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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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저/ 다산북스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재니스가 들려주는, 지켜주는 이야기, 샐리 페이지 작가의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를 들었다. 그녀가 수집한, 다정하고 따스한 이야기 37편이 해 질 녘 노을처럼 살갗에 스며들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사라지는 다사로운 볕의 마지막 위로에 마음이 촉촉해졌다. 재니스와 B 부인의 조화가 이루어낸 행복한 결말이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했다. 

재니스가 수집한 이야기들을 음미하면서 누구에게나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거나 만들어가려는 따스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의 열풍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소설의 진면목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모두 다 깨닫게 된다. 왜 이토록 사랑받는지. 






독보적인 청소 도우미 재니스는 청소를 하면서 수집한 타인의 이야기로 삶의 외로움과 아픔을 버텨낸다. 자신을 무시하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 남편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물어보는 고객 아니 친구들에 의해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서서히 푸는 여정에 목이 멘다. 재니스가 그토록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했는지 알게 되니 더더욱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용기를 보여줄 때 함께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괜찮다고. 재니스가 타인에게 보여준 친절과 배려만큼, 조이와 개 데키우스를 향한 무한한 사랑만큼, 유언에게 느끼는 설렘만큼 재니스 본인도 그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B 부인 말처럼 '가장 이타적인' 여자인 재니스가 비로소 자신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된 이후 그녀가 들려줄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소설보다 더 냉혹한 현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는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누구나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남겨야 한다'는 말처럼 B 부인이 들려주는 '베키' 이야기는 재니스의 인생을 변화시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속에 꾹 눌러 담은 채 감춰두었던 마음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놓기까지 지난한 시간 동안 스스로 냈던 생채기가 무색할 정도로 재니스에게는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어른 재니스가 비로소 깨어났다. 죄책감에 눈이 멀었던 어린 소녀 재니스를 위해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어른 재니스를 만날 수 있어 기뻤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선한 본성과 기쁨을 발견할 때면 

위안을 받아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저 묵묵히 살아가며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이죠."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는 평범한 우리 안에 깃든 비범함을 찾아내는 놀라운 이야기다.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있는 이 소설을 펼쳐든 당신은 행운아이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을 값진 기회를 움켜지었으니까 말이다. 영국의 국민 소설의 위엄을 증명한 매력 넘치는 이야기로 재미와 힐링 가득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나는 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았다고."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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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언어 -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고은지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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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은 언어/ 고은지 지음/ 다산책방



고은지 작가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놓아주었던 그 순간에서야 차오르던 감정에 오열하고 말았다. '엄마의 편지' 키워드에 이끌려 신청한 서평단이었다. 예상보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고통에 감히 작가가 부모의 부재를 짊어진 채 지나온 시간 속 진한 아픔과 한숨을 헤아려 한 시도가 참으로 무모했음을 절절히 느꼈다.







영어, 한국어, 일본어. 세 언어가 교차하는 이야기는 미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를, 고은지 작가와 부모 그리고 조부모 삼대를 품고 있었다. 작가는 80년대에 태어났지만 이어져 온몸을 타고 흐르는 피는 그에게 수십 년 전의 역사를 되새겨주었다. 부모가 갈망한 그렇지만 그들은 떠난 나라에서 오롯이 살아남은 아이의 버티기에 뿌리가 얼마나 큰 생채기를 냈는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는 '시'를 만나 지독한 고통 속에서 헤어 나와 용서하려는 용기를 내고 놓아주는 사랑의 몸짓을 보여준다. [마법 같은 언어]는 상실과 고통이 새겨지는 언어로 사랑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한 편의 '시' 같다.








닮았다. 사랑스럽다. 씩씩하다. 밝다. 강하다…… 수없이 반복되는 단어들이 부모의 바람과 기대를 넘어 아이를 짓누르는 억압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고은지 작가는 이 편지를 받았을 때는 한글을 잘 몰라 다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제삼자는 모르는 부모 자식 당사자들 간의 끈끈한 유대는 저 편지글 아래에 잠들어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관동대학살, 제주 4.3을 가슴에 품은 채 일본에서 한국 제주도로 다시 대전으로 또다시 미국으로 떠나온 구미코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네 역사 속 비극을 관통한 보통 사람을 조명하고 있다. 잊힌,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세대를 이은 근원적 슬픔과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외할머니 준, 어머니 영의 이야기도 고은지 작가 내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편지. 49통의 편지만 보관되었다. 영혼이 저승으로 떠나기 전 답을 찾아 이승을 떠도는 날의 수, 우리네 풍습 '49재'처럼 어머니의 편지 49통을 번역하면서 고은지 작가도 답을 찾고자 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편지 전문과 일련의 이야기들로 놓아주는 작업들로 드디어 용서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지도교수가 말한 바처럼 인간 삶의 모든 조건에 대해 끊임없이 용서하고 도량을 베푼 것이리라. 그녀 자신에게도. '사랑'을 선택한 고은지 작가에게 어머니의 편지는 머무는 곳이 어디든 그곳으로 어머니를 데려와 거듭거듭 어머니의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그 사랑을 담아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마법 같은 언어]를 부쳤다. 그들도 상실과 고통을 사랑으로 이겨낼 '마법' 같은 무언가를 찾기 바라는 응원이 전해졌다.



"저희 할머니들은,

저는 그분들 인생이 축적된 존재예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이나 행동이

과거를, 그분들을 위로할 수 있어요.

저는 그분들이 영영 사라졌다고 여기지 않아요.


제 부모님이 제게 행복을 주시진 않았어요.

하지만 저를 놓아주셨어요. 제게 자유를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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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줄거리를 회수하라
김연주 지음, 박시현 그림 / 풀빛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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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줄거리를 회수하라/ 김연주 지음/ 도서출판 풀빛





책 읽기를 게임처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만큼 책을 읽지 않는 오늘날이다. 책을 들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져 있다. 우리 아이들이 게임, 유튜브, 숏츠처럼 스스로 책을 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요즘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소재와 이야기라면 권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 요건에 딱 부합하는 책이 바로 도서출판 풀빛에서 출간된 김연주 작가의 신작 [퀘스트 줄거리를 회수하라]이다.





주인공 하나가 게임 플레이어처럼 책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되어 주어진 퀘스트를 수행하며 엉켜버린 줄거리를 회수하는 이야기다. 퀘스트, 보상, 인벤토리, VR, 플레이어 등 친숙한 게임 관련 용어들이 흥미를 불러일으켜 접근성이 좋은 작품이다. 스토리텔러, 동화자, 시간여행자 등 소설 속 인물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로, 몰입감과 재미가 크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눈의 여왕>, <어린 왕자>, <별주부전>, <토끼와 거북이> 등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고전 명작의 줄거리를 꼬이게 한 발상부터 신선하다. 잘 아는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직면한 하나와 같이 덩달아 당황스럽다. 줄거리를 회수하려 애쓰는 하나의 분투는 '고전 다르게 쓰기'의 또 다른 버전 같다. 오랜 시간 읽혀온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결합시키거나 현대 문물이 끼어들어 변주된 고전은 반짝이는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아는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풀어내는 작업만큼이나 헝클어진 이야기를 원래 시선으로 되돌리는 작업도 독창적인 시선과 상상력이 필요했다. 이런 접근을 시도하다니, 김연주 작가의 창의력에 새삼 경이를 표한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자신의 매력을 뽐내면서도 조화를 이루며 뒤죽박죽된 줄거리를 회수하는 과정과 사건의 본질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이 함께 그려져나간다.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X'의 존재와 외계물질 NF3908 '책 속으로 향하는 문'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길 위에서 '예외'적인 존재인 '서하나'의 활약은 종횡무진이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진로, 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우연한 기회로 '확신'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자신의 꿈에 진지하게 도전하는 하나에서 시작한다. 현재 자신에 찬 모습의 근거를 과거의 회상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이야기의 풍미를 돋우고 있다.







이야기의 힘은 상상력과 구성력의 탁월한 조합에서 나온다. 기발한 상상력과 탄탄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찰진 이야기가 그려지는 [퀘스트 줄거리를 회수하라] 만나기를 퀘스트로 추천한다. 재미와 상상력, 독해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꿈이 없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직업 체험을 통해 결국 꿈 찾기 퀘스트를 완수해

냈지요. 앞으로도 저는 여러 고민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이야기를 읽고 그 속에서 퀘스트를

풀어 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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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키다리 아저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23
정서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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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키다리 아저씨/ 정서휘 지음/ 자음과모음





"소중한 건 거는 게 아니고 지키는 거야."




[지옥에서 온 키다리 아저씨]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유하고 깨우쳐 나아가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는 이야기다.


'못나고 모나고 못된 인물에 마음이 간'다는 정서휘 작가는 조손가정에서 성장한 중학생 '안미운'을 주인공으로 어른과 아이 중간에 서 있는 청소년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그려냈다. 미운은 진정한 관계 맺기를 갈망하는, 사랑을 갈구하는, 위태롭고 갈팡질팡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학교생활을 중심으로 미운의 일상을 통해 청소년 시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친구', '우정'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지옥에서 온 키다리 아저씨]는 진정한 친구를 가지고픈 미운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다룬다. 음악 취향까지 속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긋나기만 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힘겨워하는 미운은 괜스레 할머니에게 역정을 낸다. 미운은 자신의 질문에 '나이' 핑계를 대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만 반복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지긋지긋하다. 살갑지는 않지만 미운이를 잘 챙겨주는 할머니와 갑자기 나타나 차에 치일 뻔한 자신을 구해준 키다리 아저씨가 '안미운'의 곁에 있어주는 존재이다. 



"못된 일을 저지르는 건 우리가 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하는 거야. 
악마가 악마인 이유는 대가 없이는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야. "





정서휘 작가는 '악마'를 '키다리 아저씨'로 소환하여 특색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마의 보편성을 비틀어서 인간 군상의 다양하고 현실적인 모습들을 강조하고 있다. 갖가지 이유로 소중한 것을 걸고 악마와 계약을 맺는 인간과 대가를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미운은 '악마'를 자신의 키다리 아저씨이자 친구로 여긴다. 진실이면서도 거짓인 이 관계의 이면이 밝혀지는 순간 슬픔이 벅차올랐다. 


악마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미운의 말에 '친구'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기쁠 땐 같이 기뻐하고, 슬플 땐 같이 슬퍼하고,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기도 하고. 

또, 취미 생활도 같이하고, 맛있는 거 있으면 

같이 먹고, 쇼핑도 같이 가고…"




미운의 답을 들은 악마의 말이 인상적이다. 친구인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라 클론 같은 존재를 바라는 건 아닐까. 서로의 감정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각자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공감하고 응원하는 거다. '친구가 전부'인 청소년 시기라 친구에 대한 기대가 클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지 [지옥에서 온 키다리 아저씨]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 게 친구야? 너무 부담되겠는데.

네가 느끼는 대로 똑같이 느낄 상대를 찾는 거 아니야?

상대는 네가 아닌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사랑하는 소중한 존재를 위해 무엇이든, 목숨마저 걸 수 있는 게 '인간'이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거짓 소문으로 남을 괴롭히고 힘들게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초딩, 돼지 등 겉모습과 행동으로 평가하고 다가서지 않았던 예전과 다르게 조별 과제를 계기로 그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미운이가 그토록 원한 소중하고 진정한 관계에 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친구라고 믿었던 아이들이 오히려 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로 힘들게 하고 조롱하는 일을 겪으면서 진정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미운이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악마 아저씨와 유나 덕분에 진짜 소중한 것과 그것을 지켜내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는 자격지심에 사랑받기 위해 본모습이 아닌 남이 바라는 자신으로 살았던 미운은 그 힘겨움에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존재인 할머니에게 온갖 감정을 쏟아붓었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의 말을 거절해도 괜찮다는 걸 안다. 또 소중한 할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내고 기억하고자 한다. 


미운이 등교할 때마다 외치는 할머니 말씀 "차 조심해."에 담긴 마음을 알고 나니, 온 마음이 먹먹해졌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반복되는 할머니의 하루가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미운과 할머니의 아름다운 하루가 '일기장'에 차곡차곡 쌓여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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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지음, 김진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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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스토브 오시로 고가니 단편집/ 오시로 고가니/ 문학동네




페이지 한 장, 만화 한 편, 인물 한 명도 빈틈 없이 마음에 딱 들어찬 만화책을 만났다. 이 감각적인 만화는 표면으로 뚫고 나오지 않은, 미묘해서 표현하기 힘든 감정, 생각들을 캐치하여 그려내고 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고자 마음이 급한 현대인이 아니라 고즈넉한 시골길을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며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여유롭다.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에서 부속품으로 소모되는 게 아니라 자신에 천착하여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제자리를 찾아가고자 집중하는 이야기다. 살아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살갗에 작은 소름이 돋는, 간지러운 느낌처럼 마음을 흩뜨리는 기분을 만끽하게 한다.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이 찌푸리며 노려보듯 [해변의 스토브]에 몰입하였다.



오시로 고가니 만화가의 첫 단편만화집이다. 첫 단편집으로 2023년 <만화대상>에 노미네이트, 2024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자편 1위에 올랐다. 만화 강국인 일본에서 신인으로 이렇게 인정받다니 놀랍다. 하지만 읽어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 장르를 향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무너뜨리는 작품이다. 간결하고 명확하게 주제를 표현하기에 '만화'가 얼마나 탁월한지 증명하고 있다. 




만화집에 담긴 7편의 작품 모두 아름답다. 

표제작인 <해변의 스토브>는 판타지 형식으로 연애의 현실적인 고민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은 표현'해야 하는 교류다. 직류가 되면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스미오는 미움받을까 두려워 움츠려들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되었으니 떠나간 후 흘리는 눈물과 후회처럼 그 순간 제대로 표현했더라면…… 아쉽다. 스토브는 추위를 잘 타는 스미오와 찰떡궁합이다.




해변의 스토브 中



<설녀의 여름>, <바다 밑에서>, <소중한 일> 3편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과 요구되는 역할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설녀의 여름>은 산을 떠날 수 없고, 기억되기 위해 사람을 얼려 죽어야 한다는 설녀 세계의 규칙을 강요받으며 자라온 설녀 유키코가 인간 지나쓰를 만나 일탈을 벌이는 이야기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세계가 정한 한계에 갇혀 자기를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손 내밀어 주는, 다정한 말이었다. 설녀 유키코가 보낸 뜨겁고 차가운 여름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설녀의 여름 中




<바다 밑에서>, <소중한 일>은 진정 하고픈 일이 아닌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일을 하고 살아가는 모모와 시미즈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살아 숨 쉬게 해주는, 자신을 인정하게 해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부러울 정도로 둘 다 너무 행복해 보여서 눈물이 났다. 잔잔한 행복이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눈을 껴안다> 2편은 '몸'을 소재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환기시키는 작품들이다. 불의의 사고로 투명 인간이 된 남편 모리조와 아내 이즈미 그리고 임신을 한 여성 와카바가 주인공이다. 

투명 인간이 되었지만 일상에서 큰 변화가 없던 부부가 '투명'해진 몸으로 인한 부재를 현실적으로 깨닫게 되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남편의 몸을 좋아하던 아내는 이제 그 몸을 보지 못함을, 남편은 몸이 투명해져 점차 무엇을 느끼는지 마음이 어떤지 모르고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다. 그 막막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서로의 몸을 힘껏 껴안는 그들을 뒤에서 힘껏 안아주고 싶어졌다.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中




오시로 고가니 만화가는 모든 작품에서 여자의 심정을 잘 그려냈지만, 특히 <눈을 껴안다>에서 그 감각이 돋보인다. 내재된 여자의 불안과 공포를 간곡하게 표현하여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내 몸을 독점하고 싶어요. 

다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





투박한 그림체가 초기작이 아닌가 싶은 <눈 내리는 마을>은 약간 결이 다르다. 하지만, 그 담백하고 담담한 어조가 '오시로 고가니 답구나'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주제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 같다. 독자를 이끌어주면서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남겨주는, 다정하고 영리한 작가. 그래서 감동의 깊이가 배가되었다. 





눈을 껴안다 中



그냥 살아가지 말고,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자신의 마음과 생각, 몸 그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고 서로 공감해 주는 우리를 오시로 고가니는 그려내고 있다. 열심히 그려준 만큼 열심히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 독자의 몫이다. 온몸이 시원해지고 또 뜨거워지는, 담백하고 또 진한, 조용하고 또 들뜨는 이야기가 끌리는 당신에게 [해변의 스토브]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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