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말

김민섭 작가의 글과 작업은 늘 흥미롭다. 그가 작가로서, 기획자로서 내놓은 결과물들을 볼 때면 영어 단어가 2개 떠오르는데 하나는
‘스트리트와이즈(streetwise. 세상 물정에 밝은)‘, 또 하나는 그냥 ‘와이즈‘(wise)다. 이번에 알았는데 영어 단어 ‘wise‘에는 ‘진로를 제시하다,
방향을 바꾸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의 사정에 밝고, 그곳을 지배하는 배후의 힘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며, 가끔은 그 힘을 이용해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야무지게 현장에 바탕을 둔 사유가, 배려심과 균형 감각을 갖춘 통찰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참 현명한 사람이구나, 하는《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나‘를, 《대리사회에서 ‘사회‘를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시대‘를 다루겠다는 더 큰 야심을 품었다. 찾아간현장은 학교와 회사와 아파트 단지. 시로 겹치지 않을 것 같은 세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훈‘이다. 김민섭 작가는 우리 시대 ‘‘들의기괴함을 폭로하면서 우리 자신의 ‘‘을 새로 쓰자고 제안한다.
그가 다음으로 눈길 두는 곳은 어디일지, 벌써 궁금해진다.
장강명_《당선, 합격, 게급》, 《한국이 싫어서> 저자

사회 이후의 단어로 ‘국가‘, ‘세계‘, ‘인류‘,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책은 <아무튼, 망원동》이라는나의 고향인 망원동/성산동이라는 동네에 대한 소소한 에세이집이되었다. (아무튼‘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은 ‘아무튼 문고‘라는 기획서로 제착되었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글을 쓰는 동안 ‘이 동네는 과연 괜찮은걸까‘ 하는 물음표가 생겼고, 그에 답하고 싶어졌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그 작은 동네에서, 사람은 건물이 변하는속도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밀려나고 사라져갔다. 잠시 쉬어 간다는기분이 되기도 했지만 어쩌면 《대리사회>보다 더 나와 내 주변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그것은 맞는 명제이면서도 동시에 모두에게 성립되지는 않는다. 

고백에 이른 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돌이킬 수 없는 발걸음을 막 떼어놓은 것이다. 새로운 물음표에 답하며 그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보폭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힘은 무척이나 세서, 그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착실하게 그 과정을 밟아간다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어느 순간 멈춰버리면 그 힘은 거짓말처럼 소멸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요약하면, 고백 이후의 서사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신들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 것으로 믿었던 대학의 젊은 연구자들의 실망이 컸다. 선언만 반복하는 개인은 그 어떤 변화를 추동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고백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선언으로 나아가는 길 역시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이후의 단계로 가는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리사회> 이후의 나는 한동안 동어반복을 하며 스스로를 소진시켜 갔던것 같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응원하며 지켜보던 이들도 지쳐버렸는지 모른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몇 년의 기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을 고백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선언에 이르고, 물음표를 확장시켜 나간 극히 일부는 필연적으로 ‘제안‘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한 개인은 고백의 힘을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할수 있다. 

나는 《훈의 시대>라는 이 책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훈‘이라는 개념은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요약하자면
‘규정된 언어‘다. 변화를 원하는 한 개인을 가로막는 것은 그를 공고

하게 둘러싼 언어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노래해 온 익숙한 훈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수사들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내 왔다.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합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규정된 그 언어들은 한 시대와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더라도 그 잔재는 여전히 동시하면서 위력을 가진다. 그래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다는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언어가 종말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물음표를 보낸다.
이 책에서는 내가 거리에서 삶에서 마주치고 수집한 훈을 제시할것이다. 여전히 우리와 동시하고 있는 그 언어가 어떻게 시내의 욕망안에 개인은 가이었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들을 인식하고 폐기하고자 할 때 비로소 낡은 시내를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이 당신에게 가서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쓴다. ‘나‘와 ‘사회‘를 거치며커진 음표는 이제 평범한 개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당신은 무어라고 응답할지 궁금하다.
《대리사회>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다소 민망한 선언을 했다.

"나는 계속 거리의 언어를 몸에 새겨나가려고 한다. <대리사회는내가 써나갈 글의 서론과도 같다. 제도권과 거리의 경계에서, 언제까지나 경계인으로만 존재하며 그 균열을 탐색하고 싶다."

<훈의 시대는 부족하게나마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쓴 것이다. 제대로 된 제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라는 한 개인이사회에 내어놓는 첫 본문으로는 알맞은 온도가 될 것이다.

내가 어렵게 제안이라는 영역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다시 한 번 거리에서였다. 단순히 대리운전을 하며 걷는 노동의 시공간만을 말하는것은 아니다. 이제는 몇 년 전처럼 생업으로 삼아 매일같이 대리운전일을 나가지도 않는다.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이전에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던 인상의 언어들이 조금은 다른 눈높이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내에게 듣게 된 출신 여고의 교훈이 대리운전을 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회사의 사훈이, 친구와 불광천을걷다가 마주한 빌라의 이름이, 그 일상의 평범한 훈들이 나의 물음표를 계속 크게 만들어주었다.

(대리사회가 우리 사회의 몸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은 그 언어의기록이다. 당신에게 《훈의 시대>를 한 시대를 포위하고 있는 언어의기록을 보낸다.

고3 선배들을 응원하겠다고 힘차게 교가를 부르기 시작한 1학년들은 처음 기세와는 달리 후렴에서 모두 목이 막혀버렸다. 지금도 수능 때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는 학생회와 동아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모두 응원을 나가서 교가를 불렀다. 지성의 시험장인 수능 고사장에서 의리와 친애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셈이니, 교훈을 충실히 이행한 학생들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고 보면 교가만큼 자주 부른 노래도 아마 없을 것이다. 월요일마다 열린 ‘애국조회‘ 때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가를 불렀고,
각종 운동회나 행사 때도 그랬고, 음악 시간에 그것으로 수행평가를보기도 했다. 

하나의 노래를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반복해서 부르는경우는 아마도 ‘애국가‘와 ‘교가‘가 유일할 것이다. 

어떤 유행가도 이처럼 타율로서 강권되지는 않는다. 마치 후크송처럼 반복되는 단어들은 그에 노출된 이들에게 의미를 사유할 여유를 주지 않고 그대로 각인되어 버린다. 훈은 이처럼 기계적이고 폭력적으로 개인에게 가서닿는다.


나는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훈 세 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고등학교든 남자고등학교든 굳이 그 교훈에 ‘○○한 딸/아들‘ 하고 성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권장될만한 것이지만 여성을 수식하면 그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든든한‘이라는 형용사가 남성과 어울려 ‘든든한 아들‘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면 한 단어의 훼손이나 오염을 더욱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딸은 착해요", "우리 아들은 든든하죠"와 같은 익숙한 결합은 단순히 국어사전에 명시된 의미를 넘어서, 훈을 건네는 주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고 가문(가정)이라는소집단의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착한 딸들에게 많은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착함을 강요받은 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고 돌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들은 참된 일꾼이 되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형제의 학비를 보탰다. 
1970년대의 어린 여공들은, 자라서 어진 어머니로서 착한 딸과 든든한 아들을 키워내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별들의 고향>(1973)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3)의 서사이고, 최근에는 <우리들의 누이>(2018)라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여성들을 다루었다. 
그런 젊은 날의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

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지고서도 여전청 염치없이 그 훈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전한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어머니‘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으면 한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몇몇 공립여자고등학교의 교훈과 교가를 직접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내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안해졌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이 학교에 모두 모여있었다.

나는 한국의 공립여자고등학교와 공립남자고등학교의 훈을 모두찾아보기로 했다. 어떠한 훈들이 한국 여성/남성들의 젊은 날을 규정해 왔을까. 각 학교의 설립 시기와 지역 등에 따라 그 훈들은 어떠한차이를 보일까. 우리는 얼마나 낡은 언어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그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공적 욕망은 (과거에) 무엇이었고 또 (현재에도 여전히)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고의 교훈과 교가는 남성이면서 여성 자녀가 없는 나로서는평생 볼 일이 없었을 단어들이다.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삶과 존재를 어떠한 언어로 규정해 왔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나를 닮은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별이 다른 이들을 수백 명씩 한 공간에 3년 동안 수용해 두고 각각에게 무엇을 권하는지, 그 반대편에 있는 절반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것은 상대편의 훈을 살펴보는앞으로 없을 기회도 될 것이다.

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군 복무가 그러한 당위성을 부여하느나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욕망이 학교에서부터 이처럼 구체화되고 있는 데는 문제가 있다.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여자‘라는 명칭을 굳이 부여하는 지금의 제도는 분명히 그들을 그 공간의 주변부로 내몰게 된다. 

사실 담백하고명료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곧 권력이다. 

주변부로 밀려날수록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수식을 덧붙여야만 한다.
ㅇㅇㅇㅇ여고에 각각 입학하면서부터 남학생은 중심부로, 여학생은 주변부로, 자신의 자리가 정해졌음을 알게 된다.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학교에서부터 여성은 따로 구획되고 이것은 한 존재를 외롭고 위축된 몸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유의 크기도 그에 따라 줄어들어 버리고 만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없게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그 수혜자가 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를 둘러싼 언어들은 마치 크레인처럼 그들을잡아 들고 특정한 구역에 내려놓는다. 자존감의 과잉도 결여도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양측 모두가 언어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앞으로 설립되는 학교들에는 ‘남/녀‘라는 단어가 그 명칭에 포함되

고와 남고 모두 ‘성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으로는 ‘슬기‘와 ‘협동‘으로 서로 갈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두 개의 결과가보인다. 
1) 서로에게는 전혀 없는 훈들이 높은 빈도로 권장된다는 것이고, 
2) 훈을 받아들일 주체들을 규정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것이다.

1) 우선 높은 빈도로 권장된 훈을 살펴보면 여고는 ‘순결‘, ‘정숙‘,
‘예절‘, ‘배려‘, ‘사랑‘, ‘겸손‘ 등이고,
반면 남고는 ‘단결‘, ‘용기‘, ‘개척‘,
‘책임‘, ‘명예‘, ‘열정‘ 등이다. 

모두 상대편에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여고의 것이 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라면, 
남고의 것은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다. 
여성의 정적인 몸과 남성의 역동적인 몸은 학창 시절부터 이러한 훈으로 형성되어 간다. 

‘정숙‘ 등 단어만으로 나타내는 방식이 더 많지만, ‘성실한 사람이 되자‘라든가 ‘정숙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사람이나 여성으로서그 대상을 호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고와 남고의 교훈이 각각의 구성원을 호칭하고 있는 방식 역시 현저히 다르다.

여고 
사람(14회), 여성(10회), 어머니(3회), 겨레의 밭(3회), 딸(2회)

남고 사람(8회), 인간(2회)

여고에서는 사람을 중심으로 여성, 어머니, 딸 등 몇 가지 단어가더 나타나는 반면 
남고에서는 사람과 인간뿐이다.‘ 

놀랍게도, 남고에서는 단 한 번도 남성이라든가 아버지라든가 아들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요구받는 것은 단 하나 ㅇㅇ한 사람/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들은 ‘○○한 어머니/여성‘
이 되기를 계속 요구받는다. 

남성이 공부하는 한 개인으로서, 말하자면 사람(인간)으로서 학교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반면, 여성은 온전한개인이 아닌 어머니, 여성, 딸 등 성별에 따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학교에서부터 공부하는 한 개인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이상향을 성취하기를 부단히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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