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문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9
앙드레 지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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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작품은 읽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가 없을 만큼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자기 희생의 이야기는 나에게 고뇌와 동시에 자아도취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전편에 넘쳐 흐르는 서정적 아름다움에 도취해 알리샤의 슬픈 마음씨에 눈물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듯 너무나 순수한 사랑의 추구! 그러나 사랑을 논리적으로 반성할 때 현대에서 사실상 사랑이 성립되기 어려움을 알리샤의 사고를 통해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결국 그넌 이작품에서 비 인간적인 자신 희생의 허무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드는 알리샤가 일생을 바쳐 좁은 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은 결국 신에게 조롱당한 것임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제롬은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알리샤의 미덕을 정상으로 끌어올려 둘이서 좁은문으로 들어갈 수 있어리라고 생각했으나 마침내는 그것이 실현 불가능의 이상에 불과했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철저한 금욕주의로 다져진 알리샤의 마음. 그런 알리샤의 마음은 제롬에게는 들어가기 힘든 좁은문의 양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알리샤의 철저한 금욕주의는 천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좁디좁고 협착한 그 좁은문으로 통하는 단 하나의 열쇠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종교적인 행복과 천상의 행복만을 갈구하는 알리샤의 태도는 과연 옳다고만 볼수 있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앞으로 판단해야 할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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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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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부분 중에서 다로가라는 페르시아인이 한 말이다. 그말은 그의 시체를 찾을때 그의 잔혹하고 흉측한 외모로 찾았다는 것이 아닌 그의 반지로써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서 난 그 어떤 감동을 느꼈다.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나갈수 있는 그런 장면 이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난 무엇인가 발견하였다. 정말 이책에서 다로가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죽으면 다 똑같은 모습일거라는 것. 그것이 나의 가슴을 울리는데 결정적이였다고 생각한다.

흉측한 외모로써 가장 사랑받아야될 부모에게 버림 당하고 살아있는 여인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의 체온을 느낀다는것을 그 무엇보다 감동있게 받아들인 그였다. 처음 그의 잔혹함과 생김새를 상상하며 나름대로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그는 불쌍한 인간이였다. 남들이 다 느끼는 감정조차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난 불쌍하다고느끼기 보단.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였기에 마지막에 행복하게 죽을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느꼈던 마지막 행복 크리스틴의 사랑에 감동받고. 또한 그가 삶에 충실한것은 비밀스러운 궁전과 이 오페라 극장을 비밀스럽게 건설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외모가 틀리다고 해서 그는 다른 사람처럼 살지 못하였지만 그는 그 누구도 할수 없는 일들을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이뤄냈다. 그것이 그가 태어난 이유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람들은 각자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단지 일관된 미모와 지성 그리고 지식을 똑같이 가진다면 세상은 정말 재미없는 곳이 될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때 자신의 임무를 지니고 세상에 나온다. 그것이 어떤것인지는 자신이 스스로 발견하는것이다.

그 어떤누구는 이름난 불행한 예술가를 사는가 하면 그 어떤이는 평생 환경 미화원으로 자신의 삶을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이 둘중 그 어떤것이 행복하다고 말할수는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나름대로의행복과 가치관이 서로 존재 하기 때문이다.
남의 가치관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이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에릭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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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밥 먹구 가 - 오한숙희의 자연주의 여성학
오한숙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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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새끼 거둬먹이는 루기의 모습을 보고 그는 여성성이 왜 평화와 더 가까운가를 '그냥' 깨닫는다. 여성들이 평화를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무조건 느껴지는 '견딜 수 없음’에 따른 것이다. 여성성을 '견딜 수 없음'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7년 시골살이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당위로서가 아니라 '견딜 수 없어서 평화를 사랑하기로 했다' 는 경지까지 갈 수 있었다면, 그에게 불행은 대안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책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삶에서 어떤 여울이 다가오더라도, 설사 그것이 어떤 불행의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그건 결국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전환점일 뿐이라는 긍정적인 인생관을 보여주는 데 있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실제 책에서는 불행과 삶의 연관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책편집은 저자의 전작처럼 '여성성과 현장'을 기계적으로 엮은 생태학적 여성학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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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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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앨범을 뒤적이다가 빛바랜 흑백 사진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아현동 골목길에서 소꼽친구 여자애와 찍은 사진이었다. 여자애는 원피스에 양장 구두 차림이었고, 난 흑백의 백색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아마 5살(1972년)쯤 되었으리.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를 읽다가 낯익은 동네가 나왔다. 아현동. '봉순이 언니'에 나오는 짱아처럼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다.

책을 접하고 단숨이 읽어내려갔다. 내가 아는 공지영이라는 작가는 '고등어'라는 작품을 접한 것 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간간히 신문을 통해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 빼고는 나는 작가 공지영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고등어'를 읽으며 끝자락에서 뭔가 허전함을 느꼈는데, '봉순이 언니' 또한 뭔지 모를 허전함이 다가왔다. TV 매체에서 하도 떠들어대서인지 동료 직원이 읽고 건네준 '봉순이 언니'는 내게 그저 신변잡기 같았다.

흑백 사진 속에 담긴 앨범을 보며 나누는 세태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 속의 발문에서 박혜연 평론가는 '이 소설은 60년대 세태를 다룬 소설만은 아니다. 공지영은 그 시대에 대한 서사적 접근과 아울러 서정적 자아를 통한 내면화도 시도했다'고 했는데 그 서사적 접근이나 서정적 자아라는 것은 작중 화자인 5~7살박이 짱아의 관점 때문인지 강하게 다가서지는 않는다. 그저 간간히 비쳐지는 서구식으로 살고자 했던 아버지와 그런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해 가면서 동정어린 눈으로 봉순이를 살피는 어머니의 이중적 태도 등이 서사적 접근 모습을 보일 뿐.

소설의 끝자락에서 작가는 반전을 꾀하며 독자에게 뭔가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전하려 한 것 같은데, 씁쓸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박완서의 소설이 떠올랐다. 제목을 기억할 수 없지만 70줄이 넘은 작중 화자가 자신의 집안 살림을 거들던 이종 사촌 여동생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남쪽 외딴 섬의 노인에게 재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서 난 주체로서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섬으로 재가한 그 이종 사촌 여동생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가 쉰 살이 되어 개장수와 함께 도망쳤다는 내용에서 같은 희망을 찾기에는 봉순이 언니의 삶은 주체적이라기 보다는 도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봉순이 언니'가 나를 껄끄럽게 한 것은 바로 작중 화자였는지 모른다. 남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짱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봉순이 언니'의 삶은 어머니가 바라보는 관점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길들여지듯이 살면서 바둥바둥 자신의 삶을 찾아 가지만 결국 '점점 더 가난뱅이가 되어갔다'는 작중 화자의 발언에서 나는 성조기를 떠올렸다. 너무 심한 비약일까. 책 장을 덮으며 좀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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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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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별로 안읽는 편이다. 사람들이 하도 20살 전에는 읽어야할 책이 상실의 시대라고 해서 한번 일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선정적이다 못해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은 고등학생이지만 20대가 되서 다시 읽는다고 해도 이책을 절대로 공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읽을 일도 없겠지만) 도서관에서 상실의 시대가 인기가 많아서 서점에서 산 돈이 너무 아깝게 생각이 되고 이책이 맘에 안든건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 무관심하면서도 자기멋에 잘난체하며 사는 그런 태도가 정말 맘에 안들었다. 사실 이책에대해서는 더이상 논의 하기도 싫지만 내가 평가했던 수준보다 사회에서는 이 책을 꽤 높이평가하는 부분에대해 나처럼 이책을 읽고 왠지 강간을당한듯한 찜찜한 기분이 들 것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않기위해 절대 보지말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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