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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은 여자가 필요해 - 268년 된 남자 학교를 바꾼 최초 여학생들
앤 가디너 퍼킨스 지음, 김진원 옮김 / 항해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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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신입생으로 교정을 밟은 해는 1977년. 예일대학이 1969년 처음 여학생을 받고 나서 8년이 흐른 뒤다. 1969년은 미국에서 여성운동이 막 기지개를 키던 해. 작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자, 예일대 졸업생으로, 예일대학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써보기로 했고, 42명의 여성을 인터뷰한다.
"이 여성들이 앞서 나아가며 목소리를 낸 덕분에 우리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빚어 낼 수 있었다."
예일대학 뿐 만 아니라 1968년 당시 여학생 입학을 불허하는 미국 대학 명단에는 명문대학이 전부 속해 있었다. 여성이 남성과 함께 할 수 없도록 동등한 자격을 주지 않았고, 이는 마치 남성만 받는 교육은 곧 "일류" 교육이란 의미로 인식하게 한 것과 같다. 하지만 견고한 예일대학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주변 대학과 예일대학을 포함. 인종차별, 정치권, 성평등의 시위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 미국인은 교육과 고용과 법에서 여성이 얼마나 차별을 겪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989년 부터 2009년 사이 미국 대통령이 모두 예일대 출신이기 때문에 어차피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이 팽배했다. 때문에 오히려 남성에게 돌아가야 하는 한정된 자리를 여성이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예일대 학생으로 총장까지 오른 부르스터가 강조한 말에서 예일대의 상황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예일대학에서 남학생들이 "그래서 여학생은 어디에?" 남녀 공학을 부르짓는다. 예일대 남학생이 데이트라도 할라 치면,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여대로 가야 했던 이유도 한 몫 했다. 결국, 남녀 공학은 투표로 붙여졌고 투표결과는 200대 1. 거의 만장일치였다. 단지 남성들이 바꾼 것이 남녀공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에서 이미 성차별에 관한 움직임은 있었다. 다만 예일대학이라는 특수성이 남성들의 판단에서 움직였음으로 시작점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1명의 반대표는 1922년 17세에 신입생 자격으로 들어와 46년간 예일대학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젊은 층에서 일어난 인식으로 예일대에도 여학생이 입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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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총장 브루스터가 서둘러 조직한 남녀공학위원회는 가능한 현 상태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으며 "여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래서 반드시 깨뜨려야 할 것을 깨뜨리는 일은 예일대학에 처음 발을 디딘 여학생들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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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흑백 이미지 속 여성들은 모두 예일대 출신이다. 트럼펫을 불고 있는 키트 매클루어에게 최상급 음악당이 있는 예일대는 키트가 그리던 꿈의 대학이었고, 이미 시먼스 대학을 다니고 있던 편입생 셜리 대니얼스도, 아프로아메리카학과(흑인역사연구) 가 개설된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코니도 편입을 계획한다. 코니의 집안은 예일대학교에서 요리사 혹은 관리자로 일했다. 코니네 가족의 오랜 인여네 관한 자부심, 르네상스 여성이 되는데 도움을 주는 전공을 선택할 폭이 높은 예일대의 지원은 당연했다. 재미있는 사례도 존재한다. 베티 스판의 이야기가 그런데, 친구 캐럴라인이 베티 대신 장난삼아 보낸 예일대학 지원서에 덜컥 붙어 버린 것이다. 예일대학은 미국의 양대산맥이었다. 베티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서류를 추가 첨부해 자료를 더 넣어 보낸다.
예일대학에서 여학생을 신입생으로 받는다는 소식에 똑똑한 여성들은 모두 지원서를 작성했다. 한 고등학교에서 예일대학에 지원한 학생 가운데 남, 녀 학생 통틀어 합격자가 1명 배출되는게 전부일 정도로 예일대의 문턱은 높았다. 하지만, 여학생의 합격비율이 1명인데 반해 남학생은 7명 정도 합격자가 배출된다. 예일대가 여학생이 절반인 학교를 원하지 않았고, 후에 남녀학생 할당제는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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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은 최소 2년을 다니지 않은 학생에게 학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신입 여학생의 분포도 대체로 남자 동기의 인종적, 민족적 다야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다시 말해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다. 여학생의 90%가 백인이었다.
몇 백 년 간 남성을 유지해온 예일대는, 성차별이라는 벽을 가까스로 넘긴 듯 했지만, 인종 차별의 문 앞에서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예일 대학이 아니라 백인 대학에 온 기분이었다는 한 흑인 여학생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입 여학생들은 대체로 자신의 주변에서 인종차별을 몰아내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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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에서 남녀공학을 실시한 바로 그때, 전국의 흑인 학생들은 인종적 연대, 문화적 긍지. 자기결정권 이라는 흑인권력운동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흑인으로서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지키기 위해 우리는 내부로 눈을 돌렸다." 흑인 학생들은 식사 시간이 되면 서로를 찾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이 예일흑인학생동맹에 가입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예일대에 여학생이 들어오면서 생기는 성문제에 대한 성상담소도 예일대학에서 문을 연다. 예일대 4학년 남학생들이 특히 최악이라고 평가한 백인 여학생은 고학년 남학생들이 여자와 자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고, 4학년 남학생들은 학생 명부를 구해와 자신과 잠자리를 한 여학생의 이름에 차례차례 선을 그었다고 말했다. 혼전 임신, 성관계에 대한 고민들 또한 여학생들이 뚫고 나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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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네티컷 주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은 1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까지 코네티컷 주에서 낙태법 논의는 하나 같이 남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판사도 남성, 입법의원과 변호사, 전문 감정인도 남성이었다.
유력 남성이 하는 클럽 식사에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관행, 강간당하는 예일( 가슴 빵빵한 여자) , 1학년과 2학년, 돈독히 우정을 쌓을 수 없는 기숙사의 구조, 남녀 학생 할당제를 남녀공학 확대촉구로, 코네티컷 주의 낙태금지법, 노조의 임금인상과 부가수당 확대요구 등 예일대학의 관행과 오래된 정서와 자각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예일대 최초 여학생들의 고군분투는 끝나지 않았다. 한 집단에서의 오래된 관습이 바뀌면, 사회 전체로 영향을 발휘해 평등을 만든다. 남녀 공학을 도입한 1969년 4년간 지속되온 남녀학생 할당제가 폐지되고, 그 뒤 예일대의 여학생 비율은 46% 로 두 배 이상 뛰었다고 한다. 성차별을 뚫고, 평등을 외쳤던 똑똑한 예일의 여성들, 예일은 여자가 필요했다. 이는 현 사회와 비단 다르지 않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고투한 이들의 노력은 오늘날 까지 울려 퍼지며, 용기에 대한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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