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를 거닐면서 나훈아의 ‘기러기 아빠‘를 불렀다. 부모님을 애타게 그리는마음으로 목청껏 노래했다. 진성은 18살 때 부모님을 만나 서울에 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평온하다 싶다가도 느닷없이 전쟁은 시작됐고, 그 사이에서 그는 숨을 죽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이 심해지자 외삼촌이 와서 어머니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가려고 뒤를 밟았다.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얼른 차에 올랐다. 그러나 외삼촌이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는 버스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래도 그는 울면서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외삼촌은 다시 그를 발로 찼고 어머니를 태운 버스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는 진흙탕에 쓰러져 울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가장 험악하고 냉혹한 현실을 체험하게 만든 대상이었고, 세상마저도 뒤엉킨 그의 울분을 풀어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거리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가정적으로 가슴 아픈 시절을 살아왔습니다. 고아원을 그리워했던 소년이었지요. 그 시절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싶은데, 무척 힘들군요. 제가 살던 성산동에는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공을 차는 아이들이 보였지요. 문득 부모가 없었다면 고아원에 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가 아니라 원수였지요.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 괴로운 마음에 술도 많이 먹고, 방황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가수 ‘진성‘은 유랑극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흥행이 되면 자장면을 먹었다. 그 이후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장면 배달, 손수레도 끌며 밥을 벌어먹었고, 돈이 떨어지면 여관에 잡혀 살았다. 그것 말고는 밥벌이가 없는 줄 알았기 때문에 돌아치기(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 야간업소 일 등 해보지 않은 게 없다.
그럼에도 가사는 매우 진지하고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고향에 행사가 있어 2시간 먼저 내려갔습니다. 평소에 잘 들르지 못했던 아버지 산소에 가려고요. 막걸리와 1,500원짜리 오징어 하나 사들고 찾아가 인사를 올린 뒤 무덤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있는데, 그때 환청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태클을 걸기에 너는 아직까지도 그 모양으로 살고 있느냐?"는 음성이었죠. 갑자기 가사와 악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전방에서 종이하고 볼펜을 빌려서 아버지 무덤 앞에 앉아 미친 듯이 노래 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태클을 걸지 마‘입니다." 가수 진성은 트로트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톱 가수가 되고 싶어 노래하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는 것. 그래서인지 그는 "이런 가수가 있었구나.‘라고 보편적인 이미지만 남기면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예를 들어 어떤 가수냐고 묻자 그는 ‘송대관이나 설운도 같은 가수‘ 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면서 살고 싶다‘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다. 그는 또 홀로 사는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30만 원을 주고 임대한 주말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다. 도시보다는 야외로 나가는 것이 마음 편하다면서. 이상번은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30여 년이 됐다. 중간 중간 영화, 연극, 뮤지컬, 연주 등 연예계에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 팔방미인,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도 주부 트로트 교실에서 굵직하고 낭랑한 목소리로자신의 노래 ‘꽃나비 사랑‘을 가르치고 있었다. 주부들은 모두 진지하고 화기애애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가수의 수업이라고 하지만 트로트 팬들에게 그는 그렇게 생소한 이름은 아닌 셈. 수업 도중 아주머니들은 "너무 멋있어요."를 연발하면서 그의 노래 ‘인생은 새옹지마‘를 불러 달라고 앙코르를 외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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