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꼭 한 뼘 키가 큰 언니. 보풀이 약간 일어난 스웨터와 아주 조금 상처가 난 에나멜 단화를 물려주는 언니.
엄마가 아플 때면 코트를 걸치고 약국에 다녀오는 언니.
쉿, 조용조용히 걸어야지. 자신의 입술에 집게 손가락을 대며 나무라는 언니. 이건 아주 간단한 거야. 쉽게 생각해봐. 내 수학문제집 여백에 방정식을 적어가는 언니. 얼른 암산을 하려고 찌푸려진 이마.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 나에게 앉아보라고 하는 언니. 스탠드를 가져와 내 발 언저리를 밝히고, 가스레인지 불꽃에 그슬려 소독한 바늘로 조심조심 가시를 빼내는 언니.
풀어서 다시 쓰면 이렇다.
질문은 어떤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대답은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질문을 해소하는 진술 속에 있지 않다. 질문이 충분히 개진되었을 때, 그 질문을 숙고하고 있는 사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데, 바로 그 ‘변화‘ 안에 답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다가 다른 질문이 되고 마는 일련의 이행 자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해결책으로서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답을 찾아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오히려 어서 빨리 끝을 보고 싶은 초조함 때문에 질문을 숙고하던 사유가 끝낼 수 없는 사유의 운동으로부터 물러서서 자신의 운동을 중단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한강의 소설들을 다시 읽는 이 자리에서, 섬세한 해석을 통해 정확한 ‘답‘을 찾아내기보다, 차라리 질문들 사이의 간격 또는 변화를 더듬으면서 그 사유의 운동을 우리의 읽기 안에서 다시 발생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