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의 어느 중요한 결정을 두고, 나는 아내의 동의를 구한 일이 별로 없다. 오늘 저녁엔 뭘 먹을까 하는 사소한 말은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일들을 제대로 상의하지 않았다. 홀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대학을 그만둘 때도 "나 대학에서 나와도 될까?"가 아니라 "나 대학에서 나오려고 해"라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지만, 만약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믿어달라고 자주 말했다. 가족이 가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내가 감당하고 끌어올려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고, 서로를 바라보며 지쳐갔다. 
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한 대리인생을 살아가는 동시에, 또 그들의 삶을 대리로 격하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주체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새벽에 아내는 어디냐고 묻고는 나를 픽업하러 왔다. 아이는 잠들었고 내가 늦게까지 오지 않아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1시간은 걸어갈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정말 고마웠다. 그래도 두 돌이 된 아이를 두고 밖에 있는 것이 걱정되어 서둘러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아내는 일을 그만두면 안 될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나 내가 대리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글로 쓰겠다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하지만 그러한 고난의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연구자로 있는 동안, 외로운 한 존재를 바라보는 이들은 그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들이 상처받기 이전에 ‘고맙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추억이될 것이라 믿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주와는 달리 나의 발이 되어주는 수단 무엇보다 광역버스‘는 정말 감사한 존재였다. 김포 남분당 어디 할 것 없이 서울 광역버스가 반드시  있었다.
그래서 12시 이전에만 운행을 마치면 강남, 사당, 서울으로 돌아가는 광역버스를 탈 수 있었다. 김포에서 합정까지 버스가 15분만에 도착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여러모로 지하보다 나았다.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출발할 때까지 1시간에 한 번씩 다니는
‘버스‘도 있었다. 처음 탔을 때는 버스를 꽉 채운 사람들이 거의 취객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대리운전 기사들이었다. 
다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먼저 콜을 잡으려고 간절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콜이 들어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뻐꾸기 알림음이 났다. 정류장마다 한두명씩은 ‘네. 곧 갑니다‘ 하는 전화를 하면서 내렸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만큼 버스에 올랐다.

지하철은 생각보다 늦게까지 다녔다. 판교에서 신분당선 막차가12시 53분까지 있고, 그걸 타면 15분 만에 강남역까지 도착한다. 광교 테크노벨리, 정자역에서 각각 서울로 올라가는 골을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들이 하나둘 막차에 올라탔다. 
강남행 막차에 오르면 승객의20퍼센트는 나와 닮은 아들이었다. 대개는 핸드폰을 손에 꼭 붙잡고

조교 아르바이트에게 명절 선물을 받는 교직원

나는 그동안 명절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8년 봄부터 2015년 겨울까지 8년 동안 나는 대학에서 언제나 노동자였다. 

학과사무실이나 연구소에서는 행정 노동을 했고 강단에서는 강의 노동을 했다. 학생과 노동자의 경계를 계속 넘나들었다. 하지만 교직원도 교수도 나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 수준의 사회보장이 대개 간단히 무시되었지만 학생/연구자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태도였다.

명절이면 교수와 교직원, 그러니까 정규직들에게는 학교마크가 선명한 명절 선물이 나왔다. 그들은 그것을 들고 고향으로 갔다. 그들이게 상여금이나 교통비 명목의 명절 보너스가 따로 지급되었는지는 잘모르겠다. 다만 대학원생 조교들은 마지막까지 학과사무실에 남아 있다가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나는/우리는 명절에도, 그리고 명절이 아닌 일상에서도 언제나 대학의 숨은 노동자였다.

작년 명절에도 대학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휴강하지 말라는 권고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그런데 추석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면담을 신청한 학생이 있었다. 대학 부처에서 근로조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그는 고민이 있다면서 나에게 카카오톡 대화창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1인당 3만 원씩 걷어서 교직원 선생님들 추석 선물을 사드립시다.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분들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겠죠?"


나는 기독교 문학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딱히 종교가 없으면서도 기독교와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논문을 쓰면서 성경을 종종읽었는데, ‘신명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은 성경에 명시된 ‘율법‘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정말이지 기뻤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시기에도 노동의 대가를 제때 지불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두 알았고, 그것이 노동자를 주체로 대하는 방식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합리와 상식으로 가려진 구조 안에서 개인/노동자는 더욱 주체성을 잃고 소외된다. 
말하자면 주체가 아닌 대리가 되어간다. 이것은 우리 시스템의 문제인 동시에, 창작자/연구자의 수고로움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두 달 전에 쓴 글의 원고료와 어제 한 대리운전의 품삯을 같은날 지급받는다. 어느 편이 더 상식과 합리인지는 명확하다. 타인의 운전석이, 우리가 믿는 그 어느 합리적인 공간보다도 오히려 더 인간을 주체로서 대우한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핀,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씨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전에는 출연자들이 외국을 배경으로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것만 같은 미국적인 음식을 먹고 즐겼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의 맛집이나 거리로 간다. 평범한 냉장고에서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재료를 꺼내 몇 분 만에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상의 공간에까지 이제 그들은 침투했다. 그리고 익숙함을 무기 삼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묻는다. 

"우리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데, 너도 그렇지?"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고 여기게 된다. 
일상을 특별하게 재현한 지금의 먹방은 보는 이들 더욱 외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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