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기존의 지배 형태를 재생성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이 남성과 공동 전선을 펴서 상호 해방을 불러와야 한다는 주장은 두 성별 사이의 모든 대화를 결정하는 권력관계의 혹독한 현실을 감춘다. 
남성 해방은 여성이 맡을 과제가 아니며, 먼저 여성은 스스로를 해방해야 한다. 
즉, 당장 화해라는 꿈에 회유되지 않고 대립의 원인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은 변화가 남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바꿔야 하고, 서로를 바꿔야 한다. 

오로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무엇이 남자에게 좋은지를 망각할 때만 여성의 의식이 변화할 것이다. 

남성과 협업해서 이러한 변화에 착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 투쟁의 범위와 깊이를 축소하고 하찮게 만든다.

여성이 바뀌면 남성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성의 변화는 상당한 저항 없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지배계급도 싸우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특권을 먼저 내려놓지 않았다.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남성의 특권 위에 세워졌고, 남성은 더 인간적이거나 공정한 결정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특권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들이 마지못해 양보하며 여성에게 ‘시민권‘
을 더 많이 부여할 수는 있다. 

오늘날 대다수 국가에서 여성은 투표할 수 있고 고등교육 기관에 다닐 수 있으며 전문직 훈련을 받을수 있다. 향후 20년 이내에 여성은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고(피임약에 자유롭게 접근하고 임신 중절을 합법화함으로써) 자기 몸을더욱 실실적으로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 P64

여성을 계속 2등 시민으로 만드는 근본적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남성 특권의 뿌리를 건드리지도 않는다.

진보적이 아니라 급진적인 여성의 지위 변화는 ‘본성‘의 신비를 폐지할 것이다. 
여성은 성 정체성과 결부되는 모든 고정관념을.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까지 전부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참정권과 계약 체결, 교육 기회, 고용에 관한) 구체적 상황에서의 여성 차별적 법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 형태와 성적 관습, 가정생활 개념을 바꿔야 하고, 여성을 향한 오랜 편견을 적나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언어 자체도 그대로 놔둬선 안 된다.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급진적이어도 언어를 쓸 때마다 남성의 우월함(능동성)과 여성의 열등함(수동성)을 계속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능동적 행위자는 남성으로 추정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옳다‘. 문법은 성차별적 세뇌의 궁극적 무대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여성의 존재를 감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성별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할 수 있는 경우에 반드시 "he"라고 칭해야 한다. "man"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을 지칭하며, "men‘
은 문학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브레히트의 시구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제목에 들어 있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이라는문장에서 men은 people이라는 뜻이다. 사실 훌륭하고 고결한 이 책에서아렌트가 다룬 열 명의 인물 중 여성은 두 명이다. 그러나 그중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은 남성적인 필명을 사용했고 또 다른 한 명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표지의 광고 문구가 새침하게 언급하듯 - P65

슬로건 중 하나가 가족의 신성함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가족이란 오직 가부장적인 ‘핵‘
가족만을 의미한다. 가정생활은 산업화된 도시 사회가 파괴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보존해야만 하는 바로 그 ‘인간적‘ 가치의 시대착오적 보호 구역이다.
자본주의(그리고 그 사촌 적인 러시아식 공산주의)는 살아남기 위해, 즉 시민에게서 생산성과 소비 욕구를 최대한 뜯어내기 위해, 사람을 소외시키는 가치를 계속해서 허용해야만 한다. 

따라서 경제적·정치적으로 무력한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러한 가치들에 특권적이거나 보호받는 지위를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 현대 핵가족이라는 형태 뒤에 숨은 이념적 비밀이다. 가족 단위는 수가 적고 너무 기본적인 역할만 남아 있고 생활 공간(전형적으로 방이 세개나 네 개인 도시 아파트)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경제 단위가 되거나 정치권력의 원천과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대 초기에 가정은 제단이자 의례 장소라는 오래된 역할을 상실했다. 
종교적 기능은 ‘교회‘가 완전히 독점했고, 가족 구성원은 개인으로서 집에서 나와 교회 활동에 참석했다. 18세기 말부터 가족은 자녀를 교육할 (또는 교육하지 않을 권리를 중앙 집권화된 국민국가에 양도해야 했고, 각 가족의 자녀는 개인으로서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 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하는 법적 의무를 졌다. 기본 가족이라고도 불리는 핵가족은 쓸모없는 가족이며, 도시산업 사회의 이상적인 발명품이다. 쓸모없는 것, 쉼터가 되는 것이 바로 핵가족의 기능 - P93

경제적·종교적·교육적 기능을 박탈당한 가족은 오로지 냉혹한 세상에서 감정적 온기를 제공하는 원천으로서만 존재한다.

가족 예찬은 순전한 위선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이념과 작동 방식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현대 가족은 이념적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기능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 가족은 스스로를 조종한다. 가정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을 전부 기반으로 일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가치들이 핵가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오늘날 만연한, 그 빈약한 형태의 가정생활조차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소외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무기한 작동하지 않는다. 가정생활이 보호해야 하는 가치들과산업 대중사회가 고취하는 가치들 사이의 모순은 결국 폭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가족은 할당된 과제, 가족의 현대적 형태를 정당화하는 바로 그 과제를 점점 더 형편없이 수행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윤리 박물관이라는 가족의 기능은 갈수록 저하되고 있으며, ‘인간적‘ 가치는 가족 내에서도 점점 새어 나가고 있다. 

산업대중사회는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는 가치들을 안전한 장소에, (성의상) 비정치적인 세도에 보관한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않다. ‘바깥‘ 세상의 산성이 너무 강해서 가족은 갈수록 부식되고있으며, 사회는, 예를 들면 모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의 균일한 목소리를 통해 직접 내부로 침투해 가족을 점점 오염시키고 있다.
가족이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에 가족을 ‘파괴‘해야 한다는 - P-1

집에 묶인, 내 남성 동료의 아내들에게서 간간이 느껴지던 질투와 분노를 제외하면 말이다. 내가 예외임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예외로 사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내가 누리는 혜택을 내권리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다.

나 같은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리 역설적인 일은 아닌데,
대다수 여성이 해방되지 않은 진보적 사회에서 ‘해방된‘ 여성으로 사는 삶은 당혹스러울 만큼 쉬울 수 있다. 재능이 많고 쾌활하거나 자의식이 고집스럽게 부족하면 자율성을 주장하는 여성이 겪기 쉬운 초기의 장애물과 조롱을 (나처럼) 피할 수도 있다. 이런 여성은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여성으로서 눈에 더 잘 띈다든지 하는 직업적 이득을 거둘지도 모른다. 이런 여성이 누리는 행운은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일부 흑인이 누리는 행운과 똑같다. 모든 진보적인 집단(그 분야가 정치든 직업이든 예술이든)에는 토큰이 될 여성이 필요하다.
나는 지난 5년간 (여성 운동의 도움을 받아) 나의 경험을 특정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내가 누린 행운은 요점과 아무 관련이 없다. 나의 경험이 무엇을 입증하는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자신의 특권적 상황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미 ‘해방된‘ 모든 여성은 다른 여성을 억압하는 데 일조한다.
나는 예술과 과학, 자유직, 정치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은 여성의압도적 다수가 다른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P-1

성공한 여성 대다수가 얼마나 여성을 혐오하는지를 느끼고 충격받은 적이 많다. 그들은 다른 여성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따분하고 피상적이고 성가신지를, 자신이 남성 동료를 얼마나 더 선호하는지를 열렬히 말하려 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을 경멸하고 아랫사람 보듯 하는 대다수 남성과 마찬가지로, ‘해방된‘ 여성들도 대개 다른 여성을 좋아하거나 존경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여성을 성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두려워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직업적 경쟁자로 여기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거의 남성으로 구성된 직업 세계에 입장이 허용된 여성이라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 ‘해방된‘ 여성으로 불리는 대다수 여성은 뻔뻔한 엉클톰 (백인의 억압에 순응하는 흑인을 의미하는 속어-옮긴이)이다.
그들은 남성 동료들에게 열심히 아침하며 자기만큼 성공하지 못한 다른 여성들을 깎아내리는 공범이 되고, 그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어려움을 거짓말로 축소한다. 
이런 행동은 다른 여성들도 노력만 한다면 자신처럼 성취를 거둘 수 있고, 남성이 세운 장벽은 쉽게 부술 수 있으며, 여성을 방해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 자신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해방된‘ 여성의 첫 번째 책임은 최선을 다해 가장 충실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책임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해방된 여성은 남성과 함께 살고 일하고 섹스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처한 상황을 현실보다 더 단순하거나 덜 의심스럽거나 타협으로 가득하지 않은 것처럼 묘

여성이라는 제3세계 - P101

사할 권리는 없다. 남성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다른 자매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 
(1973) - P-1

(물론 리펜슈탈이 말하는 누바족은 남성을 뜻한다) 여성과의•접촉은 불경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분수를 안다.

레슬링 선수의 약혼자나 아내는 남자들만큼이나 친밀한 접촉을피하고자 한다. 자신이 힘센 레슬링 선수의 신부나 아내라는 자부심이 욕정을 대체한다.
마지막으로, 리펜슈탈이 "죽음을 그저 운명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죽음에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않는" 사람들과 가장 열렬하고 호화로운 의례가 장례식인 사회를 피사체로 고른 것은 아주훌륭한 선택이다. 죽음 만세.

「누바족의 최후를 리펜슈탈의 과거와 분리하지 않는 것이 불쾌하고 악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리펜슈탈의 복권이라는 최근의 흥미롭고도 완고한 사건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의 연속선에서도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셀린과 벤, 마르티네티, 파운드처럼 파시스트가 된 다른 예술가들(팹스트와 피란델로,
함순처럼 힘이 약해지면서 파시즘을 수용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의 커리어는 리펜슈탈의 커리어만큼 교훈적이지 않다. 
리펜슈탈은 나치 시대와 완전히 동화되어 제3제국 시기뿐만 아니라 몰락 이후에도 30년간 자기 작품을 통해 파시즘 미학의 여러 주제를 꾸준히 - P-1

‘이상주의‘의 이름으로 사실주의를 경멸한다. 기념비적인 것과 대중의 영웅 공경을 애호하는 취향은 파시즘 예술과 공산주의 예술의 공통점으로, 이는 예술의 기능이 지도자와 그 원칙을 ‘불멸‘하게 하는 것이라는 모든 전체주의 정권의 관점을 반영한다.

웅장하고 딱딱한 움직임의 표현이 또 다른 공통점인데, 이러한 안무가 국가조직의 화합을 예행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형태를 갖추도록 디자인된다. 그러므로 대규모 시범경기와 연출된 신체의 전시는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활동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큰 인기를 끄는 체조선수의 기술 역시 힘을 억제하고 제한하는행위와 군사적 정확성처럼 파시즘 미학에서 반복되는 특징을 떠올리게 한다.

파시즘 정치와 공산주의 정치 모두 지도자와 합창단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 앞에서 의지를 연출한다. 

국가사회주의 하의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술이 정치적 필요에 종속되었다는 점이 아니라(그것은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 독재 정부에서도마찬가지므로) 정치가 후기 낭만주의 시대 예술의 레토릭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1933년에 괴벨스는 정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고결하고 종합적인 예술이며, 현대의 독일 정치를 형성하는 우리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과 예술가의 일은, 형성하고 형태를 부여하고 병든 자를 제거하고 건강한 자를 위해 자유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가사회주의 예술의 흥미로운 점은 전체주의 예술의 특수한 변종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들이다. 소련과 중국 같은 국가의 - P-1

파시즘예술은 신체의 완벽함을 통해 유토피아적 미학을 드러낸다. 나치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는 자주 누드를 묘사했지만 신체의 결점을 표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들의 누드 작품은 피지크 잡지(phy-sique magazine, 1950~1960년대에 발행된 헐벗은 근육질 남성들의 사진을 실은 잡지들옮긴이) 속 사진들처럼 보인다. 이 사진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섹스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기술적 의미에서는 포르노물인데,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건강함에 대한 리펜슈탈의 선전은 분명 이보다 훨씬 섬세하며, 나치 시대의 다른 시각 예술만큼 따분하지도 않다. 리펜슈탈은 다양한 신체 형태를 아름답게 여기며 아름다움의 문제에서 그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 실제로 <올림피아>에서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받는 다이빙 장면처럼) 양식화되고 매우 수월해 보이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결점을 수반한 노력과 안간힘까지 보여준다.

공식 공산주의 예술이 무성적이고 순결한 것과 달리, 나치예술은 외설적인 동시에 이상주의적이다. 유토피아적 미학(완벽한신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정체성)은 이상적 에로티시즘을 암시하는데, 
여기서 섹슈얼리티는 지도자의 마력과 추종자의 기쁨으로 전환된다. 
파시즘의 이상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성적인 에너지를
‘영적인‘ 힘으로 바꾸는 것이다. 
성적인 것(즉 여성)은 늘 유혹으로서 존재하며, 이 유혹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응은 성적인 충동을 용맹하게 억제하는 것이다. 리펜슈탈은 누바족의 결혼식이 화려 - P-1

한 장례식과 달리 의식도 연회도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누바족 남성의 가장 큰 욕망은 여성과의 합일이 아니라 훌륭한 레슬링 선수가 되어 금욕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누바족의춤 의식은 관능적인 행사가 아니라 생명력을 봉쇄하는 ‘순결의축제‘다.

파시즘 미학은 활력을 봉쇄하는 데서 나온다. 움직임은 제한되고 붙들리고 억눌린다.

나치 예술은 반동적이며, 금세기 예술이 이룬 주류적 성취를 대놓고 벗어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대적 취향의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나치회화 및 조각 전시(전쟁 이후로 처음이다)의 좌파 주최 측은 실망스럽게도 관람객들이 기대보다 훨씬 많고 전혀 진지한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브레히트의 교훈적 훈계와 강제수용소 사진을 나란히 배치했음에도, 관람객은 나치 예술을 보고 1930년대의 다른 예술 형식, 그중에서도 특히 아르데코를 떠올린다. 
(아르누보는 결코 파시즘 양식일 수 없다. 오히려 파시즘이 퇴폐적이라고 정의하는 예술의 전형에 가깝다. 가장 훌륭한 파시즘 양식은 선이 날카롭고소재가 투박하고 육중하며 에로티시즘이 석화된 아르네코다.) 
아르노 브레커(히틀러가 가장 좋아했으며 콕토도 한동안은 가장 좋아했던 조각가)와 요제프 토락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은, 맨해튼 록펠러센터 앞에 - P-1

근육질의 아틀라스 동상 및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보병들을 기리는 필라델피아 30번가역 앞의 다소 선정적인 기념비와 동일한 미학에서 제작되었다.
독일의 세련되지 못한 대중은 나치 예술이 단순하고 조형적이고 감정적이며, 지적이지 않고, 모더니즘 예술의 지나친 복잡성이 없어서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 
더 세련된 대중은 어느 정도 과거의 모든 양식, 특히 가장 비판받던 양식을 구제하려는 열정에서 나치 예술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르누보와 라파엘 전파 회화, 아르데코의 부흥에 뒤이어 나치 예술이 부흥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나치 시대의 회화와 조각은 훈계조일 뿐만 아니라 예술로서도 놀라울 만큼 빈약하다. 그러나 바로 이런 특성때문에 사람들은 나치 예술을 다 안다는 듯 킬킬대며 거리를 둔 채팝아트의 한 형태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리펜슈탈의 작품은 우리가 나치 시대에 제작된 다른 작품에서 발견하는 아마추어리즘과 순진함이 없지만 여전히 여러 똑같은 가치를 선전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현대적 감성으로리펜슈탈의 작품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 
팝아트 특유의 아이러니한 감각은 리펜슈탈 작품의 형식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 열의까지도 미학적 과잉의 한 형태로 바라보게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리펜슈탈의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제 자체에 반응하게 되고, 이러한 반응이 그의 작품에 힘을 부여한다. - P-1

●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틀림없이 대단히 훌륭한 영화지만(아마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중 가장 훌륭한 두 작품일 것이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 역사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사람 중 리펜슈탈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 (나를 비롯한 많은 영화감독이 지가 베르토프를 영화 언어에 대한 무한한 자극제이자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여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베르토프가<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처럼 순수하게 인상적이고 짜릿한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는 주장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물론, 베르토프는 리펜슈탈만큼 마음껏 자금을 쓸 수 없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소련 정부의 선전영화 제작 예산은 전혀 풍족하지 않았다.)좌파와 우파의 선전 예술을 다룰 때는 종종 이중 잣대가 적용된다. 
베르토프의 후기 영화와 리펜슈탈의 영화가 감정을 조작하는 방식이 비슷한 쾌감을 낳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왜 감동적인지를 설명할 때대다수가 베르토프에게는 감상적이고 리펜슈탈에게는 부정직하다. 이처럼 베르토프의 작품은 전 세계의 시네필 관객에게 상당한 도덕적 지지를 끌어내며,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작품에 감동한다. 리펜슈탈의 작품을 감상하는 비결은 영화에서 유해한 정치 이념은 걸러내고 ‘미적‘ 가치만 남기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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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누구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이라면 가능하다.

단 한 번의 완벽한 비상에 인생을 건
프리마 발레리나의 마지막 도약
2년 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후 무대를 떠난 세계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레오노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그를 무너지게 했던 연인들, 끝내 버리지 못한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리고 다시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사람들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길은 재기일까. 또 다른 추락일까.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받은 김주혜의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삶이라는 예술에 바치는 헌사다. 
시련 속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에 대한 비유이자, 깊은 상처를 감내할 만큼 간절한 순간을 지나온 우리 모두의 찬란한 삶에 대한 은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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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시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제목. - P-1

강물의 개인사

강은 자기 자식들을 만들면서 흘러간다

반쯤 강에 발을 걸친 미루나무를 낳기도 하고검은 조약돌을 낳기도 하고

물고기들의 혼잣말 같은
외로운 알을 낳기도 한다
하루살이의 생애와
물새의 날개를 낳고
잠겼다가 떠오르는 길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무너지는 인간과 그 인간의 이야기를 낳는다

아픈 마을을 낳고
검은 도시를 낳는다

굴뚝과 네온 불빛과 고무풍선 어지러운 유역을 낳고 - P-1

어부의 탄식과
전설 같은 노래를 낳는다

강이 만들어낸 자식들
누가 이들을 기억해줄까

훌륭한 순간들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하구 끝
밤하늘이 밝게 빛나는 건

강에서 태어나 강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 P-1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언하고 싶었다

시는 그랬다. 
모든 시는 불온해야 하고 
모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불온한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다.

내 모든 시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바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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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다. 나는처치실에서 임종을 맞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바로 옆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편되었지만, 그는 골방과 다를 바 없는 처치실에서 눈을 감았다.
저렇게 죽을 순 없다. 
당시 스무 살도 되지 않던 나에게 각인된 생각이었다. 

‘처치실‘에서의 죽음이 흔하디 흔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나의 죽음은 내가 정하겠다는 의지가 커졌다. 
살리고 죽이는 힘을 가진 이들 국가자본·의료 체계에서 벗어나 나의 죽음을 결정하고 싶다. 그건 나의 일생을 휘어잡는 권력에 더는 나를 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마지막까지 해보는 발버둥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단식 존엄사라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한 사람이 아니기에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농담삼아 이런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런데 며칠 굶다가, 안 되겠다 하면서 라면 한 봉지 끓여 먹을수도 있어."
이에 한 친구가 진지함을 가장해 말했다.
"그때가 되면 집에 라면 한 봉지도 없을 수 있어."
단식 존엄사가 아니라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진 않았다.  - P-1

병원에 입원하여 마지막을 보내고 처치실 골방에서 죽는 삶이 두려웠던 내게는 1인 재택사라는 발상의 전환이 반가웠다. 

그런데 1인 재택사가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장기요양보험 같은 노년·간병 보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혼자 죽겠다는 나를 비난하거나 뜬눈으로 염려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있더라도 설득과 협상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이해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복지망과 관계망이 존재해야 한다는 소리다. 어떻게 죽기를 원하건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집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라고 슬퍼했고,
오늘날엔 집에서 죽으면 잘못된 죽음처럼 여긴다. 그러더니 새로이 ‘홀로 집에서 죽기를 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객사의 개념을 널리 받아들인 건 데파코트가 쓴 〈죽음의 위계화에 저항하며>를 본 이후였다. 단정적이고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선언문은 ‘집을 떠나 맞는 죽음‘을 이리 말했다.
"집이 없는 존재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집이 없는 존재들이 존재한다. 세상이 그들의 ‘집‘이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이들의 죽음은 집이라는 물질성과 무관하게
‘객사‘다. 그렇다면 객사는, 내가 원하고 선택한 곳이 아닌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장소는 시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과 기억, 가치와 관계등 유·무형의 상호작용으로 장소성이 만들어진다. 우에노 지즈코가 말한 집은 주택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내가 주체적으로 꾸려온, 안전하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공간의 상징이 집이다. - P-1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닐까. 삶은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분투의 연속이다. 열심히 싸웠고, 이제 고요하게 떠나면 되는 일인가. 산뜻하다. 산뜻하긴 한데 좀 헛헛하다. 시끌벅적한 것이 인생인데 너무 고요해서일까.

편하고 고요한 1인실을 두고 6인실 병실에 입원하는 이유는 단지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가족이나 간병인이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인실 병실에서 돌봄은 순환한다. 옆자리 빙상의 가족이나 그쪽 간병인이 내 침대를 올려주기도 하고, 환자인 내가 옆자리 환자를 위해 간호사를 불러오기도 한다. 사람이 있는 곳엔 어디든 돌봄이 있다. 주검이 들어가는 관은 ‘1인실‘일 수 있어도 삶은 1인실이 아니다. 1인실에 머물 수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리고 돌봄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 시간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우리의 안온한 집은, 여럿의 확장된 돌봄이 없다면 마련되지 않는다. 그러니 혼자 죽지만 혼자 죽는일 같은 건 없다.

시민 조문단 혼자 죽지 않는 사람은 혼자 떠나지 않는다.

 사람 속에서 내 뜻대로 죽는 일을 찾아다니던 내가 당도한 곳은 ‘부산반빈곤센터‘다.
빈곤한 죽음을 보러 왔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아니긴 한데 반빈곤센터가 기획한 강의에서 처음 접한 내용은 이주노동자 홈리스이야기였다. 체류 기간을 넘겨 미등록 신분이 된 이주노동자가 머물 곳이 없어 노숙을 했다. 그렇게 홈리스가 된다. 있을 법한 상황인데, 외국인 노숙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다. 내가 언제 홈리 - P-1

우아하게, 불온하게, 나답게 죽을 수 있을까?
마지막은 똑같다는 말이 가린
죽음과 애도의 위계에 관하여

죽음과 장례에 관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시선이 버려낸 사유와 기록은 죽음과 애도라는 흔한 현장 속까지 ‘사회적 성원권‘이라는 의제를 붙들고 들어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돌봄과 사회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독자들의 질문을 확장하게 한다. 죽은 자와는 이미 무관해져 버린
‘죽은 다음‘에 관한 희정 작가의 
치밀하고 냉철한 기록이 
산 자들 사이에서 거듭 읽히고 토론되며 
참고가 이어지기를 뜨겁게 권한다.
_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죽음에 관한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나하나의 죽음과 한사람 한 사람의 삶은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장례지도사, 의전관리사, 수의 제작자 등 죽음 곁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동 현장을 비추고, 이 시대의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죽음까지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삶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역설에 도달한다. 
죽음의 불평등으로부터 삶의 불평등을 샅샅이 살피는 작업은 삶과 죽음이 모두 존중받는사회를 꿈꾸게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입말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산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으로 변모한다.
오은 시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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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이 오지 않아도 온 거고, 
오면 더 좋고,
꿈은 마음속에 이미 이룩한 것을
미래에 단지 물리적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겠는가?
수많은 원자로 인간이라는 물질이 이루어졌다.
인간의 꿈은 원자들의 패턴이고 작용이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꿈을 꾼다.
아니 우주가 꿈을 꾼다.
꿈이 물질로 변하기도 하고
물질이 꿈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우리는 이미 꿈을 이룩하였다.
방방곡곡 그리운 건 언제나 상처에서 오고,
꽃은 너무도 불안하여 그만 예뻐져 버렸다.
김주대(시인) - P-1

남편과 자식들의 밥을 밥상 위에 차려주고
여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언제나 밥상 아래 자신의 밥그릇을 놓습니다정성껏 만든 반찬들 그릇마다 따로 담아
밥상 위에 올려주고
대부분 전날 먹다 남은 것들인 자신의 반찬은바가지나 쭈그러진 양은그릇에 쓸어 담아
밥상 아래 놓습니다
가끔 올리는 생선은 가사를 발라내어
남편 밥그릇에도 놓아주고 자식들 입에도 넣어줍니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여자는 가시만 남은 생선을 이리저리 몇 번 할아 봅니다
즐거운 식사 시간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반찬을 다 먹고도 여자의 젓가락은
밥상 위의 반찬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 P-1

감히 가지 않습니다
밥만 남은 자신의 그릇 이곳저곳을 짚어볼 뿐입니다
남편의 다섯 아이를 낳아주는 동안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동안
자식을 입히고 먹여 시집 장가 보내는 동안
여자는 숟가락 젓가락도 밥상 위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열여덟에 시집와 아내로 어머니로 산 지 40년
장성한 자식들이 모두 객지로 떠나고
사랑하는 남편이 죽고
여자는 혼자가 되어 밥을 먹습니다
살아온 버릇으로
바닥에 밥그릇을 놓고 먹습니다
여자는 허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다녀온 어느 따스한 봄날
여자는
부엌 한쪽에 놓아둔 먼지 앉은 밥상을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지난날을 바라보듯 바라봅니다
죽은 남편과 객지로 떠난 자식들을 바라보듯밥상을 바라보던 여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밥상을 빛나게 닦아
방 한가운데 놓습니다 - P-1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밥상 위에 차립니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별도 밥상 위에 차립니다
밥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여자는 자식들 대신이라는 듯
죽은 남편 대신이라는 듯
밥상 앞에 정좌하고 천천히 수저를 듭니다
밥상의 높이 30센티미터
여자의 밥그릇과 수저가
그 높이를 오르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여자는 지난날을 씹듯 밥을 오물오물 씹어 먹습니다
우리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 전문 - P155

옛날에 길가에 코스모스 피고
잠자리 노랗게 날던 가을이 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 나는 늙고 있다
귀향 의지, 전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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