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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ㅣ 영조 시대의 조선 11
김백철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4년 6월
평점 :
박문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암행어사입니다. 마을 곳곳을 떠돌며 탐관오리를 적발해내고 그 사실을 임금에게 고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박문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왔습니다. 헌데, 이 책을 보니 박문수가 실제로는 “암행어사가 주요 직책이 아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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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가 아닌 인간 박문수를 만나다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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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보내주는 책의 서평을 쓰기 시작한지 어언 삼 개월째입니다. 그간 저는 꽤 많은 책을 보았고, 쇼킹! 한 내용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정말이지 과거는 캐면 캘수록 모르는 게 튀어나오는구나 (;;;) 감탄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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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간단히 목차를 통해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서설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어사 박문수와 실제 박문수가 어떻게 다른가”를 간단히 설명해 줍니다. 다름으로 이어지는 “환국에서 탕평의 시대로”는 영정조시대에 들어서서 그 전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되던 환국에 이어 바야흐로 탕평 정책을 펼치고자 한 이야기 속의 박문수를 소개하고요, 다음 “경세관료의 길”에서는 요즘으로 따지자면 태스크포스, 경제위기 전문가로써의 박문수를 소개합니다. 3부 “조야의 파고를 넘어”에서는 박문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봅니다. 그가 어떤 성격이었는가, 또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리하여 어찌 죽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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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특히 3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랄까, 지금까지 어사 박문수라던가 관직에 오른 박문수가 아닌 인간 박문수를 보다 보니 앞쪽에 나온 기나긴 설명이 단번에 이해가 됐달까요? 박문수는 무척이나 바른 말을 잘 했던 모양입니다. 무려 영조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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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아는 자는 경이 나라를 위한다고 하고, 경에 대해 모르는 자는 경이 미쳤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경의 광당한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미쳤다고 사람들이 말하나 나는 실로 취사선택하여 듣겠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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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했으면 대체 미쳤다는 말을 다 들었을까... ...! 헌데 그 일화를 보면 실제로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일들이 있습니다. 무려 중국의 화폐를 쓰자고 했다던가, 식기로 사기 그릇만 쓰자고 건의한다던가, 임금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존안을 배알 했다던가 (;;;) 경악할 만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이러한 박문수를 아낍니다. 왜냐하면 박문수는 참으로 “탁월한” 인재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의 우리나라에 꼭 필요할 법한 그런 인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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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요즘 어지럽습니다. 정치적인 것은 물론이고 내적으로는 경제성장과 여러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가깝게는 세월호 사건부터 최근에는 건보료 문제도 나오고 있지요? 이런 문제를 직접 손에 접하고 풀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공무원입니다. 높은 사람들로 따지면 관료입니다. 이런 관료들이 유능하면, 국민들은 매우 편해집니다. 세금은 낮아지고 물가 역시 마찬가지, 소비도 늘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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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는 바로 이런 관료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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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름대로 앞을 내다 보고 그에 따라 직언하며 국가의 재산을 운용한 박문수.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다른 관료들을 “설마 그럴 리 없어”라고 의심하여서는 “뒤에서 돈을 챙긴다”고 모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당시 박문수는 영조에게 직접 얻은 권력으로 당시의 곡식, 지금으로 따지면 억 단위의 돈을 자기 맘대로 조물락거렸습니다. 뒷돈을 챙기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영조는 무척 화를 냈습니다. 박문수의 뒤를 캤죠. 헌데 이게 어쩐 일이랍니까. 박문수는 전혀 돈을 따로 챙긴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재를 털어 백성을 긍휼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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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희는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비리가 있지 않을 수 없다고 예단하여 박문수를 고발하였다. 1743년(영조 19년)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임금은 박문수를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홍계희가 박문수의 각종 비행을 나열하며 비난하였고 더욱이 “어염의 이익을 제 마음대로 처단하고 한 도의 재화를 모두 농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들어간 것은 아주 적었다”고 상소하였다.
임금의 진노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럼에도 이 사건 뒤 영조가 더욱 박문수를 아끼게 된 것은, 이를 밝히는 과정에서 박문수가 한 치의 사적인 용도로도 돈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없는 구휼미를 만들어 국가에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훗날에도 재해가 들자 박문수는 사재를 털어 구휼미를 헌납하였다. 그러나 사족은 이것이 도히려 일상화되면 관에서 양반의 재물을 약탈할까봐 염려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추론하는 탓에, 이 정도의 큰 재원을 만들었다면 분명 사적인 축재가 조금이라도 있을 것이라 믿어 증거도 없이 고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영조와 박문수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pp.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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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추론한다. 참으로 와닿는 말입니다. 요즘에도 저런 일이 생기면 다들 고까운 눈으로 보기 마련인데 저때는 어찌했을지. 또 저런 인물이 실존했었다니……어쩐지 저는 조금 영조가 부러워졌습니다. 더불어,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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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도 박문수 같은 인물이 나타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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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직언을 반복하여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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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 <!--[endif]--> 사진과 함께 보는 리뷰 : http://cameraian.blog.me/220033613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