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존재하는 그 어떤 것,
존재했던 것들,
더럽혀지기 쉬운, 그러나 더욱 서늘하고 순수한 그것

죽지 말아라...
그러나 여전히 죽음을 방치하기도 하곤 했던 그 어떤 무심한 시선...

이 책을 읽으며 소파수술을 했던 과거의 어느 겨울 외로운 오후가 기억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선이 말을 이었다.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나는 캐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대답해야만 하는의무를 부과받은 듯 그녀는 신중하게 다음 말을 골랐다.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연필을 힘껏 눌러써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인선의 음성이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아미한테는 뒤의 말만 제대로 들렸을 거야. 내가 그렇게 우는 동물인 줄 알고 따라 했는지도 모르지.
그 소원이 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연필 있어?
내 물음에 인선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샤프펜슬을 빼내 건넸다.
그걸 받아 쥐고, 등뒤 촛불이 너울대는 대로 흔들리는 내 그림자

를 앞세워 나는 마루를 건넜다. 벽이 가까워질수록 새와 나의 그림자 사이가 좁혀졌다. 닿는가 싶더니 어슷하게 포개어졌다.
샤프펜슬을 쥔 손을 내 그림자 밖으로 뻗었다. 계속해서 얼굴의각도가 바뀌는 새의 윤곽을 따라 벽에 선을 그었다. 새는 양안시가아니기 때문에 자꾸 얼굴을 움직여 전체의 상을 보는 거라고 했다.
무엇을 보려고 하는 걸까. 그림자만 남아도 보고 싶은 게 있나.
힘주어 그은 것 같지 않은데 자꾸 심이 부러졌다. 그림자에 덮인 서늘한 벽을 손바닥으로 짚고 옆으로 걸으며, 샤프펜슬의 꼭지를 거푸 눌러 새 심이 나오게 하며 나는 계속 선을 그었다. 새의머리 윗부분을 그리기 위해서는 발뒤꿈치를 세우고 힘껏 팔을 뻗어야 했다. 그러다 내가 그리고 있는 윤곽선 바깥으로 다른 선을발견했다. 작년 가을 내가 그어놓은 연필 선이었다.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의 머리 부분 같았다. 길고 완만하게 인선의 어깨 윤곽을 따라 그렸던 선은 새 그림자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은뒤 이 벽을 본다면 교차되고 겹쳐진 선들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볼수 없을 거란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더이상 샤프펜슬에서 심이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부엌을 향해 돌아섰다. 인선이 있어야 할 의자가 천에 덮인 새장처럼 고요했기 때문이다.

그해에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어.
열두 살부터 젖먹이까지 여동생 셋, 남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가장사랑한 건 그해 정초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이었어.
은영이라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었다. 학영, 숙영, 진영, 희영 다음으로 순영이라고 이름 붙이려는 할아버지를 만류하면서, 안 그래도 순한 아기가 이름 따라 더 무르게 자라면 어쩌려느냐고.
밑단에 시보리가 달린 점퍼를 겨울 교복 위에 입으라고 할머니가 사주었는데, 봄에 동맹휴학을 할 때 아버지는 하숙비를 아끼려고 짐을 싸서 돌아와서는 그 점퍼 속에 아기를 넣고 다녔다. 친구를 만나면 지퍼 위쪽을 열고 솜털 같은 머리카락을 보여주려고.
아기가 조그만 손을 뻗어올려 셔츠 깃을 움켜쥐는 걸 보고 여자애들이 감탄하는 걸 들으려고. 떨어뜨리면 어쩌려느냐고 할머니가나무라면, 꼭 안고 다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넘어질 것 같으면 얼른 뒤로 자빠져버릴 테니 아기는 아무 일 없다고.
산 위 무장대 삼백 명과 내통할 수 있다고 군경에게 의심받을나이의 남자는 맏아들뿐이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만 걱정했어.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

서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다. 동굴에서 아버지는 낮엔 호롱불을 켜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시국이 지나가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불을 끄고 앉아 있었어. 자정 녘에야 집에 들러 식은밥을 먹고 눈을붙이고, 찐 감자 서너 알이랑 종이에 싼 소금 한 첩을 동트기 전에싸들고 다시 동굴로 올라갔다.
그 11월 밤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동굴을 나와 집으로 오는길이었어. 건천을 건너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다.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어디로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건천 기슭 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마을 공터 쪽에서 일곱 발총성이 울렸다. 뒤이어 군인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걸 아버지는 숲 사이로 지켜봤어. 먼 거리였지만 손을 잡고 걷는 두 동생을 알아보았다. 더 어린 아이들을 앞세워 걸리거나 아기를 업은 여자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넘어지거나 빨리 걷지못해 자꾸 행렬이 지체됐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

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더이상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아버지는 마을로 달렸어. 뒤돌아보자 가호 수가 더 많은 아랫마을에서도 불길이 타오르는게 보였다. 불꽃이 얼마나 크고 밝은지, 연기가 솟아 닿는 구름의 흰빛이 보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집까지 시신을 업고 가서 마당 가운데 뉘어놓고,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댓잎 한아름을 끊어왔다. 헝겊 대신 그걸로 얼굴과 몸을덮고, 아직 잔불이 타고 있는 창고 자리에서 자루가 타버린 삽을끌어냈다. 달궈진 쇠가 식기를 기다리 댓잎 위로 흙을 덮었다.
솟구쳐오른 오렌지색 불꽃이 유연하게 몸을 휘며 흔들리고 있다. 그 움직임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인선이 말한다.

인선의 손가락이 거둬진 연필 선을 나는 본다. 청색 볼펜의 필압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힘주어 그은 밑줄이다. 손끝을 얹자 종이이젠 실금이 느껴진다. 이 선을 그은 사람도 알았을까. 나는 생각한다. 인도 날짜와 총살 장소 사이의 관계를, 방금 인선이 한 것처럽 추정했을까.
1960년 여름이야, 여기서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 처음 모인 건.
전쟁 당시 수뇌부가 4.19로 물러난 직후에.
귀퉁이가 삭은 신문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넘겨간 인선의 손이반으로 접힌 스크랩을 꺼낸다. 그녀가 두 손으로 그걸 펼치자, 광고가 실렸을 하단을 오려낸 사회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위령제 기사가 실렸던 곳과 같은 신문이다. 날짜는 위령제보다 한 달가량 앞서 있다.
십년 만에 처음으로 갱도에 들어간 유족들에 대한 기사야. 그때 찍은 사진이 이건데, 어디서도 실어주지 않으니까 후일을 기약하고 유족들이 나눠 가진 거야.
인선의 말대로 기사에는 갱도 사진이 실려 있지 않다. 대신 광

산 입구의 전경이 머리기사 옆에 실렸고, 사진 왼편에 유족회 대표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다.
십년 동안 갱도에 물이 흐르고 삐들이 삭아서 흩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온전한 형체를 갖춘 유해는 한 구도 없다고 보시면되겠습니다. 우리는 수습할 장비도 인력도 없이 무작정 내려가본거여서 사진 한 장만 찍고 올라왔습니다.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추정한 숫자는 삼천 명이 넘는데, 제가 본 제1수평갱도에는 대략 오륙백구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수직갱도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놨는데, 그걸 뚫고 내려가 아래쪽 수평갱도를 살펴봐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는 경북 방언의 억양을 입고 있었을 침착한 문장들 아래에서 무엇인가 새어나오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촛불의 빚을 타고끈끈하게 흘러나오는 것, 팥죽처럼 엉긴 것, 피비린내나는 것이있다.
어떻게 구하신 거야, 이런 기사들을?
얼굴을 들고 나는 묻는다.
경북에서 발행된 신문이 제주도에 배급됐을 리 없잖아.
직접 가서 산 거지. 하고 인선이 담담하게 대답했을 때에야 나는 깨닫는다. 지금 떠올려야 할 사람은 이불 속에서 주름진 손을

산 입구의 전경이 머리기사 옆에 실렸고, 사진 왼편에 유족회 대표의 인터뷰가 들어가 있다.
십 년 동안 갱도에 물이 흐르고 뼈들이 삭아서 흩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온전한 형체를 갖춘 유해는 한 구도 없다고 보시면되겠습니다. 우리는 수습할 장비도 인력도 없이 무작정 내려가본거여서 사진 한 장만 찍고 올라왔습니다.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추정한 숫자는 삼천 명이 넘는데, 제가 본 제1수평갱도에는 대략 오륙백 구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수직갱도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놨는데, 그걸 뚫고 내려가 아래쪽 수평갱도를 살펴봐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는 경북 방언의 억양을 입고 있었을 침착한 문장들 아래에서 무엇인가 새어나오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촛불의 빛을 타고끈끈하게 흘러나오는 것, 팥죽처럼 엉긴 것, 피비린내나는 것이있다.
어떻게 구하신 거야, 이런 기사들을?
얼굴을 들고 나는 묻는다.
경북에서 발행된 신문이 제주도에 배급됐을 리 없잖아.
직접 가서 산 거지. 하고 인선이 담담하게 대답했을 때에야 나는 깨닫는다. 지금 떠올려야 할 사람은 이불 속에서 주름진 손을

꺼내 나에게 내밀던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흑백사진 속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던 자그마한 몸 전체에서 생기가 배어나오던 여자라는걸.
대구역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석했던 것 같아. 그날 받아온 유인물이 있었어.
역전 위령제에 관한 기사가 아직 펼쳐져 있다. 나는 촛불을 옮겨 다시 사진을 본다. 군중의 삼분의 이가량이 여자들이다. 긴소복의 허리를 동여매거나 무릎까지 오는 흰 원피스를 걸친 수백 명의 여자들이 플래카드를 향해 서 있다.
이런 옷이었던가.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뭉개어진 여자들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목깃이 둥근 반소매 원피스를그 여자도 입고 있었나. 일어서서 상자 속 액자를 꺼내 확인하고싶다고 생각했을 때 인선의 손이 허공을 건너온다. 그녀가 내민서류봉투에 군청색 펜으로 적힌 수신인의 이름을 나는 읽는다.
姜正心貴下.
발신인 자리에 대구 주소와 함께 찍힌 청보랏빛 직사각형 스탬프에 촛불을 비춰 나는 묵독한다.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
나는 싸늘한 봉투 속에 손을 넣는다. 팔절 갱지 십여 장을 반으

로 접어 중철한 소책자를 꺼내든다. 따로 두꺼운 종이를 쓰지 않은 표지를 넘기자 첫 페이지에 편지글이 실려 있다.
유가족들의 피맺힌 원을 받들어 십 년 세월 그리던 임을 만나고이 쉬게 해드릴 날이 곧 옵니다
‘피해 유가족들은 낡은 공포심을 극복하고…‘라는 문장을 쓴사람과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되는 길고 격앙된 문장이다. 다 읽지않고 페이지를 넘기자 조악한 화질의 흑백 단체사진이 나온다.
1960년 겨울에 코발트 광산 앞에서 찍은 사진이야. 이때 엄마는 가지 않은 것 같아. 대신 유족회원으로서 회비를 냈기 때문에이 우편물을 받은 거야.
사진 가운데 서 있는 안경 쓴 남자를 집게손가락으로 짚으며 인선이 말한다.
이 사람이 유족회장이야. 이듬해 5월 군사 쿠데타 직후 체포돼서 사형 언도를 받았어. 옆에 있는 총무는 십오년 형이 나왔어.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유족들이 나눠 가졌다던 갱도 사진이 더욱 조악한 화질로 복사되어 캡션과 함께 실려 있다. 내가 미리 보지 않았다면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을, 흑과 백만 남기고 그사이의 색조와 세부가 지워진 사진이다. 그 페이지의 갈피에 중앙석간지 사회면의 단신 스크랩이 끼워져 있다.

마는 아이처럼 울었어. 짜고 끈끈한 그 손가락을 억지로 빼내지못하고 나는 견뎠어. 장사처럼 힘이 세진 엄마가 숨을 못 쉬도록나를 껴안을 때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주 껴안았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 속에서, 그 으스러지는 포웅이 계속될수록 점점 엄마와 나의 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얇은 피부, 그 아래 한줌 근육, 미지근한 체온과 혼란이 나의 것들과 뒤섞여서 한덩어리가 되었어.
엄마는 나를 죽어가는 동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어. 언니라고 믿을 때가 더 많았고, 어떨 때는 낯선 사람으로 여겼어. 자신을구하러 온 모르는 어른. 무서운 악력으로 내 손목을 붙잡고 엄마는 말했어. 구해줍서. 해가 저물면 엄마는 더 깊은 혼란에 빠져 집밖으로 나가고 싶어했어. 바깥이 얼마나 춥든 걸친 옷이 얼마나얇든 상관하지 않았어. 말릴수록 땀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는 엄마와 한몸이 되어서 씨름할 때마다, 내가 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 근육이 거의 사라진 노인 한 사람의 힘이 어떻게 그렇게 셀 수 있었을까? 씨름 끝에 겨우 이부자리에 누이고 그 옆에 누워 눈을 붙이면, 그사이 정신이 돌아온 엄마는 내가 잠들려는 순간마다 흔들어 깨웠어. 지척에서 입을 벌린 혼돈때문에 잠드는 순간 모든 연결고리를 다시 놓쳐버릴까봐. 제발삼십 분만이라도 이어 자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듣지 않았어. 도와주라. 잠들지 말앙. 나 도와주라 인선아.

밤새 끓으며 타는 죽처럼 그렇게 우린 함께 튀고 흘러내렸어.
도와주라. 나 구해주렌. 속삭이다 잠든 얼굴에 손을 뻗었다가 물에 빠진 사람같이 젖은 뺨이 만져지면 엄마를 둥지고 누워 생각했어.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내가 구해.
사실은 죽고 싶었다. 한동안은 정말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네 시간 다녀가게 되면서부터야 읍에 내려가 장을 보고, 트럭 안에서 두 시간이라도 이어서 눈을 붙이면서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곧 둘만 있는 시간이 오고, 실랑이 끝에 기저귀를 갈고, 가벼운 편이라 해도 손목을 시큰거리게 하는엄마 무릎을 들어올려 파우더를 두드리고, 내 손을 움켜잡고 잠든엄마의 베개 옆에 머리를 묻으며 생각했어.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않는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엄마의 정신이 극도로 맑아지는 순간들이 심광처럼 찾아왔어.
예리하게 버린 칼 같은 기억들이 엄마를 습격하는 때가. 그럴 때면 엄마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메스에 몸 가운데가 벌어진사람처럼. 피투성이 기억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그 섬광이 지나가는 즉시 더한 혼란이 찾아왔어. 나를 끌고 기어가 식탁 아래 숨곤 했는데, 그때 엄마 머릿속 지형도에서 안방은 어릴적 살던 한지내 집이고 내 방은 외가, 부엌으로 기어가는 길은 숲이었던 것 같아. 식탁 아래에서 날 껴안고 있던 엄마가 내 이름을정확히 불러 놀라기도 했어.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를 지키려

고 엄마는 턱을 떨었어.
머릿속 수천 개 퓨즈들에 일제히 불꽃 튀는 전류가 흘렀다가 하나씩 끊기는 것 같은 과정을 나는 지켜봤어.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나를 동생이나 언니로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을 구하러 온 어른이라고도 믿지 않았고, 더이상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았어. 점점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가끔 말한다 해도 단어들이 섬처럼 흩어졌어. 응, 아니, 라는 대답까지 하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는 원하고청하는 것도 없어졌어.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그즈음부터 엄마는 잠을 잤어. 언제 그렇게 나에게 잠재우지 않는 고통을 주었느냐는 듯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이상을 잤어.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 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 있었어.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모래펄이완전히 잠긴 뒤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이상 내 방으로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
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

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이곳에 살았던 이들로부터 이곳에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꿈처럼 스며오는 지극한 사랑의 기억

한강은 모든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각각의 작품에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지니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제로 현대산문의 혁신가로 자리매김했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강은 하게 만든다.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에도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고 믿게 된다.
학살 이후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제주에서 경산에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반세기를 넘긴다. 폭력에 훼손되고 공포에 짓눌려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딸의 눈과 입을 통해 전해진다.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언젠가부터 그의 새 소설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이 된다.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신형철(문학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4.3 유족의 딸입니다. 그동안 가슴속 어두운 무거운 돌 같은 역사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온 것 같아요. 인선에게, 인선의 엄마에게 고개 숙이고 두손을 내밀어 보고 싶습니다. 딛고 선 이곳이 어디인가... 울울한 삶의 현장, 여전히 서청의 마이크가 왱왱거리는 곳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꼭 한 뼘 키가 큰 언니. 보풀이 약간 일어난 스웨터와 아주 조금 상처가 난 에나멜 단화를 물려주는 언니.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쉿,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입술에 집게 손가락을 대며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 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봐. 내 수학문제집 여백에 방정식을 적어가는 언니. 얼른 암산을 하려고 찌푸려진 이마.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 나에게 앉아보라고 하는 언니. 스탠드를 가져와 내 발 언저리를 밝히고, 가스레인지 불꽃에 그슬려 소독한 바늘로 조심조심 가시를 빼내는 언니.

풀어서 다시 쓰면 이렇다.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 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한강의 소설들을 다시 읽는 이 자리에서, 섬세한 해석을 통해 정확한 ‘답‘을 찾아내기보다, 차라리 질문들 사이의 간격 또는 변화를 더듬으면서 그 사유의 운동을 우리의 읽기 안에서 다시 발생시켜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답을 바라지 않는 작은 호의를 타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적처럼 울려퍼지는 삶의 멜로디

여러분이 접어든 이 책은 세상의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빛을 기적처럼 모아놓은 사각형의 종이 뭉치다. 
어쩜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조해진 작가는 먼나라의 참혹함과 내가족의 생존이 별개가 아님을, 
살리는 일의 귀함과 소박함을, 이 의심과 냉소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끝내설득해낸다.
"폭격소리가 가까워져도 응급수술을 중단하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처럼.
소설만이 도달 가능한 힘으로 
기꺼이 서로에게 피난처가 되고자 하는 우리 마음속 빛 조각들을 끌어모은다.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한 사람을 통과해 뻗어나가는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 
이 온기로 나는 다시 한편 지구의 태엽을 감아 빛과 멜로디를 흐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맙고 또 고맙다. 김하나(작가)

빛과 멜로디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다. 언제나 있었고 언제고 있을 이야기다.
조해진은 폭설 속에서도 전쟁중에서도 어떻게든 온기를 찾으려 한다. 엄혹한 상황에서도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않으려 한다.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의 온기"가 스민 문장을 읽다가, 그의 소설을 읽는 시공간이야말로 그 온기가 발산되는 현장임을 깨닫는다. 
인간이 사랑과 상처를 주고받듯, 빛과 멜로디는 흐르다 어느 순간 스며든다. 
시리아에서 레바논에서, 남수단에서, 가자지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이 바로 이곳에 있다". 오은(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