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이 소설들을 ‘결국은 인간 이야기‘로 요약해서는안 될 것 같다. 『잔류 인구는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노인 오필리아가 인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이야기인 동시에 이 개척 행성의 원래 주인공인 자생종들, 인간과 대화할 수 있고 교감할 수도 있으나 인간과는 다르게 북을 치고 독특한 집단을 만드는 존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오필리아만의 이야기로 보는 것은 소설의 중요한축 하나를 완전히 빠뜨리는 셈이다. 중력의 임무』의 중심은역시 괴상하게 생긴 외계 생물, 그리고 낯선 행성 메스클린 자체다. 메스클린인은 우리 인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지만(심지어 소설 속에서 지구인과 교류하지만)어쨌든 소설의 초점은 메스클린의 기이한 생물과 행성에 맞

와 최초의 접촉을 하는 것, 그런 간접 경험들은 우리가 발 디딘 지상을 한 번쯤 떠나게 만든다. 

한 번이라도 떠났다 돌아오는 것과 
아주 떠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일단 저 밖에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오면 남은 평생 인간의 관점에 매여 살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결망의 한 점으로, 조그만 구성요소로, 
수천수만 가지 현실의 단면 중 오직 일부만을 감각하는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그 무렵 나는 상상력과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SF를 쓰겠다고 생각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세계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모르면 모르는 대로 여기저기 구멍이 났다.
 대학 시절 내내 배워서 그나마 익숙한 과학지식은 소설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에 불과했다. 대충 얼버무리려 해도 단 한 줄짜리설명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으면 독자에게 세계 전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습작 시절 쓴 소설들을 다시 보면 유명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분위기를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 많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밑바탕이 없으니 살면서 접해온 익숙한 이미지를 빌려와야 했던 것이다. 몇 권을 쌓아둔 노트의

 ‘SF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료를 다 찾아 읽기로했다. 먼저 국내 SF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이는 대로 전부 읽었다. 다른 신문 기사와 웹진의 인터뷰도 유용했지만 

특히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정리된 인터뷰가 소중한 자료였다. 

다른 작가들이 SF가 어떤 장르인지에 관해 뭐라고 말했는지 읽으며 한국에서 SF가 읽히고 또 쓰여온 흐름을 되짚어 갔다. 지난 이십 년간 반복된 비슷한 질문에 작가들이 고민한 흔적이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왜 SF를 쓰시나요?" "SF는 무엇인가요?" 내가 데뷔 초기에 너무나 많이 받았던 질문을 이전 작가들도 똑같이 받은 것을 보니 웃음도 나오고 괜한 친근감도 느껴졌다. ‘이제 새로운 질문이 나올 때가 됐습니다!‘ 하고 분개하던 작가들의 심정에 백번 공감이 갔다. 작가들의 성실한 인터뷰 답변은 내가 SF라는 장르를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국내 SF 작가들의 인터뷰를 잡히는 대로 읽은 다음에는 구

Science Fiction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위키피디아부터 온갖 SF 사전, SF 매거진, SF 리뷰 블로그, SF 칼럼을 눈에띄는 대로 읽었다. 지금은 SF 비평이론을 상세히 소개하는 좋은 번역서가 몇 권 나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번역된 단행본이 거의 없었고 나는 파편화된 자료들을 모아 담아서 나만의 SF에 대한 상을 그려가야 했다. 물론 몹시 혼란스러웠다.

내가 읽은 SF에 대한 수많은 정의를 아주 대충 요약해서 나열해보면 이런 식이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6)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