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친구들한테 아빠가 만들어줬다고 자랑해야지‘라며 맑은 입으로 바쁘게 종알거린다. 
반짝반짝 빛나는 노란 조명의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보고 의자에 앉아보고 책상을 만져보고 서랍을 열어보고 하며 소꿉놀이라도 되는 듯 하나씩 점검했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하루의 힘든 노고가 스르르 사라진다. 내가 만든 것 중 제일 큰 작품이었다.

언젠가 이 화장대보다 비싼 제품이나 고급가구를 더 좋아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래도 아빠의 정성이 들어간 물건이 추억으로 남겠지 생각하면 애틋하다. 

인생에 기억할 만한 좋은 추억은 그리 자주 오지 않으며, 그런 날은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계절의 끝을 맞이할 즈음에 문득 깨닫는다. 
그런 봄날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누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서둘러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짧지만 좋은 날, 오래도록 추억으로 간직되는 날,
당신에게도 오늘이 봄날이었으면 좋겠다.

나무를 만진다는 건
나를 위로한다는 것

"나무는 땅이 하늘에 쓴 시이다."
칼릴 지브란(레바논의 철학자, 시인)

"숲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과
오래된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묘한 공기 때문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의 작가)

"우리의 모든 지혜는 나무에 저장되어 있다."
산토시 칼와르(네팔의 작가)

이곳에선 오직 나만 위할 것
반드시 쉬었다 갈 것
많이 행복할 것

"도심 속 작은 귀퉁이에서 즐거움의 세계가 열린다!"
취미와 예술이 만나는 작은 목공소가 여기에 있다. 집에서 목공을 하기 위해
이사까지 감행한 저자는 거실 베란다에 목공소를 차려놓고 토요일마다 놀러간다. 
운과 요행은 없는 세계, 노력과 실력만 있는 세계에서 정확하게 나무를 자르고 이어붙이며 몰입의 기쁨을 누린다. 

이 책은 무료하고 밋밋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주위를 둘러보라. 작은 귀퉁이에 자리를 마련하라.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이든 시작하라. 즐거움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황보름(소설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나무를 닮은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
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 중 가장 아름다운 재료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나무를 고르겠다. 저자의 글에는 나무를 닮은 정직함과 따뜻함이 깃들어 있다. 
나무의 결에 발맞추어 자연스러운 창작을 이어가는 목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무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연결되는 다정한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임이랑(에세이스트, 《아무튼, 식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필로그

아버지는 경남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서 대처승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동쪽에 별이 떨어지는 날이었다. 그래서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동성‘으로 지었다. 아버지의 등에는 녹두알만 한 검은 점들이 북두칠성 모양으로자리해 있는데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내려앉은 것이라 받아들였다.
해마다 한 질씩 책을 사들였던 손 여사 덕분에 문고판위인전을 많이 읽었던 나는 아버지의 등에 수놓인 검은점들을 비상하게 여겼고, 언젠가 아버지가 세상을 깜짝놀라게 할 사건을 벌일 거라고 상상하며 지냈다.
아버지의 인생을 통틀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은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세계 안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놀라운 사람이었다. 속이 투명한 아버지는 자신의 희로애락

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아버지의그 맑은 감정들이 좋았다.
손 여사가 나를 낳기 전 배를 어딘가에 부딪힌 적이있었다. 막달이었다. 다행히 나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였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아버지는 줄줄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아프게 한 것에 아버지는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내가 혹여 입술이라도 파래지면 아버지의낯빛은 그보다 더 파랗게 질렸다. 어떤 상실을 걱정하고두려워하는 눈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걱정 덕분인지 나는 무탈하게 잘 자랐고, 지금은 지나치게 건강하다 싶을 정도로 풍채를 키워 살고있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상실을 두려워하며 나를 살폈던것처럼, 그럴까 봐 겁먹고 울었던 것처럼,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오래 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어떤 게 편안한 삶인가 내내 고민하고 있지만 나는 아버지의 삶 너머를 상상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바보처럼 울고만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돌파해나갔던 사람은 아니었다. 경제 부흥기에 발 빠르게 움직여 대단한재산 축적을 이루지도 못했다. 노년의 삶이 어찌 될 것인

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겠지만 이렇게 일찍 은퇴해 집으로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죽음 또한 상상해보지 않은 영역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아버지가 자주 했던 말은 "죽고 싶다"였지만, 치료가 잘 진행되었다고 전해줄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죽을 뻔했다"고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나도 아버지만큼 겁을 먹고 산다.
나는 아버지 병구완을 하기 전까지는 바쁜 현재를 사느라아버지의 노년은 물론 나의 노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적금 통장을 유지하는 정도로 노인이 되어장애가 생길 나의 미래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 죽을것인지도,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한고민이 없었다. 그랬던 나는 아버지의 삶을 돌보며 내 삶을 돌아보고, 그보다 더 자주 미래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면서 설계를 하기 시작했다. 존엄하게 사는 방법, 내 스스로 삶을 온전히지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숙고하게 된 것이다. 존엄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죽음이라는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학으로 번역되는 타나톨로지 Thanatology는 죽음이내제된 생명학으로 정의된다. 타나톨로지를 통한 ‘죽음교육‘은 존엄한 죽음보다 존엄한 삶을 목적으로 한다. 어떻

게 후회와 절망을 느끼지 않고 삶을 마감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대비하게 한다. 1960년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첫 강의가 시작된 이래 많은 연구자들이 죽음학 연구에합류하고 있다. 2021년 우리나라의 배재대학교에서도 교육과정으로 채택하여 정식 학문으로서의 죽음교육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원고를 쓰면서 내가 붙였던 첫 제목은 ‘나의 아버지는 병원에 산다‘였다. 2020년 12월 대학병원 응급실에들어간 아버지는 대학병원과 재활전문 요양병원을 거쳐현재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계시는데, 그런 아버지의 실존적 상태를 드러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제목을 달아놓은 채 원고를 써내려갔다.
원고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전히 병원에, 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2024년 3월 11일 낮에 요양원 담당 간호사와 통화했을 때, 아버지의 몸무게가 그새 2킬로그램이 빠져 44킬로그램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호사는 아버지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노인의 건강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기력을 잃고 계시다고 말이다.
"제가 뭘 더 할 수 있는 게 없을까요? 캔으로 식사하실

때 영양제 같은 것을 넣어드릴 수는 없을까요?"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프로틴 파우더가 있으니 그걸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것들이 드라마틱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몸에 보충이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간호사가 말한 제품을 주문했다.
단백질 파우더를 주문해 보냈다는 소리를 들은 지인은 이것도 "이제 곧 끝날 일"이라며 내게 "그간 고생했다"
고 말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도 과거형으로표현했다.
실제로 나는 아버지 병구완을 하면서 "나이 드셨으면 어서 가셔야 젊은 사람이 살지. 젊은 사람 발목을 너무 오래잡고 계신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생각보다 많이 만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내가 사는 것인 양 여기는 말들이 가혹하게 다가왔다. 도착하지도 않은 죽음을 당겨서실행하고 있는 그들의 말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반대한다고 말했다. ‘존엄한‘이 붙은 죽음은 현실의 여러 다른 죽음들을 존엄하지 못한 것들로 치부시키기도 하니까. 또, 존엄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존엄과는 상관없이 어떻게든 생을 연명하고 싶은

욕망을 ‘존엄‘이란 이름으로 내리눌러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지인이 독하고 모질어서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님을 안다. 어느덧 초고령 사회에 진입해 인구의 20퍼센트가 노인이 된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병든 노인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식상할 정도로 많기 때문에, 노인 돌봄 현실에 봉착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이며 관습적인 방법으로 공감해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공감은 이제 정말 괜찮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고통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데, 그 고통에서 놓아주는 게 나은 선택이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가단정할 수 있는 범주의 선택이 아니다. 아버지는 나를 만나면 여전히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마주하며, 당신의 생존을 생생히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생이 얼마나 남았든, 내가 할 수 있는일들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부탁하고 싶다. 나를 "좌파 고양이"라고 부르는 우파 손 여사에게, 이제는속수무책 멀어진 자매들에게, "우파 고양이인 아버지를부탁하는,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간의 속내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다르지만, 다름 이전에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와 감정이 있음을잊은 건 아닌지 환기시키고 싶었다.

또한, 나의 아버지와 같은 위 세대를 더 젊은 세대에게 부탁하는 마음을 담아내고 싶었다. 돌봄 현장에서의노인 혐오와 인간 존엄이 배제된 구조를 보다 현실적인차원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여다보길 바라는 간절함을공유하고 싶었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우리 세대의 보편적이며 구체적인 기록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록서사‘가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러한기록에 가깝기를 바라면서 나는 나의 우파 고양이, 아버지를 부탁하는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나의 헤밍웨이, 나의 윌리엄 포크너, 나의 마루야마 겐지,
나의 로맹 가리, 나의 존 쿳시... 나의 아버지 동성 씨의말을 끝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내는 니를 사랑한데이."

감사의 말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많은 분들의 에너지가 실렸다. 이 책에 멋진 추천사를 써주신 김선민 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보낸다. 원장님의 문장이 보태지니 내 글이 한결 나아 보였다.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우정과 애정을 담뿍 담은 추천사를 보내주신 홍용호 감독님과 소설가 우다영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세분의 응원 덕에 세상을 뚫고 나갈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열번도 넘게 원고를 갈아엎느라 긴 시간을 보냈는데, 그동안 묵묵히 기다려준 출판사에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더 이상 홀로 밤새우지 않도록 곁을 지켜준 편육스님과 고양이 바라에게 내 뜨거운 심장의 언어로 사랑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래오래 내 왼쪽과 오른쪽을채워주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

소원해진 나의 자매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싶다. 소식이 닿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는 언니들과 막내를 내내 그리워했는데, 제대로 그런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족 앞에서는 그런 마음들이 말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먼 곳에서 살든, 가까운 곳에서 살든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빈다.
마지막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 누군가의 손을 잡고 계실 독자분들과 그 가족분들에게 안녕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빈다. 온 우주의 기운이 가까이 모여 병상에서 번쩍 일어날 우리의 가족들을 간절하게 상상하며 한없이 부족한 이 글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희망한다.

‘초고령 사회를 살아가는 당신과 나에게,
늙고 병든 가족 구성원을 부탁하는 서투른 마음.
삶과 돌봄, 사랑과 좌절에 관한우리 시대의 아주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인 기록.

저자의 글은 영화 장면처럼 선명했다. 좌파 딸과 우파 부모, 서로 다른 남매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읽는 내내 풉 하고 웃기도 했고, 세밀한날에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아! 저 마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며안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몰입해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놀란 것은 내가 밥벌이로 했던 일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저자의 경험은 한국 의료와 복지의 문제를 교과서처럼 정확하게 짚어냈다. 묘사의 해상도가 너무 높아 아프기도 했지만,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김선민, 전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직업환경의학과장,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자기 자신마저 이토록 쉽게 비웃어버리는 지금 이 세상을 향해 "우파 아버지를 부탁해"라고 속삭이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러나 이 책은 이해타산에 따른 사회적 피로와 혐오주의가 만연한 시대의 조롱 속에서 이제는의미가 바랜 ‘연민‘이라는 오래된 힘을 다그치지 않고, 호소하지 않고, 제스스로 부드럽게 행사한다. 고통과 수치로 가득한 삶을 울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단 한 사람이 어느새 우리를 이해시킨다. 결국 사람 곁에는 쿨하게 비웃는 사람이 아니라 뜨겁게 펑펑 우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작가

아픈 아버지를 돌보면서 겪는 가족들의 따뜻한 이야기. 에세이가 빠지기 쉬운가식이나 위선 없이 작가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글을 만나 반갑다. 평범하면서도 조금은 이상한, 우리네 가족들의 일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하는힘이 있다.
-홍용호, 변호사, <폭로> 감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인)으로서 주로 대상화된다. ‘아들‘과 ‘남아‘를 제외하고 ‘학도‘, ‘건아‘, ‘젊은이‘, ‘청년‘ 등으로 비유되는 것이다.

특히 여성은 여러 종류의 ‘향기로운 꽃‘에 비유되는데, 무궁화, 백합, 수선화, 진달래, 꽃봉오리 등이다.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 ‘예쁘다‘는 감정을 떠올리는 것들이다. 

반면 남성은 그에 대응하는 ‘우뚝솟은) 기둥‘으로 비유된다. 실제로 기둥이라는 단어 앞에는 대개 ‘솟다‘라는 형용사가 수식되어 있다. 이것은 건강한 남성의 상징처럼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 이 역시 학생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점에서 문제적이다.

 다만 꽃이라든가 기둥이라든가 하는 단어들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학생도 남학생도 상대편이 자신들 같은 언어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만약 그것이남고나 여고 모두에서 비슷한 빈도로 등장하거나 섬세한 맥락에서 사

름 아닌 선배 동문들, 같은 공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평범한 개인들이라는 데서는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을‘을 막아서는 것은 갑이라기보다는, ‘갑‘을 위한 대리전쟁을 수행하는 을들이다.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언어를 전복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제도와문화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이러한 감정은 나뿐 아니라 그 당시의 학생들에게 더욱 절실히찾아왔겠다.


팔순이 넘은 초기 졸업생들은 착한 딸로서, 어진 어머니로서, 참된일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태도를 형성해 왔을 것이다. 모교의 이전 소식에 찾아와 교정을 거닐며 눈물지을 만큼, 그들은 공간과 자신을, 특히 그 공간의 언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을 쉽게 ‘전통‘이라고 부르게 된다. 외부의 눈으로보았을 때는 우선 무엇이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지만, 내부자가되고 나면, 그 언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되기에, 개인은 그 수호자가 되기 쉽다. 그 훈을 만든 사람은 이미 그공간에 없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개인은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간에 물음표를 보내지 않으면 누구나 보수화될 수밖에 없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그런 나약한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를 지켜내고 싶어 하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거부하고 싶어 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는 오히려 더욱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언어를 수호하려는 개인은 보수화된 개인이다.

한 공간의 훈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이겠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이들이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주여고의 동문들 모두가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를 주장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학교 내부에서는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일이라고 한다. 유의미한 결과는 없었지만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여기에 참여한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들은 내부의 균열을 목도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특별한 개인들이다. 물음표가 새겨진 몸은 쉽게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의 균열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러한 몸이 후배들에게도 전해진다. 
그들은 이제 졸업을 하고, 전근을 가고, 모두가 우리 사회 어디에서 한 개인으로 존재하겠지만 어디에서든 그 공간의 제도와 문화를, 무엇보다도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변화만큼 원주여고의 변화 역시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나로서는 평생 대기업이 어느정도 규모의 기업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공개되어 있는 자료이기는 하지만, 그 집단을 자산총액의 순위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 현대자동차, 에스케이, 엘지, 롯데, 포스코, 지에스, 한화, 농협, 현대중공업, 신세계, 케이티, 두산, 한진, 씨제이, 부영, 엘에스, 대림, 에쓰-오일, 미래에셋, 현대백화점, 영풍, 대우조선해양, 한국투자금융, 금호아시아나, 효성, 오씨아이, 케이티앤지, 케이씨씨, 교보생명보험, 코오롱,
하림, 대우건설, 중흥건설, 한국타이어, 태광, SM, 셀트리온, 카카오, 세아, 한라, 이랜드, DB, 호반건설, 동원, 현대산업개발, 태영, 아모레퍼시픽, 네이버, 동국제강, 메리츠금융, 넥슨, 삼천리, 한국지엠, 금호석유화학, 한진중공업, 넷마블, 하이트진로, 유진, 한솔.

15삼성이 재계 서열 1위에 있고, 그 뒤로 우리가 이름을 익히 아는 대

한 방향으로 가자》 (1993)에서는 한 조직의 용어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두었다.

한 조직의 용어를 통일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사고와 행동을 하나로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조직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가치관을 언어를 통해 서로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업의 용어 통일은 기업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기능을 합니다. 

회장께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용어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첫째, 그룹의 용어를 명확히 통일하고, 둘째, 삼성 특유의 용어를 만들고, 셋째, 용어의 질을 한 차원 높이자는 특유의 용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책자는 삼성이 21세기 세계 초일류기업을 실현하기 위해 전 삼성인의 사고와 행동을 한 방향으로 통일하는 데 필수적인 삼성용어 해설집입니다. (......) 삼성인이면 누구나 이 용어 하나하나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경영의 참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 빨라지고 단결력을 높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용어집이 우리 모두를 한마음으로 만들고 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 징검다리임을 마음에새겨서 삼성인의 용어만 연결해도 대화가 될 수 있는 수준까지 일상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객이라는 단어는 기업으로부터 선택되어 완전히 우리 곁에자리 잡았다. 고객은 이미 소비자의 높임말이지만 현장에서는 ‘님‘을붙여 고객님으로 부르는 문법 파괴를 이루어냈다. 나는 ‘고객‘이라는단어의 어원이 어떠하든, 그리고 그 문법이 맞는 것이든 틀린 것이든그 수용자가 자신을 높여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굳이 사용되지 않았을 단어였다고 믿는다. 
소비자를 현혹시켜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자 하는 회사의 욕망이 소비자를 왕으로 격상시키는 왜곡된 위계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객/고객님‘이라는 단어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잘못된 훈이다.

단어 자체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거기에 시대의 욕망이 덧씌워지고 나편한 시대를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게 되고 만다.
고객이라는 훈을 전면에 내세운 회사는, 그것을 수행한 일하는 개인들에게 새로운 훈을 부여한다. 다음의 그림은 각 회사에서 제시한
‘인재상‘을 나타낸 것이다. 각 단어의 빈도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게표시되었다.

회사가 ‘고객만족‘이라는 훈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회사원)들에게보내는 훈은 우선 ‘도전‘이고, 그 외에도 ‘일정‘, ‘창조(창의)‘, ‘적극‘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그리고 이처럼 아팠음을 모두 기억하고 바꿔나갈 수 있기를

명문이 아닌 지방의 학교 위기가 아닌 때 없던 인문학 전공,
학생도 교수도 아닌 시간강사라는 캠퍼스의 경계-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청춘이 제대로 살아온 삶인지 고민하며 신자유주의가 바꾼 대학 풍경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내밀히 보여준다
‘각자도생‘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지방시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지만, 이는 내가 9년간 경험한 대학에서의 생활 그리고9년간 겪고 있는 시간강사로서의 고민을 옮겨놓은 것이기도 하다. ‘돈 안되는 공부하겠다.
는 "돈 없는 대학원생들의 삶은 비루하다. 
어찌저찌 강의를 하게 되더라도 미래가 있는 고난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이 흥분할 만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이 책은 흥분하지 않은 어조로 차근차근 세상에 드러낸다. 
게다가 저자는 이 암울한 공간에서도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한다.
이 자체가 인문학의 힘‘ 아니겠는가.
오찬호(사회학 연구자 (진격의대학교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천의 말

김민섭 작가의 글과 작업은 늘 흥미롭다. 그가 작가로서, 기획자로서 내놓은 결과물들을 볼 때면 영어 단어가 2개 떠오르는데 하나는
‘스트리트와이즈(streetwise. 세상 물정에 밝은)‘, 또 하나는 그냥 ‘와이즈‘(wise)다. 이번에 알았는데 영어 단어 ‘wise‘에는 ‘진로를 제시하다,
방향을 바꾸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의 사정에 밝고, 그곳을 지배하는 배후의 힘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며, 가끔은 그 힘을 이용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야무지게 현장에 바탕을 둔 사유가, 배려심과 균형 감각을 갖춘 통찰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참 현명한 사람이구나, 하는《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나‘를, 《대리사회에서 ‘사회‘를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시대‘를 다루겠다는 더 큰 야심을 품었다. 찾아간현장은 학교와 회사와 아파트 단지. 시로 겹치지 않을 것 같은 세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훈‘이다. 김민섭 작가는 우리 시대 ‘‘들의기괴함을 폭로하면서 우리 자신의 ‘‘을 새로 쓰자고 제안한다.
그가 다음으로 눈길 두는 곳은 어디일지, 벌써 궁금해진다.
장강명_《당선, 합격, 게급》, 《한국이 싫어서> 저자

사회 이후의 단어로 ‘국가‘, ‘세계‘, ‘인류‘,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책은 <아무튼, 망원동》이라는나의 고향인 망원동/성산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소소한 에세이집이되었다. (아무튼‘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은 ‘아무튼 문고‘라는 기획서로 제착되었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글을 쓰는 동안 ‘이 동네는 과연 괜찮은걸까‘ 하는 물음표가 생겼고, 그에 답하고 싶어졌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그 작은 동네에서, 사람은 건물이 변하는속도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밀려나고 사라져갔다. 잠시 쉬어 간다는기분이 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대리사회>보다 더 나와 내 주변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그것은 맞는 명제이면서도 동시에 모두에게 성립되지는 않는다. 

고백에 이른 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막 떼어놓은 것이다. 새로운 물음표에 답하며 그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보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힘은 무척이나 세서, 그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착실하게 그 과정을 밟아간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어느 순간 멈춰버리면 그 힘은 거짓말처럼 소멸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백 이후의 서사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신들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믿었던 대학의 젊은 연구자들의 실망이 컸다. 선언만 반복하는 개인은 그 어떤 변화를 추동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백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선언으로 나아가는 길 역시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단계로 가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리사회> 이후의 나는 한동안 동어반복을 하며 스스로를 소진시켜 갔던것 같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응원하며 지켜보던 이들도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의 기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을 고백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선언에 이르고, 물음표를 확장시켜 나간 극히 일부는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 개인은 고백의 힘을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수 있다. 

나는 《훈의 시대>라는 이 책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훈‘이라는 개념은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요약하자면
‘규정된 언어‘다. 변화를 원하는 한 개인을 가로막는 것은 그를 공고

하게 둘러싼 언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노래해 온 익숙한 훈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수사들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내 왔다.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합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규정된 그 언어들은 한 시대와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더라도 그 잔재는 여전히 동시하면서 위력을 가진다. 그래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다는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언어가 종말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물음표를 보낸다.
이 책에서는 내가 거리에서 삶에서 마주치고 수집한 훈을 제시할것이다. 여전히 우리와 동시하고 있는 그 언어가 어떻게 시내의 욕망안에 개인은 가이었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들을 인식하고 폐기하고자 할 때 비로소 낡은 시내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이 당신에게 가서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쓴다. ‘나‘와 ‘사회‘를 거치며커진 음표는 이제 평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당신은 무어라고 응답할지 궁금하다.
《대리사회>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다소 민망한 선언을 했다.

"나는 계속 거리의 언어를 몸에 새겨나가려고 한다. <대리사회는내가 써나갈 글의 서론과도 같다. 제도권과 거리의 경계에서, 언제까지나 경계인으로만 존재하며 그 균열을 탐색하고 싶다."

<훈의 시대는 부족하게나마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쓴 것이다. 제대로 된 제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라는 한 개인이사회에 내어놓는 첫 본문으로는 알맞은 온도가 될 것이다.

내가 어렵게 제안이라는 영역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다시 한 번 거리에서였다. 단순히 대리운전을 하며 걷는 노동의 시공간만을 말하는것은 아니다. 이제는 몇 년 전처럼 생업으로 삼아 매일같이 대리운전일을 나가지도 않는다.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이전에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던 인상의 언어들이 조금은 다른 눈높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내에게 듣게 된 출신 여고의 교훈이 대리운전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회사의 사훈이, 친구와 불광천을걷다가 마주한 빌라의 이름이, 그 일상의 평범한 훈들이 나의 물음표를 계속 크게 만들어주었다.

(대리사회가 우리 사회의 몸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은 그 언어의기록이다. 당신에게 《훈의 시대>를 한 시대를 포위하고 있는 언어의기록을 보낸다.

고3 선배들을 응원하겠다고 힘차게 교가를 부르기 시작한 1학년들은 처음 기세와는 달리 후렴에서 모두 목이 막혀버렸다. 지금도 수능 때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는 학생회와 동아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모두 응원을 나가서 교가를 불렀다. 지성의 시험장인 수능 고사장에서 의리와 친애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셈이니, 교훈을 충실히 이행한 학생들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고 보면 교가만큼 자주 부른 노래도 아마 없을 것이다. 월요일마다 열린 ‘애국조회‘ 때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가를 불렀고,
각종 운동회나 행사 때도 그랬고, 음악 시간에 그것으로 수행평가를보기도 했다. 

하나의 노래를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반복해서 부르는경우는 아마도 ‘애국가‘와 ‘교가‘가 유일할 것이다. 

어떤 유행가도 이처럼 타율로서 강권되지는 않는다. 마치 후크송처럼 반복되는 단어들은 그에 노출된 이들에게 의미를 사유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대로 각인되어 버린다. 훈은 이처럼 기계적이고 폭력적으로 개인에게 가서닿는다.


나는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훈 세 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고등학교든 남자고등학교든 굳이 그 교훈에 ‘○○한 딸/아들‘ 하고 성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권장될만한 것이지만 여성을 수식하면 그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든든한‘이라는 형용사가 남성과 어울려 ‘든든한 아들‘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한 단어의 훼손이나 오염을 더욱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딸은 착해요", "우리 아들은 든든하죠"와 같은 익숙한 결합은 단순히 국어사전에 명시된 의미를 넘어서, 훈을 건네는 주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고 가문(가정)이라는소집단의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착한 딸들에게 많은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착함을 강요받은 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고 돌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들은 참된 일꾼이 되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형제의 학비를 보탰다. 
1970년대의 어린 여공들은, 자라서 어진 어머니로서 착한 딸과 든든한 아들을 키워내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별들의 고향>(1973)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3)의 서사이고, 최근에는 <우리들의 누이>(2018)라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여성들을 다루었다. 
그런 젊은 날의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

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지고서도 여전청 염치없이 그 훈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전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어머니‘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으면 한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몇몇 공립여자고등학교의 교훈과 교가를 직접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내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안해졌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이 학교에 모두 모여있었다.

나는 한국의 공립여자고등학교와 공립남자고등학교의 훈을 모두찾아보기로 했다. 어떠한 훈들이 한국 여성/남성들의 젊은 날을 규정해 왔을까. 각 학교의 설립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그 훈들은 어떠한차이를 보일까. 우리는 얼마나 낡은 언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그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공적 욕망은 (과거에) 무엇이었고 또 (현재에도 여전히)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고의 교훈과 교가는 남성이면서 여성 자녀가 없는 나로서는평생 볼 일이 없었을 단어들이다.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삶과 존재를 어떠한 언어로 규정해 왔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를 닮은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별이 다른 이들을 수백 명씩 한 공간에 3년 동안 수용해 두고 각각에게 무엇을 권하는지, 그 반대편에 있는 절반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것은 상대편의 훈을 살펴보는앞으로 없을 기회도 될 것이다.

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군 복무가 그러한 당위성을 부여하느나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욕망이 학교에서부터 이처럼 구체화되고 있는 데는 문제가 있다.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여자‘라는 명칭을 굳이 부여하는 지금의 제도는 분명히 그들을 그 공간의 주변부로 내몰게 된다. 

사실 담백하고명료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곧 권력이다. 

주변부로 밀려날수록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수식을 덧붙여야만 한다.
ㅇㅇㅇㅇ여고에 각각 입학하면서부터 남학생은 중심부로, 여학생은 주변부로,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음을 알게 된다.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학교에서부터 여성은 따로 구획되고 이것은 한 존재를 외롭고 위축된 몸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유의 크기도 그에 따라 줄어들어 버리고 만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없게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그 수혜자가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를 둘러싼 언어들은 마치 크레인처럼 그들을잡아 들고 특정한 구역에 내려놓는다. 자존감의 과잉도 결여도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양측 모두가 언어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앞으로 설립되는 학교들에는 ‘남/녀‘라는 단어가 그 명칭에 포함되

고와 남고 모두 ‘성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으로는 ‘슬기‘와 ‘협동‘으로 서로 갈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두 개의 결과가보인다. 
1) 서로에게는 전혀 없는 훈들이 높은 빈도로 권장된다는 것이고, 
2) 훈을 받아들일 주체들을 규정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이다.

1) 우선 높은 빈도로 권장된 훈을 살펴보면 여고는 ‘순결‘, ‘정숙‘,
‘예절‘, ‘배려‘, ‘사랑‘, ‘겸손‘ 등이고,
반면 남고는 ‘단결‘, ‘용기‘, ‘개척‘,
‘책임‘, ‘명예‘, ‘열정‘ 등이다. 

모두 상대편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여고의 것이 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라면, 
남고의 것은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여성의 정적인 몸과 남성의 역동적인 몸은 학창 시절부터 이러한 훈으로 형성되어 간다. 

‘정숙‘ 등 단어만으로 나타내는 방식이 더 많지만, ‘성실한 사람이 되자‘라든가 ‘정숙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사람이나 여성으로서그 대상을 호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고와 남고의 교훈이 각각의 구성원을 호칭하고 있는 방식 역시 현저히 다르다.

여고 
사람(14회), 여성(10회), 어머니(3회), 겨레의 밭(3회), 딸(2회)

남고 사람(8회), 인간(2회)

여고에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여성, 어머니, 딸 등 몇 가지 단어가더 나타나는 반면 
남고에서는 사람과 인간뿐이다.‘ 

놀랍게도, 남고에서는 단 한 번도 남성이라든가 아버지라든가 아들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요구받는 것은 단 하나 ㅇㅇ한 사람/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들은 ‘○○한 어머니/여성‘
이 되기를 계속 요구받는다. 

남성이 공부하는 한 개인으로서, 말하자면 사람(인간)으로서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반면, 여성은 온전한개인이 아닌 어머니, 여성, 딸 등 성별에 따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학교에서부터 공부하는 한 개인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이상향을 성취하기를 부단히 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