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삶이 ‘망‘이라는 한 글자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말인가! 얽매이고 구속받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망상은 무조건 물리쳐야 할 해악인가? 그렇지 않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지배당한 조선 사대부에게는 마음을 제멋대로 풀어놓는 상태인 ‘방심‘, ‘잡념, ‘‘망상‘, ‘상념‘이 자신을 망치는 가장 해로운 적이었다. 그러나 성호학파의 문인 이학규(李學)는 오히려 망상을 통해절망으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와 활력을 찾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망상 덕분에 유배지에 갇혀 있는이 몸도 크게는 온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작게는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터럭 끝까지도 헤매고 다닐 수 있다고, 망상을 하는 순간 자신의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할 만하다고. 만약 지금 마음속 한 가닥 망상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의 삶은 불씨가 죽어 버린 잿더미처럼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영원히 살아 움직임을 증명할 수 있는것은 망상에 있을 따름이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사유에 얽매이고 구속당하기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이른바 ‘망상예찬‘이다. 망상이 있어야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비로소 사상의 한계와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 무한과 무궁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망상이 없다면
사상의 한계와 사유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망상하고 또 망상하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삶이 바로 그 망상 속에 있다.
망과 망상무릇 사람이 스스로를 포기해 제 한 몸 공경하지 않는 자는 어렸을 때부터 해가 뜨면 일어나 망령된 말과 행동만 한다. 한가로이 홀로 앉아 있으면 망령된 생각이 번잡하고 어지럽게 일어난다. 잠자리에 들면 밤새도록 망령된 꿈을 꾼다. 끝내 늙어 죽을 때까지 ‘망(妄)‘이라는 한 글자로 평생을 마치고 만다. 아아! 슬프다. 凡人之暴棄 不自敬身者 自幼時日出而起 妄言妄事 閑居而獨坐 妄思粉拏 寐則終夜妄夢 至老死不過以妄之一字了當平生 塢呼悲矣. - 이목구심서 1망상이 분주하게 일어날 때는 구름 한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쳐다보자. 온갖 잡념이 일시에 사라질 것이다. 바로 정기(正氣)가 돌기 때문이다. 妄想走作時 仰看無雲之天色 百慮一掃 以其正氣故也- 이목구심서 2
아첨하는 사람
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고 아양떨며 일생 동안 남을 기만하는사람이 있다고 하자. 비록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꾸미는 데 익숙해져 스스로 편하거나 이롭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막고 가란것이 아주 얇고 좁아 감추려고 할수록 더욱 드러날 뿐이다. 제아무리 애써 봤자 고생스럽기만 할 것이다. 很有巧詐超響 一生騙人 雖慣於粉餚 自謂便利 然其障蔽於人者 甚薄我預定隨境 極芬苦战- 이목구심서 3교묘하게 속이고 아첨하는 짓에도 최상과 중간과 최하의 등급이 있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하게 하고, 명예나 이익에 초연하고, 상대방과 사귀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척하는 인간 부류는 최상 등급이다. 간곡하게 바른 말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활용해 뜻이 통하도록 하는 인간 따위는 중간등급이다. 발바닥
이다 닳도록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돗자리가다 떨어지도록 뭉개고 앉아 상대방의 입술과 안색을 살피면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좋다고 하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조건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이런 아침은 처음 들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자꾸 듣다 보면 도리어 싫증이 나는법이다. 그러면 아첨하는 사람을 비천하고 누추하다고 여겨끝내는 자신을 갖고 노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인간들은 최하 등급이다. 박지원이 스무 살 무렵 세태를 풍자해 지은 소설 「마장전(馬傳)」에 나오는 말이다.
몹시 서글픈 일해진 솜의 터진 옷솔 틈에는 반드시 이(蝨)가 떼를 지어 모인다. 황폐한 담장과 오래된 부엌에는 반드시 쥐가 집을 짓는다. 여우가 요염하게 묘사를 부려 사람을 흘리는 것은 반드시 김숙한 숲의 어둡고 음산한 곳이다. 올빼미의 울음소리는 반드시어두운 밤 으슥하고 캄캄한 곳에서 나온다. 멀리 떨어진 굴속에는 도적들이 무수하게 모여든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사당은 귀신과 도깨비의 보금자리가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밝은 해가 환히 비치면 그 어두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자취를 몰래 숨길 수 없게 되고 조금이라도 음산하고 어두운 계교를 부릴 수 없게 된다. 무릇 소인은 눈을 휘둥그렇게뜨고 희번덕거리면서 눈짓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교활함과 거짓됨이 마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처럼 한다. 평소 말을 내뱉을 때조차 항상 그 은밀하고 컴컴한 것이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재산을 경영하고 자기 몸을 살찌게 하는 일과 물건을 손상하고 사람을 모함하는말 속에 숨어 있는 그 음흉함과 교활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몹시 서글픈 일이다.
有色炒灣 必把黑夜之管暗也 精室遼枪 盜賊之藝焉 最问昏臀 鬼魅之技部公椅 風必聚族 荒埔古耀 鼠必營宅 狐之妖姬 必於幽林之陰森也家用 此我白日昭刑 無幽不遇 則不惟不掩其迹 不能少措其昏之計文小人物好本張 目語精練 處零碎之事 其巧誘如訊 出恒平之語 其隱有如謎 若失營財肥己之事 戕物陷人之首 其陰獲向何言哉 悲矣悲矣- 이목구심서 11사악함은 다른 사람이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결코 속일 수 없는 이가 한 명 있다. 조물주나 하느님, 부처님 같은 존재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어느누구도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세상 단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현대 한국 불교 최고 선승(禪僧) 중 한 사람인 성철(性) 스님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말이 있다. ‘무자기(無)‘, 즉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학(大學)』에도이와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바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 삼간다(君子必愼其獨)"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않는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조차 맑고 밝게 처신한다면 그사
람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바로 세웠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쉽겠는가? 성인(聖人)이나 현자조차도그 어려움을 알기에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자신에게 물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일은 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끄럽다면 해서는 안 된다. 물론이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뜻과역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라 달라질 뿐이다"라고 공자(孔子)의 수제자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회顔)를 어질다고 하는 까닭은 ‘불이(不過)‘에 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로(子路)를 두고 용맹하다고하는 이유는 ‘희문과(喜聞過)‘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듣는 일을 좋아했다는 뜻이다. 진실로 뉘우친다면 잘못은 허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작은 잘못은 조금 뉘우치고 잊어버려도 괜찮지만, 큰 잘못은 고치더라도 매일같이 뉘우침을 잊지말아야 한다.
관상과 사주쉽사리 관상이나 사주 같은 이야기에 현혹되어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환난이나 영리를 마주했을 때, 내가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 易惑於風鑑星數之說 而喜懼無常者 當患難榮利而得其正 吾未知信也- 이목구심서 24박지원 또한 「호질(虎)」에서 무당을 무함의이라는심과 거짓으로 먹고사는 인간 군상으로 풍자했다. 호랑이의입을 빌려 무당은 귀신을 속이고 사람을 현혹시켜 일 년에도 몇 만 명씩 예사로 사람을 죽인다며 심하게 꾸짖었다. 사기꾼의 말에 현혹되는 사람은 과욕과 탐욕 때문에 진위 여부를 판단하지 못한다. 무당의 말에 현혹되는 사람 역시 이와다르지 않다. 이익과 권세와 명예와 출세에 대한 과욕과 탐욕 탓에 무당의 말을 추종한다. 더욱이 불행과 질병과 환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무당의 말을 맹신한다. 하지185
람이야말로 자신의 뜻을 바로 세웠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쉽겠는가? 성인(聖人)이나 현자조차도그 어려움을 알기에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만약 자신에게 물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일은 해도 괜찮다. 그러나 부끄럽다면 해서는 안 된다. 물론이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뜻과역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라 달라질 뿐이다"라고 공자(孔子)의 수제자면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안회顔)를 어질다고 하는 까닭은 ‘불이(不過)‘에 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로(子路)를 두고 용맹하다고하는 이유는 ‘희문과(喜聞過)‘에 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듣는 일을 좋아했다는 뜻이다. 진실로 뉘우친다면 잘못은 허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작은 잘못은 조금 뉘우치고 잊어버려도 괜찮지만, 큰 잘못은 고치더라도 매일같이 뉘우침을 잊지말아야 한다.
만 이익과 권세와 명예와 출세는 자신의 운과 능력과 행동에따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이지 무당의 말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행과 질병과 환란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고, 덮고 싶다고 해서 덮어지고, 외면하고싶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당의 말 때문에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건강하게 되거나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환란을 당하거나 피하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세상 모든 일은 그렇게 된 원인이 없는것이 없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인생이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필연보다 우연에 지배받는 존재다. 아무리 치밀하게 예측해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계산해 대비한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우연의 힘 앞에서 무력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갈뿐사주나 관상과 같은 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피할 수 있는 일이면 어떻게 해도 피하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일이면 어떻게 해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남녀가 사주궁합이 안 맞는다고 결혼을 포기하겠는가? 결혼할마음이 없는 남녀가 사주궁합이 잘 맞는다고 결혼하겠는가?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亦不치자연 만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질서 속에는 어린아이의 자리도 존재한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아이 역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자연 만물을 보고 생각하고 느낀다. 그것을 어른의 방식으로 억지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이를 혼란에 빠뜨릴뿐이다. 어린 시절을 혼란스럽게 보내는 것은 이후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루소가 「에밀」에서 한 말을 인용해 보았다.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그 뜨거운 피와 팔딱거리는 활력이 당신을 다시 젊게 만드는가? 그러면 당신의 심장과 정신은 아직 살아 있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재생(再生)의 동력이다. 정월 초하루를 전후해 즐겁게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던 이덕무 역시 문득 다시 약동하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아이
의 어린 시절은 물론 어른의 어린 시절 또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로부터 삶의 활력과 재생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호미질과 붓질
아침에 일어나 오이밭을 호미질하다가 마루에 올라가 붓을 잡으면 팔이 몹시 떨려 마치 바람 속에 배가 요동치듯 한다. 어떤사람이 기이한 것을 좋아해 짐짓 전필 힘을 가해 마치 손을떠는 것처럼 쓰는 서체)을 쓰는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병을 짐짓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병이 아니기 때문에 떨리는 정신을반드시 꾸짖어 버리는 것이다. 유월 아침에 형암은 원각탑(圓覺塔) 동쪽에서 쓴다. 朝起鋤茂畦上堂把筆 腕大戰如風中舟歟 或疑好奇 故作顫筆 病固可以故作乎 匪病故顫 神必呵之 六月朝 炯菴書于圓覺塔東- 이목구심서 24원각탑은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이다.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은 대부분 백탑(白塔)이라고 불렸던 이 원각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내가 열아홉, 스무 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중략)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대하고 있었고, 낙서(洛瑞) 이서구의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觀齋徐修)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이덕무와 가장 절친했던 박제가가 남긴 증언이다. 필자 역시지금 삶의 일부와 같은 집필실 겸 연구실이 탑골공원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간혹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친한 벗들과 어울려 지낼 때면, 마치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어쨌든 붓을 잡는 손으로 호미를 잡는 일이 쉽겠는가?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나자신을 생각하며 이덕무의 자책 속에 담긴 뜻을 수백 수천번 되새김질해 본다.
본분을 지키고 형편대로 살다본분을 지키니 편안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사니 즐겁다. 모욕을 참으니 관대하다. 이것을 가리켜 대완(大光)이라 한다. 守分而安 遇境而歡 耐辱而寬 是謂大完- 선귤당농소」자기 본분을 지켜 편안하고, 높든 낮든 귀하든 천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닿는대로 즐겁게 살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사람도 모두 용납할 수있다면 완전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가졌다면 완전한인격은 아니더라도 참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얽매일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뜻이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삶이 차라리 낫다.
고금과 삼일고금(古今) 역시 크게 눈을 깜빡이거나 크게 숨을 내쉴 정도로짧은 순간이다. 또한 눈 한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이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짧은순간이 쌓이면 고금이 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새롭고 다시 새로울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 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일(三日)‘,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一古一今 大瞬大息 一瞬一息 小古小今 瞬息之積 居然爲古今 又昨日今日明日 輪遞萬億 新新不已 生於此中 老於此中 故君子着念此三日- 선귤당농소고(古)와 금(今), 고(古)와 신(新)의 관계는 이덕무와 박지원이 평생 고뇌한 문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문제다. 이덕무는 ‘작고양금(수)‘,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이덕무는 말한다. 세속에 초탈한 선비는 하는 일마
다 ‘고‘만을 따른다. 세속에 물든 선비는 하는 일마다 ‘금‘만을 따른다. 서로 배격하고 비난하는데 중도에 들어맞지 않는다. 스스로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 이것이 바로 작고양금의 철학이다. 또한 박지원은 말한다. "어떻게 문장을 지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세상에는 괴상한 헛소리를지껄이며 도리에 어긋나고 편벽되게 문장을 지어 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지원이 제자 박제가의 시집 『초정집 (楚亭集)』에 써준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옛것을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춰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글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옛것을바탕으로 삼되 새롭게 창조하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법고창신의 문학이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되 항상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의 발견과 창조에는 이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한다면 옛것과 지금의 것과 새로운 것은261
마치 눈 속에서 죽순이 삐죽 나온 듯한데, 그곳이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내가 열아홉, 스무 살 때쯤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뵈러 갔다. (중략) 당시 형암 이덕무의 사문이 그 북쪽에 마주대하고 있었고, 낙서(瑞) 이서구의사랑이 그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또한 수십 걸음 가다 보면 관재 서상수(觀齋 徐修)의 서재가 있고, 북동쪽으로 꺾어져서는 유금과 유득공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그곳을찾아가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러 지냈다. 곧잘 서로 지어 읽은 글들이 한 질의 책을 만들 정도가 되었고, 술과 음식을 구하며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이덕무와 가장 절친했던 박제가가 남긴 증언이다. 필자 역시지금 삶의 일부와 같은 집필실 겸 연구실이 탑골공원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간혹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친한 벗들과 어울려 지낼 때면, 마치 이덕무와 그의 사우들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 함께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어쨌든 붓을 잡는 손으로 호미를 잡는 일이 쉽겠는가? 글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나자신을 생각하며 이덕무의 자책 속에 담긴 뜻을 수백 수천번 되새김질해 본다.
본분을 지키고 형편대로 살다
본분을 지키니 편안하다. 형편이 닿는 대로 사니 즐겁다. 모욕을 참으니 관대하다. 이것을 가리켜 대완(大完)이라 한다. 守分而安 遇境而歡 耐辱而寬 是謂大完- 선귤당농소」자기 본분을 지켜 편안하고, 높든 낮든 귀하는 천하든 부자든 가난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닿는대로 즐겁게 살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모두 용납할 수있다면 완전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가졌다면 완전한인격은 아니더라도 참된 인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얽매일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뜻이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삶이 차라리 낫다.
고금과 삼 일고금(古今) 역시 크게 눈을 깜빡이거나 크게 숨을 내쉴 정도로짧은 순간이다. 또한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순간도 조그만 고금이다.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짧은순간이 쌓이면 고금이 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번갈아 돌아가지만 늘 새롭고 다시 새로울뿐이다. 이 가운데서 태어나고 이 가운데서 늙어 간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삼일(三日)‘, 즉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유념한다. 一古一今 大瞬大息一瞬一息 小古小今 瞬息之積 居然爲古今 又昨日今日明日 輪遞萬億 新新不已 生於此中 老於此中 故君子着念此三日- 선귤당농소」고(古)와 금(今), 고(古)와 신(新)의 관계는 이덕무와 박지원이 평생 고뇌한 문학적 주제이자 철학적 문제다. 이덕무는 ‘작고양금(수)‘,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했다. 이덕무는 말한다. 세속에 초탈한 선비는 하는 일마
다 ‘고‘만을 따른다. 세속에 물든 선비는 하는 일마다 ‘금‘만을 따른다. 서로 배격하고 비난하는데 중도에 들어맞지 않는다. 스스로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헤아린다. 이것이 바로 작고양금의 철학이다. 또한 박지원은 말한다. "어떻게 문장을 지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옛것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세상에는 괴상한 헛소리를지껄이며 도리에 어긋나고 편벽되게 문장을 지어 놓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박지원이 제자 박제가의 시집 『초정집(楚亭集)』에 써준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옛것을본받으면서도 변화에 통달할 수 있고, 또한 새롭게 창조하면서도 내용과 형식에 잘 맞춰 글을 지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글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글이자 옛글이기도 하다. "옛것을바탕으로 삼되 새롭게 창조하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법고창신의 문학이다. 옛것을 배우고 익히 항상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것과새로운 것의 발견과 창조에는 이미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한다면 옛것과 지금의 것과 새로운 것은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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