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강연을 하러 가면 "제가 생각하는 SF가 어떤 장르인지 소개하겠지만, 사실 합의된 정의는 없습니다"라고 먼저 이야기한다. SF가 흔히 어떤 특징들을 지녔고 내가 좋아하는 SF의 요소들이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어도 여기서부터 SF이고 저기서부터는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한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SF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위해 온갖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하는 과정이 분명 내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SF 작가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밑천을 만든 셈이었다.
데뷔 직후에 나는 ‘이런 게 무슨 SF냐‘는 퉁명스러운 리뷰를 종종 보았다(재미있게도 이 말은 작품에 대한 칭찬으로도 멸시로도 쓰인다). 그 말이 신경 쓰여서 누가 봐도 SF인글을 써보겠다고 ‘SF란 무엇인가‘를 탐험하는 과정을 지나고 나니,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이미 SF라는 폭넓은 세계의 어느 언저리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이 소설들은 SF 세계의 일부였다.
첫 소설집을 쓰면서 나는 SF의 고전적인 테마들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도전해 보았다.
과학책을 읽을 때 나는 무조건 연필과 플래그를 지참한다. 책에서 발견한 아이디어가 소설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카라플라토니의 감각의 미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최신 인지과학을 탐색하는 책이다. 목차에는 우리가 흔히 감각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간 감각‘에 대한 챕터도 있다.
인간의 시간감각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기본적인 감각들을 뇌안에서 통합하고 편집하여 인지하는 초감각이자 다중감각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언젠가 이것을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나중에 울산의 공중관람차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어갔다. 관람차를 탈 때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 주위의 풍경이 멈춘 듯한 기분을 시간 감각, 시간 인지능력과 연관 지어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 결과물은 「캐빈 방정식이 되었다. 소설의 화자는 삼 년 전 사라진 언니에게서 울산 공중관람차의 귀신 출몰 소동에 대해 조사 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소문의 실체는 언니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던 시간감각의 왜곡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뢰받은 소재와 당시 읽고 있던 책에서 다루는 소재가 합쳐지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장 : 미술과 사회> 전시 도록의 일부로 실을 소설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무엇보다 과학에 관한 생각이 조금은 복합적으로 변한 것도 있었다. 나를 이 세계로 초대한 과학책들은 열정과 호기심, 순수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 과학은 그렇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실험, 행정업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포함해 반복되는 잡다한 일들,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잡한 문제들. 그 안에도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여전히 과학이 좋았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시기, 새로운 길이 눈앞에나타났다. SF 공모전에 냈던 두 편의 소설이 수상 소식을 가져왔다. 기사가 크게 나서 장르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도 되었다. 대학원 졸업 학기, 진로를 결정해야 할 무렵이었다. 마땅한 길을 찾지 못했던 나는 이왕 주목받는 행운을 누린 김에 딱 일년만 전업 작가로 살아보자는 뜬금없는 결정을 내렸다.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구조에 기인한다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받아들이며 출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인이 몸과 정신의 손상, 즉 장애 자체로 겪는 고통도 분명히 실존한다. 어떤 사람의 장애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서, 그가 개별자로서 고유하게 경험하는 몸의 고통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현대의 장애 담론은 손상을 장애화하는 사회, 제도, 문화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장애인 사이의 다양성, 구체적인 몸의 고통과 경험, 장애 정체성과 자긍심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룬다.
한편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간 신체-결합기술에 관한 대중서와 학술서도 국내에 여럿 나와 있었다. 마크 오코널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
열심히 살다니 정말 대단해!‘ 같은 맥락 없는 말을 듣게 되거나, 앞으로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소설이 장애라는 해석 틀로만 읽힐까봐 다소 섣부른 걱정을 했다. 그래서 약간은 방어적인 태도로 초고를 썼다. 그 결과는 내가 너무 글 뒤에 숨어버린, 무미건조한 글이 되고 말았다.
편집자님의 피드백에 대부분 동의했던 나는 일단 초고를 뜯어고치며 내 경험 서술을 늘리고 회상 장면들을 ‘감정적으로‘ 크게 수정했다.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자기 이야기를 녹여내는 김원영 작가의 파트를 읽으며 분석도 했다. 그런데 내글을 수정할수록 뭔가 좀………… 아닌 것 같았다! 대체 뭘까. 이기분은? 한참 고민하다가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계속 이야기를 나눠왔던 연구자 K에게 글을 보여주었다.
K는 글을 다 읽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 아니야. 이건 너무 과해." K의 말에 따르면, 추가된 내용이 독자의 몰입을 돕는 대신 그냥 불평불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K의 ‘과하다‘는 표현 하나로 내 원고에 느꼈던 거리감이 정리되는기분이 들었다.
독자를 몰입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내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지나치게 부풀린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추가된 경험들이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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