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의 어느 중요한 결정을 두고, 나는 아내의 동의를 구한 일이 별로 없다.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하는 사소한 말은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일들을 제대로 상의하지 않았다. 홀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대학을 그만둘 때도 "나 대학에서 나와도 될까?"가 아니라 "나 대학에서 나오려고 해"라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믿어달라고 자주 말했다. 가족이 가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내가 감당하고 끌어올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고, 서로를 바라보며 지쳐갔다. 
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인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또 그들의 삶을 대리로 격하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새벽에 아내는 어디냐고 묻고는 나를 픽업하러 왔다. 아이는 잠들었고 내가 늦게까지 오지 않아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1시간은 걸어갈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정말 고마웠다. 그래도 두 돌이 된 아이를 두고 밖에 있는 것이 걱정되어 서둘러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아내는 일을 그만두면 안 될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나 내가 대리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글로 쓰겠다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연구자로 있는 동안, 외로운 한 존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들이 상처받기 이전에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추억이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주와는 달리 나의 발이 되어주는 수단 무엇보다 광역버스‘는 정말 감사한 존재였다. 김포 남분당 어디 할 것 없이 서울 광역버스가 반드시  있었다.
그래서 12시 이전에만 운행을 마치면 강남, 사당, 서울으로 돌아가는 광역버스를 탈 수 있었다. 김포에서 합정까지 버스가 15분만에 도착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여러모로 지하보다 나았다.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출발할 때까지 1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도 있었다. 처음 탔을 때는 버스를 꽉 채운 사람들이 거의 취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대리운전 기사들이었다. 
다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먼저 콜을 잡으려고 간절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콜이 들어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뻐꾸기 알림음이 났다. 정류장마다 한두명씩은 ‘네. 곧 갑니다‘ 하는 전화를 하면서 내렸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만큼 버스에 올랐다.

지하철은 생각보다 늦게까지 다녔다. 판교에서 신분당선 막차가12시 53분까지 있고, 그걸 타면 15분 만에 강남역까지 도착한다. 광교 테크노벨리, 정자역에서 각각 서울로 올라가는 골을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들이 하나둘 막차에 올라탔다. 
강남행 막차에 오르면 승객의20퍼센트는 나와 닮은 아들이었다. 대개는 핸드폰을 손에 꼭 붙잡고

조교 아르바이트에게 명절 선물을 받는 교직원

나는 그동안 명절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8년 봄부터 2015년 겨울까지 8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언제나 노동자였다. 

학과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는 행정 노동을 했고 강단에서는 강의 노동을 했다. 학생과 노동자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었다. 하지만 교직원도 교수도 나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 수준의 사회보장이 대개 간단히 무시되었지만 학생/연구자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태도였다.

명절이면 교수와 교직원, 그러니까 정규직들에게는 학교마크가 선명한 명절 선물이 나왔다. 그들은 그것을 들고 고향으로 갔다. 그들이게 상여금이나 교통비 명목의 명절 보너스가 따로 지급되었는지는 잘모르겠다. 다만 대학원생 조교들은 마지막까지 학과사무실에 남아 있다가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나는/우리는 명절에도, 그리고 명절이 아닌 일상에서도 언제나 대학의 숨은 노동자였다.

작년 명절에도 대학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휴강하지 말라는 권고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그런데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면담을 신청한 학생이 있었다. 대학 부처에서 근로조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는 고민이 있다면서 나에게 카카오톡 대화창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인당 3만 원씩 걷어서 교직원 선생님들 추석 선물을 사드립시다.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분들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죠?"


나는 기독교 문학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딱히 종교가 없으면서도 기독교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논문을 쓰면서 성경을 종종읽었는데, ‘신명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율법‘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정말이지 기뻤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시기에도 노동의 대가를 제때 지불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두 알았고, 그것이 노동자를 주체로 대하는 방식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합리와 상식으로 가려진 구조 안에서 개인/노동자는 더욱 주체성을 잃고 소외된다. 
말하자면 주체가 아닌 대리가 되어간다. 이것은 우리 시스템의 문제인 동시에, 창작자/연구자의 수고로움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두 달 전에 쓴 글의 원고료와 어제 한 대리운전의 품삯을 같은날 지급받는다. 어느 편이 더 상식과 합리인지는 명확하다. 타인의 운전석이, 우리가 믿는 그 어느 합리적인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인간을 주체로서 대우한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핀,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씨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에는 출연자들이 외국을 배경으로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미국적인 음식을 먹고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의 맛집이나 거리로 간다. 평범한 냉장고에서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재료를 꺼내 몇 분 만에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상의 공간에까지 이제 그들은 침투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무기 삼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데, 너도 그렇지?"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고 여기게 된다. 
일상을 특별하게 재현한 지금의 먹방은 보는 이들 더욱 외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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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주체로서 존재해야 할 소중한 공간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에 친구의 집에놀러 갈 때면 
냉장고 문을 함부로 열지 말 것을, 
그리고 그 부모님이주무시는 안방의 침대에는 절대 올라가지 말 것을, 
몇 번이고 주차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봉틀과 아버지의 서재 주변에는 원만해서는 어린 나와 동생이 오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 역시 자신의 공간에서 주인이 되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타인의 공간을 존중해 주었던것이다.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는, 그래서 외롭다. 조수석에 앉은 차의 주인도 함께 외롭고 민망할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되고 손님은 주인의역할을 대리하며, 그렇게 서로의 가면을 바꿔 쓰고 목적지까지 간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은 모두 겪어본 바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상대방을 확대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카카오드라이버의 홍보 영상에 등장하는 기사와 손님의 표정은 그러한 위화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공간에서 마주한 이들이 지을 수있는 복잡한 표정일 것이다.
그래도 ‘환대‘는 가능하다. 언젠가 자신을 관악구의 경찰공무원이라고 소개한 이는 나에게 선생님의 차라고 생각하고 편안히 운전해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그 공간에서 일어날 수있는 가장 역설적인 발화이자, 그 뒤틀린 공간의 주체가 베풀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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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시는 나무나 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있는 인간 언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위해서 말한다는뜻이다. 시는 개별 인간의 관계를 어떤 대상(돌멩이든 강이든 나무든)과 관련지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있고, 아니면 그저 대상을 최대한 진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시는 내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과학은 밖으로 풀어내어 해설하고, 시는 안으로 풀어내어 함축한다. 둘 다 묘사 대상을 기린다.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어둠의 왼손에서 어슐러는 "어떤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배우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압박과 어둠의 사절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문학비평 강연에서-과학과 환경에 대해서든, 구글과 아마존에 대해서든. 페미니즘과 문학의 정전에 대해서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 영역에서 어슐러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모든 예술가, 아니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답 없는 존재를 대변해 말하는 것 같다.

논픽션에 대한 이 대화를 끝내면서 나는 소설, 시, 논픽션이라는 세 장르 모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말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도. 사실은 달리 누구와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는데요!" 어슐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책이 나왔다. 

어슐러 K. 르 귄의 사색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세상에 나온 오브제가 되어 우리 손안에 펼쳐졌다.

맥코이 크리크에서의 사색

단어 안의 의미를 찾다가, 나는 추측했다:그곳 그 성스러운 장소 안에신전이 있음을 온전히 목격하고,
따라서 목격된 바의 제단이 된 신전,
개울 옆 그늘 속에서 나는 사색한다이번 초여름 높은 곳에서 흘러온 큰물이어떻게 물길을 바꿨는지에 대해.
개울 속 커다란 바위 네 개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버드나무들은 무성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범람한 물속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뿌리 뽑히기도 했다.
계곡 위 환한 빛 속에서는까마귀 한 마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다그림자 날개가 까마귀처럼 고요히벼랑 끝 바위를 가로지른다. 사색은나에게 불연속이라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책안을 보았을 때 나는 발견했다.

시간이란 관측되고 구별된 신전시간 자체와 공간이라는 것을—네 개로 나뉜 하늘, 벽에 둘러싸인 땅에성스러운 장소를 만들기 위한 신전연속성에 합류하기 위해, 마음은물을 따라가고, 새들을 좇고,
움직이지 않은 바위를, 절묘한 비행을 관찰한다.
느리게, 침묵 속에서, 말없이,
장소와 시간의 제단이 올라간다.
자아는 사라져, 찬미를 위한 제물이 되고,
찬미 자체도 적막 속에 빠져든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아마 선거 이후에는 당연히더 강해졌을 텐데, 시대가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죠. 그 변화는 아주 예측하기 어렵고, 상당히 무섭기도 해요. 나쁜 시절에 예술에 일어나는 일은, 특히 언어에술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무척 중요해질 수 있어요. 나쁜시절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니까요. 전 그동안제게 아주 중요했던 책,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려봐요. 그책은 중국에서 아주 힘든 시절에 나온 산물이에요. 아마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텐데요. 내전과 침략이 계속되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노자는 사실 고국에서 추방된 신세였어요. 노자에 관한 신화에서는 그래서 그 책을 썼다고 해요. ‘바깥 세계‘
로 넘어가기 전에, 국경선에 있는 어느 여관에서 하루인가 이틀 밤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 생각했죠. 그래, 모든 게 나빠지고 있을 때는 그에 대한 증언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제가 정말, 정말 말하고 싶은게 뭔지 알아내야 했죠.

네이먼
그리고 아직 모르는 분이 있으시다면 말이지만, 그 연설은 입소문을 타고 전 세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됐습니다.

르 귄
그래요. 그게 제가 잠시 누린 명성이죠. 정말이지 깜짝 놀랐어요. 그 방에 있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듣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 방에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언론인이고, 이야깃거리를 들으면 알아본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죠.

「사용 설명서」 중에서

시인이 대사로 지명됩니다. 극작가가 대통령으로선출됩니다. 새로 나온 소설을 사려고 건설노동자들이 사무장들과 같이 줄을 섭니다. 어른들이 전사원숭이들, 애꾸눈 거인들, 그리고 풍차와 싸우는 미친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잡이와 지적인 도전을 찾습니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 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책 속의 짐승」 중에서

왜 대부분의 아이와 많은 어른은 진짜 동물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 양쪽에 반응하고, 우리의 지배 종교와 윤리들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라고만 보는 존재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할까요. 산업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우리와 일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 식량의 원재료나 우리에게 이득이 될과학 실험 대상, 동물원과 TV 속 자연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진기한 존재들, 우리의 심리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두는 애완물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주고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건, 우리가 아이들을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로, 정신적인 ‘원시‘인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린 애완동물과 동물원과 동물 이야기들을 어린이가어른으로, 배타적인 인류로 발전하는 길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보는 거죠. 지성도 없고 무력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지적인 성숙과 지배의 영광을 획득하기까지 거쳐야 할 사다리쯤으로요. 존재의 대 사슬만물이 가장 낮은 무생물부터 가장 높은 신까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질서를 이룬다는 개념이라는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하

는 개체 발생이랄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건 뭘까요. 아기 고양이를보고 흥분하는 아기, 피터 래빗」을 또박또박 읽는여섯 살짜리, 『블랙 뷰티』를 읽으면서 우는 열두 살짜리라면? 문화 전체가 부정하는데 그 아이는 알아차리는 게 무엇일까요?

「사라지는 할머니들 중에서

예외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아주 잦다. 표준은 남성이다.
여성은 표준의 예외, 표준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이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그녀가 예외임을 보여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 어떠한 ‘컬트‘의 대상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마음을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이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

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의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

밤중에 뭔가가 그녀를 깨웠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주 천천히 게단을 오르는...... 그런데 누구지? 왜 신발이 젖었지? 비는 오지 않았는데, 저기, 다시 그 무겁고 젖은 발소리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폭염만 계속됐는데, 갑갑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아니 썩은 내인가, 아주 오래된 살라미 아니면 초록색이 되어버린 간 소시지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썩은 내. 아, 또다. 빽빽 소리가 나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썩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뭔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을 뚫고 나온 발꿈치뼈가 부딪치는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데, 죽었단 말이야! 저주받을 셰이본. 다른 진지한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것의 오염된 손길에서 진지한 문학을 구하기 위해 묻어놓았더니 그걸 무덤에서 끌고 나왔어. 그텅빈 데다 뾰루지투성이인 얼굴, 썩어가는 눈동자의 무감각하고무의미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셰이본 그 바보는 뭘 한다고 생각한 거야? 진지한 작가들과 진지

한 비평의 끝없는 의식들에 관심도 안 둔 거야? 공식적인 추방 의식들에 반복된 저주, 심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한 말뚝들, 신랄한 비웃음, 무덤 위에서끝도 없이 춘 엄숙한 춤들에 하나도 관심을 안됬어? 그 작자는 야도Yinddo, 뉴욕의 예술가 커뮤니티의 순결을 보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사이파이와 반리얼리즘 소설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도못 한 거야? 코맥 매카시는 비록 터무니없이 애매한 어휘를 훌륭하게 사용해대는 걸 빼면, 그의 책에있는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나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다룬 많고 많은 초기 SF 작품들과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파이 작가라곤 할 수 없다는 걸, 코맥매카시는 진지한 작가고 그러니까 정의상 장르를 쓴다는 품위 떨어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셰이본은 어떤 미친 멍청이들이 퓰리처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주류‘라는 말의성스러운 가치를 잊어버렸단 말이야? 아니다, 그녀는 빽빽 젖은 발소리를 내며 침실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그녀를 굽어보는 그 물건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로켓 연료와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고향 크립톤에서 온 물질로, 슈퍼맨의 힘을 약화한다의 악취가 풍기고, 세찬바람 속 황야의 낡은 저택처럼 삐걱거리며, 뇌는 과일처럼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두 귀에서 작은 회색

세포들을 뚝뚝 흘리는 그 물건을. 하지만 그녀의 주목을 요구하는 그 물건의 힘은 강력하고, 그 물건이손을 뻗자 그녀는 반쯤 썩은 손가락 하나에 낀 타는 듯한 금반지를 보았다. 그녀는 신음했다. 어떻게그 물건을 그렇게 얕은 무덤에 묻고는, 버려두고 그냥 걸어올 수가 있었을까? "더 깊이 파요, 더 깊이파!" 그렇게 외쳤건만, 그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꼭 필요한 다른 진지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녀의 『율리시스』 책은 어디있을까? 침대 옆 협탁 위에는 독서등을 받치는 데쓴 필립 로스 소설책 한 권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얇은 책을 들어 끔찍한 골렘히브리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을하고 움직이는 존재. 현대 판타지에서는 종종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흙 인형이나 괴물을 가리킨다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그걸로는 부족했다. 필립 로스도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괴물이 비늘 덮힌 손을 그녀에게 얹자 반지가타는 석탄처럼 그녀를 지켰다. 장르가 그녀의 얼굴에 시체의 입김을 불어넣자 그녀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럽혀졌다.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그녀는이제 결코 문예지 집필 의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환상 속 세계의 리듬부터 현실의 깊은 울림까지그만의 상상력으로 우리 행성을 기렸던어슐러 K. 르 귄의 마지막 목소리

지구에서 소멸하고 있는 ‘인간‘ ‘상상력‘ ‘여성의 글쓰기‘를 바라보는 어슐러 K.
르 권의 시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분히 SF적이다. 세상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SF를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이 담대하고 유쾌한 인터뷰가 SF에 대한 겁근으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의 접근으로 모두에게 읽히기를 소망한다.
-천선란 소설가

작가 인생의 마지막에 데이비드 네이먼과 주고받은 이 대화를 번역하다 보니 오래전에 부친 편지의 답장이 아주 늦게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인터뷰 전체가 글쓰기에 집중하고는 있지만, 짧은 답변에서도 켜켜이 묵은 고목 같은 작가의 삶 전체가 배어나기 때문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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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책의 창이 열렸을 때 창작자 보호를 위해 시도했어야하는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창작자에게 최후의 보루이자, 최선의 안전망인 「저작권법」의 개정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저작재산권의 양도는 유효하며, 별다른 제한이 없다. 사적자치의 원칙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의 저작권법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독일 「저작권법」에 의하면, 저작권의 양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프랑스 지식재산권법」에 의하면 장래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의 포괄적 양도는무효이다. 저작권 양도 계약 시 양도되는 권리도 이용 목적과 범위및 이용 장소와 기간으로 제한되며, 그 요건이 결여되면 무효라고

본다. 23536우리나라도 이제 ‘모든 권리에 대한 기간 제한 없는 포괄적인 양도 계약‘은 무효라든지, ‘양도 계약의 기간을 5년으로 한정‘하는 등양도 계약의 범위와 기간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의 저작권법개정이 필요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저작권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정부의 의지가 없어 번번이 폐기되었다.) 설사법을 잘 몰라서, 혹은 현실적인 힘의 관계 때문에 창작자가 잘못된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작권을 되찾아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저작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는 창작자에겐 형벌이나 행정벌로 정부가 상대방을 처벌하는 것보다 훨씬 실효적인 권리구제 수단이다. 비록 당장은 누군가를 처벌한다는 속 시원함도 없고, 산업계의 반대도 많으며, 법 개정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정공법이 필요하다. 나는이 사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놓치고 정책의창이 닫혀버린 게 못내 아쉽고 원통하다.
문체부는 항상 ‘창작자 보호‘가 최우선 과제라고 말한다. 당연한이야기다. 문화의 근간은 바로 창작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발전 역시 중요한 가치이지만 방송, 미디어, 콘텐츠, 플랫폼 업계

는 문체부가 아니더라도 방통위, 산자부, 중기부 등 정부 내에 아군이 될 만한 조직이 많다. 하지만 창작자는 문체부가 아니면 전적으로만들어 줄 곳이 없다. 따라서 정부 내 이견을 감수하더라도 문체부는 창작자의 편을 드는 것이 타당하고도 마땅한 태도다. 조직이 지닌 본연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간 문체부가 한 일을 보면 과연 창작자 편을 제대로 들고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 주요 선진국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음악을 재생하면 원칙적으로 음악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공연권)가 발생하고, 예외적으로만 그 공연권이 제한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저작권법」의 경우엔 그와 반대다. 원칙적으로 공연권이 제한되고, 카페 등에서만 예외적으로 발생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공연에 대한 원칙 제한 및 예외적 보장의 형식‘은 그간창작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EU(유럽연합)에서 우리나라에 단골로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해당조항은 일본의 구(舊) 저작권법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평가도많은데, 일본은 공연권을 제한하는 해당 조항을 1999년 폐지하였는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공연권 제한의 근거가 되는 「저작권법」 제29조 제2항은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되

었지만, 끝내 합헌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법이 개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하지만, 저작권료를 부담해야 하는 소상공인 등의 반발이 두렵다는 이유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러한 예시는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는 세계 6위권의 음악 강국이지만, GDP 대비 음악 저작권료 비중은 0.017%로 세계 33위에 불과하다. 정부가 승인하는 저작권료가 지난 10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문체부의 일상은 그래서 거짓말이다.
구름빵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창작자보호 차원에서 저작권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창작자 보호라는 본연의 기능을 제외하면 문체부의 존재 의의에 무엇이 남을까.
솔직히 산업의 지원이나 보조금 집행은 다른 부치나 지자체에서 많아도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공주식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않아도 웬만해서는 없어지거나 대체되지 않는다. 충격적인 사건이일어나고 비난 여론이 드세어진 배도 있지만, 그때의 바람만 잘 피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공직사회와 관료는 반복된 학습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대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졸속 대책이 판을 친다.

내가 3부에서 적었던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이 정책 실패의 주된요인은 관료제의 뿌리 깊은 무책임과 단기적 성과주의에 기인한다.
여론이 들끓을 때는 그럴듯한 해결책이 급히 발표되지만, 정작 근본적인 법적·제도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흐지부지된다. 진정한정책 개선은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일관적 철학과 장기적인 전략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 공직사회에 그러한 철학과 전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나는 거듭 강조했다.
관료제의 무책임함과 정치적 외풍에 쉽게 흔들리는 행정의 현실은 정부를 점점 더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거나 단기적 처방에 의존한다면 이러한 상황을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공직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4부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4부에서 전개할 논의의 목표는 우리나라의 관료들이 본래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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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치매에 걸린사람 중 많은 이들은 때때로 오랜 과거의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해 내는 마술 같은 힘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루봉이 하르방이 치매 때문에 이 모든 기억을 쏟아내게 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기 바빴던 그 시절의 아버지에겐 기억이 머무를 공간이 없었다. 하물며 하르방은 많은 제주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처받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이다. 

제주출신 소설가 김석범이 4.3을 두고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자신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하지만 하르방의 기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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