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아버지가 그립다. 단호한 목소리로 "딸들이 시부모께 효를 행하기도 어려운데 친정부모까지 챙기려면 얼마나 힘드냐" 하던, 딸아이를 가져 임신 6개월에 부른 배로 친정에 가니 마당의 체리 나무에서 체리를 한 바구니 따놓고 "네가 잘 먹어서 미리 따놨다. 달고 맛있구나. 실컷 먹어라" 하며 환하게 웃던 아버지가 그립다. 딸이어서 서운했다는 말이 다 지나간 말이었으면 한다.
흐르고 욕망하고 질투하고 소멸하기도 하니, 결코 몇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사랑은 감정이 자라고 육체의 섞임을 통. 해 우리 세대를 존속시키기도 하고 스스로 관계를 파괴하기도 하니,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무심코 생각하면 사랑의 기술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니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26년 결혼해 살아보니 그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니 대충 하다 말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 고단함이 숨어 있다.
이기적이어도 보통이기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재미나고 요사스러운 것은, 사랑은 대상을 만나면 끝은 내가 좋아야 하되, 과정은 상대의 만족, 기쁨, 해소, 평안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정말 해괴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기술은 한껏 기술을 사용하되, 그게 기술로만 보여서도 안 되고, 사랑의 기술 대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지치지 않는 ‘실천‘과 ‘단련‘으로 끝없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되, 연마하지 않은 듯 보임이 미덕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까놓고 말하면 사랑의 기술은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게 결국은 ‘상대도 좋아 죽을 지경‘이 돼야 하니 ‘참 어려운 문제‘다. 다 같이 좋은 게 어디 쉽겠나? 그게 결혼이다. 서로 사랑해서 좋자고 한 결혼이지만 둘 다 좋기도 힘들고, 사랑이 없어졌다 하여 쉽게 취소하기도 어려운 게 결혼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 상대를 알아가야 하니, 결혼생활은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간접적 원인)을 반복하는 불교의 연기설()과 닿아있다. 불교뿐이랴?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이웃만 못하겠는가? 부처와 예수가 "나를 사랑하고자 해도 상대를 사랑하라" 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니 공을 이루는영혼(spirit)을 구하든 인생의 반려자인 남편을 사랑하다 보면 뭐든 건질 것 같았다. 사랑만 하면 된다니…………. 그래서 결혼하며 크게 다짐했다.
남편을 잘 사랑해 사랑의 기술을 구현해보리라.‘ 왜냐하면 이게 결국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니 말이다.
생각은 참 쉽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결혼생활은 고공 외줄 타기보다 어렵다. 고공 외줄 타기는 안전고리를 걸고 몇 백미터만 가면 끝나지만 결혼은 끝도 모르고, 아이를 등에 지고, 머리에 꿈을 이고,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깔린 유교 문화에서 배우자를 균형대처럼 잡고 걸어가는 것이니, 최상급 고공 줄타기보다 난이도가 높다.
결혼 후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거울에 비친 내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게 있어 결혼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 사랑을 실천하는 장, 결국 ‘나를 파악하는 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6년 즈음 살아보니 사랑은 정말 기술이 필요하다. 요즘 말로 하면 빅데이터를 축적하여 내 사랑이 어느 궤적을 지나가고 있는지 파악함과 아울러, 소소한 사랑의 기술 중 무엇이 더 필요한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실천과제를 도출해내고, 그것을 통해 가까운 미래를 보장하니 말이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상대방의 욕망과 내 욕망의 차이, 수준, 내용을 알지 못하면 사랑은커녕 현실 인식 차이로 결혼 자체가 위태롭게 되니 말이다.
결혼은 선언으로, 결혼신고서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혼은 이혼신고서로 완성되지만 결혼만큼은 혼인 서약을 했다 하여 완성되지 않는다. 결혼 속에서의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사랑을 선택한 사람으로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야 할 한 인간일 뿐이다. 지금 돌이켜봐도 결혼이란 기껏 사랑의 기술을 끝없이 연마하는 과정을 위해 최소한의 바운더리를 설정한 게 아닌가 싶다. 각자의 바운더리를 격투기장으로, 페어 경기를 하는 아이스링크로,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달리기 경기장으로,
긴 호흡으로 달리는 마라톤 경기장으로 만들지는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스물다섯 딸이 결혼한다 할 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딸의 인내심이라면, 딸의 끈기라면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딸아,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 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 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바라머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다만 조심할 것은 서약으로 시작되는 결혼을 믿지 마라. 결혼이 결말인 듯 아름답게 쓰인 동화도 잊어라. 사랑해서 한 결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요구되는 긴 삶이니 말이다.
사랑의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너의 결혼과 사랑은서로의 안면을 강타하여 KO패를 이끄는격투기가 아닌, 앞만 보고 목표만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들게 뛰는마라톤 경주가 아닌, 호흡을 맞추고 음악에 맞춰 서로를 보듬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페어 스케이팅이길 바란다.
오빠 신발로 타느라 너무 고생해서 딸은 그냥 즐기게 해주고 싶있어요." 내가 부모님을 보며 밝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안다. 네가 맞지도 않는 신발을 들고 다녔지. 내 동생은 사줘도 타지도 않고."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도 알았다. 엄마의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말이다. 엄마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단지 엄마는 엄마의 엄마로부터 배운 대로 아들딸을 낳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았을 뿐이다.
요즘도 시간이 나면 스케이트장을 찾아 스케이트를 탄다. 어렸을 적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 스케이트를 탔던 그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넘을 수 없는 선이란 없음을 되뇐다.
추운 겨울, 발에 맞지 않는 큰 스케이트를 신고 수없이 넘어지고 온몸이 젖으며 배운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었다. 발이 휘휘 도는 오빠의 스케이트지만
신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없음을. 넘어지지 않고서 어찌 일어나는 법을 배우겠는가?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라며 꺼내 들고 빙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잣대가 다름을 그리도 명료하게 알았겠는가? 나는 달릴 수 있는 한 늘 달렸고, 내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고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다.
어린 나는 세상의 불평등은 모르되 집안에서의 불평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걸 넘는 방법은 나 스스로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겨울바람처럼 명료하게 깨달았다.
넘어지다 보면 넘어지는 순간 넘어지는 이유를 알게 되고. 일어나다 보면 일어서는 순간 일어나는 요령을 알게 되니. 세상 이치는 잔혹하지만 대가 없이 배워지지 않음을 나는 발에 맞지 않는 오빠의 큰 스케이트를 타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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