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다. 나는처치실에서 임종을 맞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한다.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바로 옆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편되었지만, 그는 골방과 다를 바 없는 처치실에서 눈을 감았다. 저렇게 죽을 순 없다. 당시 스무 살도 되지 않던 나에게 각인된 생각이었다.
‘처치실‘에서의 죽음이 흔하디 흔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나의 죽음은 내가 정하겠다는 의지가 커졌다. 살리고 죽이는 힘을 가진 이들 국가자본·의료 체계에서 벗어나 나의 죽음을 결정하고 싶다. 그건 나의 일생을 휘어잡는 권력에 더는 나를 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마지막까지 해보는 발버둥이라고 할까.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단식 존엄사라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한 사람이 아니기에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농담삼아 이런 말을 덧붙이곤 했다. "그런데 며칠 굶다가, 안 되겠다 하면서 라면 한 봉지 끓여 먹을수도 있어." 이에 한 친구가 진지함을 가장해 말했다. "그때가 되면 집에 라면 한 봉지도 없을 수 있어." 단식 존엄사가 아니라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진 않았다. - P-1
병원에 입원하여 마지막을 보내고 처치실 골방에서 죽는 삶이 두려웠던 내게는 1인 재택사라는 발상의 전환이 반가웠다.
그런데 1인 재택사가 성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장기요양보험 같은 노년·간병 보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혼자 죽겠다는 나를 비난하거나 뜬눈으로 염려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있더라도 설득과 협상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이해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복지망과 관계망이 존재해야 한다는 소리다. 어떻게 죽기를 원하건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집에서 죽지 않으면 객사라고 슬퍼했고, 오늘날엔 집에서 죽으면 잘못된 죽음처럼 여긴다. 그러더니 새로이 ‘홀로 집에서 죽기를 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객사의 개념을 널리 받아들인 건 데파코트가 쓴 〈죽음의 위계화에 저항하며>를 본 이후였다. 단정적이고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선언문은 ‘집을 떠나 맞는 죽음‘을 이리 말했다. "집이 없는 존재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집이 없는 존재들이 존재한다. 세상이 그들의 ‘집‘이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이들의 죽음은 집이라는 물질성과 무관하게 ‘객사‘다. 그렇다면 객사는, 내가 원하고 선택한 곳이 아닌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장소는 시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과 기억, 가치와 관계등 유·무형의 상호작용으로 장소성이 만들어진다. 우에노 지즈코가 말한 집은 주택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내가 주체적으로 꾸려온, 안전하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공간의 상징이 집이다. - P-1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닐까. 삶은 그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분투의 연속이다. 열심히 싸웠고, 이제 고요하게 떠나면 되는 일인가. 산뜻하다. 산뜻하긴 한데 좀 헛헛하다. 시끌벅적한 것이 인생인데 너무 고요해서일까.
편하고 고요한 1인실을 두고 6인실 병실에 입원하는 이유는 단지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가족이나 간병인이 상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6인실 병실에서 돌봄은 순환한다. 옆자리 빙상의 가족이나 그쪽 간병인이 내 침대를 올려주기도 하고, 환자인 내가 옆자리 환자를 위해 간호사를 불러오기도 한다. 사람이 있는 곳엔 어디든 돌봄이 있다. 주검이 들어가는 관은 ‘1인실‘일 수 있어도 삶은 1인실이 아니다. 1인실에 머물 수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돌봄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그리고 돌봄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 시간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우리의 안온한 집은, 여럿의 확장된 돌봄이 없다면 마련되지 않는다. 그러니 혼자 죽지만 혼자 죽는일 같은 건 없다.
시민 조문단 혼자 죽지 않는 사람은 혼자 떠나지 않는다.
사람 속에서 내 뜻대로 죽는 일을 찾아다니던 내가 당도한 곳은 ‘부산반빈곤센터‘다. 빈곤한 죽음을 보러 왔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아니긴 한데 반빈곤센터가 기획한 강의에서 처음 접한 내용은 이주노동자 홈리스이야기였다. 체류 기간을 넘겨 미등록 신분이 된 이주노동자가 머물 곳이 없어 노숙을 했다. 그렇게 홈리스가 된다. 있을 법한 상황인데, 외국인 노숙자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다. 내가 언제 홈리 - P-1
우아하게, 불온하게, 나답게 죽을 수 있을까? 마지막은 똑같다는 말이 가린 죽음과 애도의 위계에 관하여
죽음과 장례에 관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시선이 버려낸 사유와 기록은 죽음과 애도라는 흔한 현장 속까지 ‘사회적 성원권‘이라는 의제를 붙들고 들어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돌봄과 사회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독자들의 질문을 확장하게 한다. 죽은 자와는 이미 무관해져 버린 ‘죽은 다음‘에 관한 희정 작가의 치밀하고 냉철한 기록이 산 자들 사이에서 거듭 읽히고 토론되며 참고가 이어지기를 뜨겁게 권한다. _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죽음에 관한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나하나의 죽음과 한사람 한 사람의 삶은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장례지도사, 의전관리사, 수의 제작자 등 죽음 곁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동 현장을 비추고, 이 시대의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죽음까지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삶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역설에 도달한다. 죽음의 불평등으로부터 삶의 불평등을 샅샅이 살피는 작업은 삶과 죽음이 모두 존중받는사회를 꿈꾸게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입말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산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묵직한 질문으로 변모한다. 오은 시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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