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4·3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입장으로 나뉜다. 그래서일까. 아직 정식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정부가 진상을 조사해 보고서를 내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과까지 한 ‘사건‘에 대해 이처럼 다양한 입장을 보이는 사례가 또 있을까. 이런 입장의 차이는 ‘명칭‘을 놓고도 선명하다. 4·3에 대한 시각은 대체적으로 4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폭동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 상당 부분 이루어진 오늘날, 폭동론은 많이 퇴색하긴 했지만여전히 폭동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4·3이 1948년 4월3일을 기해 남로당 세력이나 북한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폭동이며, 당시 참여했던 이들이북한의 정권 수립에 동조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정부의 진압은 정당했으며, 진압 과정에서 일부 무고한 양민의 희생은 어 - P328
쩔수 없었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대량 학살과 방화, 초토화 등 반인륜적 범죄 행위들은 진압 과정에서의 사소한 잘못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런 반면 무장대에 의한 살인과 방화를 집중해서 강조한다. 둘째, 항쟁론이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진상 규명과명예 회복 운동이 전개되면서 대학생과 지식인 집단, 시민 사회영역은 기존의 폭동론이야말로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세력들이 진상을 왜곡해온 것이라며 항쟁론을 내세웠다. 항쟁론은이전 시기의 폭동론에 대한 반격이자 방어적 성격을 띠었으며, 폭동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예술 운동은 항쟁론에 초점을 맞춰왔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말처럼, 4·3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이다. 실제 1947년 3·1사건과 3·10·관 총파업 이후 1948년 4·3 무장봉기가 발발할 때까지 제주 사회분노는 외부에서 들어온 경찰의 제주 섬 사람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서청 등 우익 단체의 약탈과 탄압 등으로 한계점에 이르렀다. 4·3은 이러한 외부 세력의 탄압에 맞서 일어난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장대의 학살과 방화에 대한 비판은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이것으로 항쟁의 명분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또 한반도 분단을 영속화하는 5.10단독선거를 반대한 ‘분단 반대 운동‘이자 ‘통일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희생자론이다. 이러한 시각은 4·3 담론의 큰 부분이다. 4·3을 다룬 소설과 언론의 4·3 연재나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등 여러 저작물과 보도들은 제주 사람들의 희생과 수난사적 관 - P329
점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4·3의 비극성은 제주 사람들이 당한엄청난 규모의 희생과 수난으로 환기된다. 4.3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 했던 연좌제와 트라우마 역시 같은 방식으로 소환된다. 오랜 시간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운동은 이러한 희생자론을바탕으로 전개됐다. 이는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화두를 던짐으로써 정부의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사과를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넷째, 사건론이다. 이들은 ‘4·3사건‘ 또는 기호로서의 ‘4·3‘ 을 말한다. 4·3의 전개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심을 둔 이들은 ‘4·3사건‘ 또는 ‘43‘이라고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한다. 4·3특별법과 정부 보고서도 ‘4·3사건‘이라고 하고 있다. ‘사건‘이라고 해서 ‘4·3‘의 의미가 퇴색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4월 3일 무장봉기에 이르기까지 항쟁적 측면은 존재하지만,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무장대의 민간인 살상 등의 과오 또한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절충적 입장으로 ‘4·3사건‘ 또는 ‘43‘이라고 해서 4·3의 항쟁적 측면이 감춰지는 것은아니라고 한다. - P330
4.3 시기 군·경과 극우 세력의 눈에 제주 사람들은 빨갱이나 폭도로 간주됐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학살에 대한 도덕적 역제력을 손상시켰다. 4·3은 남겨진 자들의 삶의 궤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들의 삶은 4·3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생존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4·3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랜 시간 침묵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연좌제의 그물 안에서 좌절해야 했고,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4.3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은 사건 발생 이후 40여 년의 탄압과 금기의 시대를 지나 진전했다. 1987년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 이후 4-3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운동이 시작됐다. 시민사회가나섰고, 학생과 유족들이 서서히 나섰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12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4·3특별법이 통과됐다. 문재인 정부들어 4.3 추가 진상 조사와 4·3 문제 해결의 가장 큰 난관 가운데하나였던 보상금 지급이 담긴 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됐다. 4·3 당시 불법적 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됐으며, 4·3특별법에 따라 2022년에는 희생자들에대한 보상금 지급이 시작됐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진실은 다 밝혀졌는가. 보상금을 받고 어느 정도 명예 회복이 됐으니 이제 다 끝났는가. 이것으로 안주하고 어느덧 우리 사회는 4·3의 교훈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실 규명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정부 보고서는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밝혔다.
"집단 인명 피해 지휘 체계를 볼 때, 중산간 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 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두 연대장의 작전 기간인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에 전체 희생의 80퍼센트 이상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최종 책임은 이승만대통령에게 돌아갈수밖에 없다." "4·3사건의 발발과 진압 과정에서 미군정과 주한미군사 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 보고서에서 가해자 책임과 관련하여 기술했다는 점 국가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과 미국에 4-3 시기 인명 피해의 책임을 거론한 것은 큰 진전이다. 그러나 제주도 내 곳곳에서 자행된 집단학살과 반인륜적 범죄 행위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한 사료 발굴과 치밀한 분석도 필요하다.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4·3의 정명 문제와도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좌익 활동을 하다 무장봉기 발발 이전 일본으로 피신한 김봉현이 1978년 일본에서발간한 『제주도 피의 역사 -<4·3> 무장투쟁의 기록』은 4-3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비참한 대사건은 당시 모든 보도가 금지돼 외부 특파원이 현장에 접근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채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아우슈비츠‘ 학살,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전후 일어난 대만의 ‘2·28 학살, 그리고 세계를 흔들었던 남베트남의 ‘밀라이 마을‘ 학살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완전한 잔학성을 보여주는 살육이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중국의 난징대학살, 대만 2.28사건, 베트남의 밀라이학살 사건 속에서 4·3을 위치지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한 4·3무장봉기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봉기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가 이민족의 지배나 권력의 학정에 대항하는 투쟁의 발걸음에 있는 이상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그것이 행인지 불행인지는 차치하고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 인민이 압제자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천주교 강우일 주교는 4·3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4·3을 단순히 한국 현대사의 한 귀퉁이서 일어난 일시적인 비극으로 간주해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논하고 사회적책임을 규명하는 데 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시일이 지나 책임자의 사법 처리와 처벌까지는 갈 수 없다고 해도 진정한 과거 상처의 치유와 해결을 위해선 진실을 감추지 말고 올바로 밝히며 원인, 과정과 책임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의 치료가 안 된다."
사건의 원인을 더 깊이 규명하고 가해자들에 대한 책임을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해야 할 과제들이다. . 사건 이후 40여 년 이상 억압과 금기시되어온 시민사회와 언론 등 민간 영역에서 먼저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제주4.3 연구소는 증언 채록 등을 통해 4·3의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운동에 나섰고, 지역 언론의 꾸준한 4-3 기획 보도는 4-3의 관심을 대중적으로 확산하고, 4·3의 가치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런 가운데 2008년 10월 16일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되면서 4·3의 가치와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승하기 위한 제도적 틀이 마련됐다. 재단은 4·3특별법에 따라 평화의 증진과 인권의 신장을 위해 제주4·3사료관 및 평화공원의 운영·관리와 4·3위원회가 의결한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 및 그 유족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 등 기타 필요한 사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를 더욱 구체화한 시행령과 재단 정관에 따르면 재단은 제주4·3평화공원 및 제주4·3평화기념관의 운영·관리, 추가 진상조사, 추모 사업 및 유족 복지 사업, 문화·학술·교육 사업, 국내의 평화 교류 사업, 행정 기관의 위임 및 위탁 사업, 기타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 등을 한다. 이런 취지에 맞게 재단은 교육 기관 및 문화예술 단체, 4·3단체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4·3의 가치를 평화와 인권의 가치로 끌어올리고 전승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 대학생 자원봉사 활동, 시민강좌는 물론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국내외 과거사 관련 기관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 평화교류 사업도 추진한다. 2021년 4.3 특별법 개정에 따른 추가 진상조사도 재단이 맡았다. 4.3의 진실을 알리고 교훈을 얻기위한 미래 세대의 4.3교육은 주요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교육청은 해마다 4월이 되면 4.3교육주간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4.3 평화 인권 교육은 4.3을 과거의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현재이자 희망의 미래로 승화시키기 위해 이루어진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금기시되던 역사의 빗장이 서서히풀려갔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지금껏 가해자들로부터의 어떤 사과도 없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통해 다시는 그러한 범죄 행위가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대신 화해와 상생을 내세웠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딛고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의 실효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로인해 다시 또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보다 그들의 가해 기록을제대로 남기는 것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화해와 상생을 꾀하는 길이라는 걸 제주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러한 화해와 상생이야말로 남북 갈등과 남남 갈등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과제는 또 있다. 무장봉기 주도 세력이라는 이유로 4·3 희생자 선정에서 탈락한 희생자와 유족들은 여전히 4·3의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다. 이들은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들에 대한포용 없이 진정한 화해와 상생이 가능한 것일까.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고 따지는 일도 필요하다. 미국은
4.3의 전개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이를 입증할 미국의 문서들도 발굴되어왔다. 한-미 관계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미국의 개입 문제를 묻어둘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4.3의 진실은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사건 이후 수십여 년 동안 있었던 정부의 탄압을 밝히는 것까지 아울러야 한다. 또한 여전히 미진한 진상 규명운동과명예 회복 운동 등을 치열하게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인권의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4.3의 미래는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을 향해야 한다는목소리가 있다. 이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밝히고, 그 해결 과정을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화해하며 평화와 인권 의식을 높여나가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식이 제주사회 전반에 걸쳐 스며들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제주도가 지향하는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4.3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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