘ 였는데 안
정서를 담는 말은 실은 대개 여성어였다.
엄마는 어른을 만나면 일단 첨절 안계시냐고 물은 다음 신관이 어떠시냐고걱정스런 얼굴을 했고 헤어질 때는 소관하시라고 고개를 숙였다. 엄마 곁에 서서 나는 그 ‘첨절‘과 ‘신관‘과 ‘소관‘이란 말을 곱씹으며 어른들의 근심스럽고 엄숙하고 복잡한 세계를 두렵게 기웃거렸다. 안동에 가도 할매들 외엔 이젠 아무도 그런 말로 인사하지 않는다.
첨절이란 별일이고 신관이란 얼굴이고 소관이란 볼일이다. 그런 말이 그토록 몸에 착 밴 세대는 엄마로서 끝나버렸다. 텔레비전이 안방마다 보급되면서 지역 말은 억양만 남아 있고 어휘들은 급히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책의 어느 페이지에 "정개미에 연변 붙이나? 불가가뜨거우이 내가 좀 부끄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한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만약 쟁개미란 말과 연변이란 말을 아예 몰랐다면 이런 반응이 나왔을 리 없다. 그리고 만약 일상어로 내가 그 말들을죽 사용해왔다면 역시 이런 반응이 나오진 않았을 거다. 분명 알고 있다가 잊어버린 말들이었다. 30년 혹은 40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말이었기에 사람에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불러왔던 것이다. 온다는 것은 인류학적인 수수께끼 아닌가. 그랬다! 우린 프라이팬을 쟁개미라고 불렀다! 그 위에 팥소를넣어 부치는 밀가루떡을 연변이라고 불렀다! 어원 같은 건 난 모르겠다. 그런 말이 있었고 그런 말을 잊었다. 왜 잊었는가. 남들이
"님은쑥을 캐겠지"
볕에 앉아 쑥을 캐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피채소혜 일일불견 여삼추혜....… 아마도 시경에 나오는 시일 텐데 처음 배운 건 고등학교 한문 시간이었다. "피채갈혜彼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월혜如三月 피채소혜 일일불견-8不見 여삼추혜如三秋兮 피채애혜彼采艾兮 일일불견一日不見 여삼세혜如三歲兮.
포털의 검색창에 ‘피채소혜‘를 쳐보니 금방 요렇게 검색된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인터넷의 배신감이여. 나의 떠듬떠듬기억을 배신하고 아련하게 곰삭은 추억을 배신하고 뒤통수에 내리쬐는 《시경》의 역사를 배신하는구나.
인터넷엔 여러 해석이 난무하지만 우리 한문선생님이셨던, 그때 내 눈에는 이미 칠십이나팔십쯤 돼 보였던 봉구 할배는(실제로는 아마 50대?) 눈을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해석하셨다.
"님은쑥을 캐겠지 하루만못보아도 가을이 세 번 지난것 같구나."
우리가 "우와~우와~" 소리 지르자 봉구 할배는 일갈하셨다. "역시 《시경》은 음란해서 못쓰겠어. 어린 계집아들한테는 가르칠 게 못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는 주름 가득한, 찢어질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쑥 캐고 앉았으면 예전에 돌아가신 봉구 할배 그립다.
나의 <오감도>
뒤란한켠에 손바닥만한 쑥밭이 있다. 작년 여름 이후 부쩍 지저분해지던 쑥대궁이를 뽑지 않고 방치한 것은 오늘 같은 봄날에 어린 쑥을 뜯어 먹으려는 전략(?)이었다.
그제도 듣고 어제도 뜯고 오늘 아침에도 뜯었다. 두어 줌만 뜯어와서 통밀가루에 슬슬굴려찜솥에 잠깐만 올리면 쑥버무리 요리 끝~이다. 그제와 어제와오늘 마주앉은사람이 매번 달랐지만 다들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쑥버무리‘라는 제목의 <오감도>를 한번 써보고싶다는 유혹에 시달렸다.
"열세 명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오 첫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 두 번째 아이도맛있다고 그러오세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열세 번째 아이가 맛있다고 그러오....쑥밭은 막다른 골목 안에 있는 아니 막다른 골목 안이 아니어도 좋소 열세명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소 쑥밭에 나란히 앉아있어도 좋소쑥밭에 나란히 누워 있어도 좋소, 어깨 위에 볕이 나른히 내리쬐어주어도 좋소 열셋의 아이는맛있는 아이와 맛있어 하는 아이와 그렇게뿐이 모였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낫겠소" 올봄이 가기 전에 열세 번째 아이까지 쑥버무리를 먹여 나의 <오감도>를 완성해야 할텐데, 이 비 오고 나면쑥이 너무 쇠어버릴까 걱정이다.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제비꽃과 민들레 사이에 앉아 쑥을 뜯으면서 엄마 생각을 합니다. 어깨와 머리통에 봄이 따끈따끈 내려앉아요 엄마뿐 아니라 고모 생각, 예령이 생각, 할머니 생각, 한달막씨생각도 합니다. 봄볕에 나앉아 쑥을 캐던 우리 집안 여자들이요. 다들 나보다 먼저 여길 떠나버렸지만 어디선가 쑥 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한 여자들이요. 예령이 빼고는다들 허리 한번 못 펴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지만 엄마도 고모 할머니도 한달막 씨도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비로소 합니다. 이런 봄볕 속에 쑥을 캐는 한나절을 해마다 몇 차례씩 누려왔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응분의 위엄을 획득하는 것 아닐까요
공기 가득 미만한 볕이 되어 내 머리통을 간질이는 엄마, 엄마보다 진화된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내겐 이혼이었고 이혼 후 과연 내 일상은 격상했어요 비로소 아무 곳에도 끄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됐어요, 쑥을 캐다 말고 낮잠이 들어도 쑥속에 잡티가 들어도 개똥이 묻어도……… 온전히 내 책임 내 자유~한 세대 전 우리 집안 여자들의 책임과 자유를 전부 합한 것보다 나는 더 자유롭고 더 강력해졌어요
난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춥니다. 하루 한 편의 시 혹은 에세이를 쓰고 이틀에 한장 그림을 그리면 나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시장이 확보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느슨한 생산력으로도 내 한 입에 거미줄 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요.
난 엄마처럼 자취하는 시동생을 위해 안동읍까지 신작로 30리 길을 장작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지 않아요. 고모처럼 조카를 위해 전신거울을 등에 지고 대명동에서 산격동까지 골목길을 질주하지 않아요. 한달막씨처럼 취나물과 고사리를 뜯기 위해(장에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한달막 씨는 왜 많은 돈을 통장에 모았다고 소문났지만 결국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요) 하루 열두시간씩 산길을 헤매 돌지않아요
나도 긴 시간 걷고 질주하고 헤매 돌지만 시동생을 위해서도, 조카를 위해서도 더군다나 돈을 위해서는 천만 아닙니다. 두 발로 걷는 행위가 나를 우주와 밀착하게 만들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철학적 경험이 되어 흡족한 들숨날숨의 리듬을 만들어내기때문이지요
이건 내가 이제 별로 욕구가 없는 인간, 물질이든 정신이든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는지는알수없지만 어쨌든 봄볕 아래 쑥을 캐려고 엎드린 오늘 내게는 세상이 돈짝만합니다. 우리 집안 여자들 다 불러내 잔치라도 벌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말고는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아, 엄마가 반대하면 한달막씨는 부르지 않을게요 근데 아이 낳고 살았던 아버지의 ‘작은‘을 저쪽세상의 엄마가 간단히 내치지는 않을거라는 믿음, 이건 대체 뭐지요?
글쓴이 김서령
칼럼니스트,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한때는 국어교사였다가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얘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지금은 사라진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인물 인터뷰의 매력에 눈떠 인터뷰 칼럼을 주로 써 왔다. 천생 글쟁이이고 이야기꾼이었던 그는 숱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과일이 서리를 맞아야 단맛이 돌고 향기를 풍기듯, 인생도 고난 속에서 익어간다고 믿었다.
향토색 짙은 우리말을 마침맞게 구사하는 그의 글은 단아하고 그윽하면서도 생기발랄하고 영롱해서 많은 이들이 우리 시대의 일절로 꼽았다. 수년째 투병한 끝에 2018년 10월 영원한 자유, 를 찾아 떠났다.
펴낸 책으로 여자전》, 《안동 장씨, 4백년명문가를 만들다》, 《김서령의 家》, 《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참외는 참 외롭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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