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노계盧溪의 글인가?"
"아니, 전에 노자영이란 이의 글이 있었느니………"
"오, 그 「금공작의 애창이니 무슨 「사랑의 불꽃」이니하는 글로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사람, 지금은 그 글 아는 사람도 없지."
"사탕이니까 혀끝에서 다 녹아 버렸지. 남을 수가 있나."
"그는 그렇다 하고 씀바귀 맛이 왜 두시 맛이란 말인가"
두보같이 인생의 가지가지 고를 맛본 시인은 없다. 난세에 태어났고, 가난한 집에 태어났고, 다한 체질을 타고났고, 일생을 역경에서 살았고, 문재와 포부를 가지고도 과문에는 실패만 했고, 형제 친척은 유리산遊離散落하여 생사가 안타까웠고,
전란에 지향 없이 표박하는 몸으로 고苦와 기한 속에 산시인이다. 아내는 굶주려 병들고, 자식은 굶주려 죽었다. 그의 일생동안 눈에 비친 것은 오직 비참한 광경과 분노와 통탄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모두 현실의 증언이요 고발이며, 피와 눈물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이백처럼 현실에서 초탈하려 하지 않고 
왕유나 도잠처럼 은둔하려 하지 않고, 완적阮籍과 같이 창광하지 않고
가의와 같이 현세를 포기하지 않고, 이하賀와 같이 데카당스 하지 않고, 
그의 고苦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엄숙하고 진실했다. 
그 속에서 인생을 맛보고, 찾고 또 음미하고, 만인의 고苦를 대신 노래하며 인생을 새로이 창조해 나갔다. 그는 글을 쓰는 데까지도 고苦를 사양하지 않았다. 한자 한자에 고혈을 경주했다.
"글자 한자라도 경인구가 아니면 죽어도 방과放過하지 않는다語不驚人死不休."고 했다. 
이백이 왜 그토록 말랐느냐고 물었더니 "글 생각하기에 말랐다."고 했다. 정말 그의 시는 고苦의 결정체다. 
그를 시성이라고 하지만 고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고에 살고 고를 소재로 고로 엮은 그 고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시를 읊어 보면 그 아름다움에 오직 황홀하다. 
모든 인생고가 그 아름다움에서 해소됨을 느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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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가운데 우리들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는 것은 선인들의 문화심文化心을 음미하는 데서도 아쉽기 그지없다. 이것은 결코 부질없는 향수만이 아니다.

정이란 하나의 면면히 흐르는 리듬이다. 절단된 데는 정이 없다. 비정의 세계다. 
정이란 시간과 공간에 뻗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이고, 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유기적인 유대다. 
이 정의 구상이 곧 미美다. 
수천 년 전의 작품, 수만리 이역의 작품이 우리에게 공명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유대가 있기 때문이다. 

수명에는 한계가 있으나 생명에는 한계가 없다.

물고기는 잠시도 물에서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생명을 기른다.

젊은 여성은 잠시도 몸가짐을 게을리하지 아니함으로써 젊음의 미를 길이 지닌다. 

참을 사는 사람은 잠시도 허튼 생활에서 자기를 소모하지 아니한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과 문을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를 떨치고 문아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켜켜로 입었던 바지며 내의 속내의에서부터 하반부의 둔육을 해방시키고 두 발을 고여, 전신을 편안히 내려 앉히면 위로 충만했던 모든 들뜬 기운이 가라앉으며 평온한 희황시대羲皇時代로 돌아온다. 
향기롭지 못한 냄새도 어느덧 잊어버리고 만다. 마치 이 세상에 오래 살아 이 세상 냄새를 모르고 배기듯이 아무도 이 문을 열 사람은 없다. 아무 일도 내 스스로가 나가기 전에는 부를 리도 없다. 찾을 리도 없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은 나의 이 작업으로 말미암아 권위 있게 스톱당하고 만다. 지구조차 이 속에서는 돌지 않는다.
외계에서 수소탄이 터지는 태양이 물구나무를 서든 나는 결코 개의하지 아니해도 좋다. 
내가 이 작업을 하고 있는 한, 이런 무관심과 태만에 대해서도 아무도 문책하는 사람은 없다. 잠시 가쁜 숨을그치고 유유한적한 세계에서 기상천외의 꿈속을 헤매며 오유遊하는 것도 나의 자유일 것이다. 이 지상에서 자유 해탈의 시간은 이시간뿐이고, 소부巢父, 허유가 놀던 기산箕山영수穎水는 남아있는 곳이 이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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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

내 세간 난 지 얼마 아니 해서, 봄이 왔다. 양지편에 핀 진달래는 아직도 추워서 꽃잎이 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것 같았다. 우리는 마루 끝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방보다 파뜻하기 때문이다. 금붕어 이고 가는 장사 마치 새봄을 담뿍 실어다 주는 듯. 어항과 금붕어 몇 마리를 샀다. "조것은 알뱄나 봐요"
아내는 한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흥, 제법 배가 똥똥하지."
하고 웃어 보였더니 아내도 낯을 잠깐 붉히며 웃었다. 물을 날마다갈아 주고 하느라고 했건만 한 마리, 두 마리 죽어 가고 빈 어항이돼 버렸다. 대신 냇붕어를 잡아다 길렀다.
아내가 근친 가던 어느 날, 불을 끄고 혼자 누웠으려니까 미묘한소리가 들려왔다. 낙숫물 듣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햇볕

아리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차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러나 훨씬 작은 소리, 생각하면 눈 녹는 소리 같기도 했다. 불을 켜고 주위를 살펴봤다.

붕어 물 먹는 소리를 들어 본 사람이 있는지? 
그것이 바로 붕어들이 물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놈이 입을 모으고 뻘죽뻘죽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입구에서 좁쌀 같은 물방울이 생겼다 꺼졌다 한다.
금붕어보다 냇붕어가 좋았고, 노는 것보다 밤에 물켜는 소리가 더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이슥토록 누워서 책을 보다가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우려니까 옆에 지켜 앉았던 아내가 나를 가만히 건드리며 신기한 듯이 "저 소리 들려요? 붕어 물 먹는 소리예요." 한다. "아까는 더 크게 똑똑히 잘 들렸는데………." 둘이서 어항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물 키는 소리보다 벌름벌름 마시는 그 입들이 더욱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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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의 해석에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다. 따른다. 곧 의지한다는뜻으로 보는 것, 姻과 같다고 보아 새 친척이 생겨도 옛 친척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교훈 등등이다. 여기서는因의 因으로 해석했다.
Meki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敏於事而愼於言,就有道而正焉,可謂好學也已,

ㅇ 가라사대,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처함에 안락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 부지런하며 말에 신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바로잡는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하리라.
◎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배가 부르도록까지 먹으려고 하지 말며틈만 있으면 안일을 탐하려고 하지 말아라. 일을 할 때는 남보다 먼저앞장서서 하고, 말을 할 때는 가능한 신중히 하며, 덕이 있는 경험자의의견을 구하여 반성토록 하라. 그러하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수 있으리라.
몸에는 "일하지 않고 편히 쉰다"는 뜻이 있다. 공자의 학교는 일종의제 제도로서 침식을 같이하는 제자들이 있어 교대로 잡일을 맡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할 일이 없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럴 때에도 낮잠을 자서는 안되었다. 실제로 재아(我)라는 게으름뱅이가 있어서 낮잠을 자다가 공자한테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이 (101]에 나온다.
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일은 열심히 하고말은 적게 하라는 것이 공자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다.

속수는 입문할 때 지참하는 예물로서 말린 고기를 묶은 것이다.
한나라 때는 유학이 번성하여 유명한 학자에게는 수천 명이나 되는 제자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가르친 것은 고(高弟)뿐이고 일반제자들은 고제에게 교육을 받았다. 공자 시대에는 아직 이러한 계층서열은 없었다.

155 子曰, 不憤不啓. 不惟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OF 가라사대, 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고 #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느니라. ㅡ隅를 들면 三隅로써 돌아오지 않으면 거듭하지 않노라.

●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정열이 없는 사람은 진보하지 못한다. 고생하지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네 귀퉁이의 하나를 가르치면 남은세 귀퉁이를 스스로 시험해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가르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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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은 성별정정을 막는 것이 아동을 차별로부터 보호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관계를 드러내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나, 이렇게 드러나는 가족 형태를 이유로 차별하는 사회를 문제삼지 않고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 2022년의 대법원은 달랐다. 가족관계등록부의문제는 "개인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정정과 관련된 내용을불법적으로 외부에 노출하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있다면
"차별하는 쪽의 편견과 몰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법률적·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고 여겼다. 미성년 자녀의 복리는 여전히 중요한 고려 요소이지만 판단의 방향이 달랐다. 신청인의 성별정정을 인정함으로써 "부모로서 안정적으로미성년 자녀를 양육하고 부양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토대를마련"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미성년 자녀의 복리에 부합한다고보았다. 2022년 대법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개인의 가족생활은 사회적 관계의 시작이자 핵심을 이루는것으로서 국가는 이를 보장하여야 한다(헌법 제36조 제1항). 성전환자 또한 전체 법질서 안에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

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하고, 국가는 성전환자의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것이그의 가족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는부 또는 모의 성전환이라는 사실의 발생에 따라 부모의 권리와 의무가 실현되는 모습이 그에 맞게 변화하는 자연스러운과정일 따름이다.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또한 전체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성전환자가 이혼하여 혼인 중에 있지 않다거나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정정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이러한 점이 달라지지않는다.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여전히 그의 부 또는 모로서 그에 따르는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며이를 할 수 있다. 12헌법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정한다. 조금 늦었지만 한국의 대법원 헌법상 국가
"가 보장해야 할 "가족생활"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특정한 가족형태가 아니라 실질적인 가족관계여야 함을 인정했다. 정상가족ㅣ외관을 지키려던 공고한 가족각본에 이렇게 균열이 생겼다.
185

전한 생존방식일 수 있다. 이런 불평등한 현실에 눈감으며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는 부조리하다.
그 결과는 무엇보다 아동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각본은 아동에게 불평등하고 가혹한 사회를 만든다.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앞서 본 것처럼 2011년 대법원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배려라며 ‘동성혼의 외관‘이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히려 정반대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동성결혼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결혼만 인정하면 동성커플의 자녀가 "자신의 가족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낙인"을 겪게 되므로, 아동이 해를 입지 않게 동등한 가족지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아동들이 가족 배경을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겪는다. 아동이 겪는 온갖 놀림과 괴롭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 형태, 가족소득, 가족 구성원의 특징 등 가족에 관한 이유때문인 경우들이 많다. 가족의 상황이 아동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만든다. 흔히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며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이는 가장 부정의한 불평등이기도 하다. 어느가족에게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누구는 존중을 받는 반면 누구는무시를 당하고, 누구는 풍족한 기회를 얻는 반면 누구는 생존어렵다면, 벌거벗은 아기 때부터 우리의 몸에 계급이 새겨져 있

다는 뜻인 거다."
182장에서 나눈 혼외출생자 이야기나 3장에서 나눈 ‘혼혈인한센인, 장애인 등의 이야기는 부도덕하거나 열등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불행이 아니라, 가족각본이 만들어낸 불평등의 결과였다. 한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가족, 조손가족, 비혼가족, 동성커플가족, 트랜스젠더가족 등 모든 가족은 가족의 ‘위기‘나 ‘해체‘, 혹은 ‘붕괴‘의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양식이다. 그런데 가족각본이 이러한 삶을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라고 규정하여 낙인을 새기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가가 특정가족 형태를 ‘건강가정‘이라고 명명하며 ‘만들어내는‘ 이 불평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2022년의 대법원이 가족각본에 흠집을 내며 만들어낸균열이 특히 의미가 있다. 앞에 발췌한 결정문에서 보듯, 대법원은 헌법 제36조 제1항이 보장하는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의 권리임을 확인했다. 설령 가족관계에 변화가 있더라도 "이렇게 형성되는 부모자녀 관계와 가족질서 또한 전체 법질서 내에서 똑같이 존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모든 개인에게 인정되는만큼, 수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불평등한 가족질서는 타당하지않다.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가족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고 국

터섹스(간성, intersex)나,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 이성애 규범을 벗어난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은, 결국 고정된 성역할 규범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였다."
한국이 가족각본에 포획된 사이, 지난 20년 동안 세계는 많이변했다. 영국은 교회법을 따라 1533 년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도입한 뒤 식민지배로 전세계에 전파한 역사가 있는데,
2003년 이를 최종 폐기하고 2013년 동성결혼을 법제화한다. 미국은 동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을 연방대법원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 2003년인데, 2015년 연방대법원이 동성커플의 혼인할 권리를 인정하면서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나치에 의한 대규모 동성애자 학살의 역사를가진 독일은 당시 근거 법령이었던 형법 조항을 1960년대에제하였고, 2017년 민법을 개정하여 동성결혼을 제도화한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20여년이 지나는 사이 34개 국가(2023년 5월 기준)가 동성결혼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결혼 외의 공동생활을 보호하는 제도도 개발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는 1999년 연대계약을 도입했다. 연대계약은법률혼과 달리 상대방의 가족과 인척관계를 형성시키지 않으면

서 법률혼과 동일하게 상호부양과 협조의 의무를 부여하며, 한사람이 사망하더라도 남은 사람이 살던 곳에서 계속 살도록 거주권을 인정하는 등 공동생활을 보호한다. 연대계약은 처음부터 동성커플과 이성커플 모두를 위해 설계되었고, 공식적으로계약을 체결하는 신고절차를 통해 성립된다. 프랑스는 다른 한편으로 1999년 당사자 사이의 자유로운 공동생활인 ‘동거‘를 민법에 규정하면서 동성커플을 포함했고, 2013년부터는 동성결혼을 인정한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동성과 이성의 커플 모두 법률혼, 연대계약, 동거 중 하나를 선택하여 가족을 구성할 수 있게하였다.23독일의 경우 2001년 등록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Gesetz über dic Eingetragene Lebenspartnerschaft 을 제정했다. 동성커플을 보호하려는 취지가 있었지만 동성커플만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이성커플의 혼인과 구별하려는 의도가 담긴 제도였다. ‘이등지위‘
를 부여한 차별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결국 독일은 2017년 법률혼에 동성커플이 포함되도록 혼인을 ‘개방‘하면서 생활동반자제도는 중단하기로 한다. 반면, 영국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먼저 2004년 동성커플을 위해 동반자관계법 Civil Partnership Act 을 제정했다. 2013년이 되어 동성결혼을 법제화했는데 이때 동반자관계법을 폐지하지 않았다. 대신 이성커플도 동반자관계를 맺을

198이 있다. 2023년 4월 용혜인 의원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생활동반자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계약에 가까워서 상대방 가족과의 인척관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결혼처럼 동거 ·부양·협조의 의무, 일상가사에 관한대리권과 채무에 대한 연대책임 등을 부여하고 공동입양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사회보험 연금수급, 건강보험 피부양자 인정, 배우자출산휴가와 돌봄휴직 사용, 소득세 인적공제, 가정폭력으로부터의 보호 등이 가능하게끔 관련된 다른 법들을 개정하도록 했다. 이어 5월 장혜영 의원은 동명의 생활동반자법안과 함께,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민법 개정안(혼인평등법), 결혼과 무관하게 출산을 지원하는 모자보건법 개정안(비혼출산지원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을 대표 발의했다. 새로운 가족에 대한 논의를 국회가 진전시키기를 기대해본다.
다만, 이런 기대가 얼마나 희망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책에서 이야기 나누었듯 국가는 오랫동안 가족생활에 대한 헌법적 책무를 개인의 도덕 문제로 돌리면서 제도적 개선 노력을 피했다. 한국사회가 가족의 해체와 붕괴를 논하며 개인의 책임을탓하는 사이, 가족생활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임은 은폐되었다. 대신 가족은 국가경제를 위해 인력을 공급하는 단위로 여겨지곤 했다. 저출생을 위기라 말하면서도 사람을 노동력으로서의

‘인구‘로 여기고, "출산은 애국"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사회는 사람을 도구화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 가족정책과 인구정책을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정부의 무감각함 속에서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야 할 이유는 더 사라진다.
‘장경섭은 ‘가족도덕‘의 회복을 강조하는 정치적 기조의 이면에, 국가가 사회보장 책임을 축소하면서 이를 합리화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 수준은 낮은 편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문 지출의 비중은 프랑스 31.6퍼센트, 독일26.7퍼센트, 일본 24.9퍼센트, 스웨덴 23.7퍼센트, 영국 22.1퍼센트 등이고, OECD 평균이 21.1퍼센트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공공부문 지출은 GDP의 14.8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은 사회보장에 필요한 비용을 아끼고 가족에게 돌봄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게 기업 역시 오랜 시간 돌봄의 책임을 피하며 이익을 누렸다. 돌봄을 ‘사적인 가족의 문제로 분리시키고 여성의 보이지않는 노동에 의지한 결과, 기업은 돌봄에 관해 신경쓰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껏 사용할 수 있었다. 기업은 돌봄의 책임과무관하다는 생각에서, 여성을 결혼과 육아를 이유로 차별하고남성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가족

‘정책‘은 여전히 가족이 공동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도록 제도를마련하는 일보다, 아동을 돌봄 기관에 맡김으로써 국가와 기업이 노동력을 확보하게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돌봄을 국가와 기업을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자 개인의 권리로 인식하고 함.
께 연대하게 될 때, 비로소 불평등한 돌봄의 시간도 재배치될 수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다. 다양한 가족의 현실과 변화에 따라 제도를 개선하고 설계하며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연구와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엄청난 프로젝트다. 그런데 다른제도들도 그렇다. 변화하는 사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안을찾는 일을 우리는 ‘정책‘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구호에 동조하며 기존의 가족질서를 고수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별이 사람의 인생을 규정하던 시대를 넘어가고 있고, 부조리한 가족각본을 벗어나 모두의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이필요하다.

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마치 가족이나 기업이나 매한가지인 것처럼, 경제가어려우면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가족부터 무너지는 현상을 계속해서 겪어왔다. 사람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뽑아내 이윤을 창출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산업사회는 가족이 서로를 돌볼 몸을 빼앗으며 그 책임을 가족에게 돌려왔다. 지하철에서 만난 ‘가족 없는‘ 아동들도, 이제 결혼 밖에서 삶을 계획하는 청년들도이 사회가 정답이라 믿어온 가족제도는 서열을 낳는 경제적평등과 오차가 거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가족의해체를 우려하며 ‘비정상‘ 가족을 가려내는 정책은 필연적으로불평등을 가속화하고, 결국 그 불평등이 사람이 태어날 수 없는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결혼제도 안으로 진입하려는 성소수자의 행보가이상하게 보일 법하다. 이 책에서는 동성결혼 때문에 기존의 가족제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사실 정반대의 우려도 제기된다. 가족의 의미를 새로 써야 하는이 시대에, 동성결혼을 요구하는 주장이 기존의 가족담론을 다시금 유지시키는 건 아닌지 염려하는 것이다. 동성커플이 결혼한다고 이성커플의 결혼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 결혼을 둘러싼 문제들은 그대로 남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

었듯이, 가족이란 제도와 관습 안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가 던지는 화두는 더욱 본질적이다. 익숙한 가족각본을 잠시 내려두고 사회가 함께 질문하게 만드니 말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우리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가족을 꾸리는가?
이 책을 쓰며 인용한 문헌들에서 보듯, 이미 수많은 연구자와활동가들이 가족제도를 비판적으로 연구해왔다. 놀랍도록 풍부한 연구들을 감탄하며 읽고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가족제도에대한 논의는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하는가? 가족생활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경제, 국방, 교육 등 다른 의제보다 가족을 덜 중요하게 다루는 관념 자체가 말해주는 현실이 있다. 가족은 여전히국가를 위해 유용한 인력을 생산하는 수단이며, 헌법이 요구하는 가족생활의 보장은 아직도 국가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
합계출산율 1명 미만의 시대는 이토록 부조리하고 불평등한사회에 아이를 낳으라는 불가능한 요구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라면, ‘인구‘가 줄어서가아니다. 웬만해서는 사람이 태어나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돌봄의 공동체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구정책은 가족정책이 아닌데,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회

를 또 반복하며 우리 삶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제 우리, 가족각본을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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