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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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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곳에 자리 잡은 저택, 어린소녀의 안내를 받아 저택에 들어간다. 뺨이 들어가고 눈썹이 듬성듬성 빠진 노파가 원하는 것은 미적대지 않고, 일을 적확하게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박물관. 인간 존재를 초월한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노파의 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박물관의 관리기사로 면접을 보러 온 나에게 면접의 합격 여부는 중요했다. 면접을 보는 자리, 노파의 질문에 나는 틀에 박힌 대답을 했다. 노파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다. 늦은 밤이라. 그날 밤 나는 후원의 아담한 별채에서 묵었지만, 내일 아침이 되자 마자 떠날 차비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다음 날.저택에서 마중 나와 나를 안내해주던 소녀가 면접 합격을 알려왔다. 면접의 합격보다 마중 나온 소녀의 어머니가 의뢰인 노파라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너무 어린 소녀와 너무 늙은 노파.... 소녀는 감정적인 오해 때문에 일을 그만둔 사람이 몇 명 있다고 했다. 어머니라 불리는 노파의 괴팍한 성격에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난 이미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 정도는 문제되지 않았다.
소녀의 안내로 저택의 주변을 둘러본다. 해야할 일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저택과 마을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마을을 둘러본다. 소녀는 단골 빵집, 채소가게, 정육점, 어물전을 돌면서 주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야구장 스탠드에 앉아 점심을 핫도그로 해결한다. 나는 소녀가 상급학교의 진학없이 통신교육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노파와는 생물학적으로 어머니가 아니며, 자신이 양녀로 저택에 들어왔음을 알게된다. 아마 아무도 소녀와 노파를 모녀 사이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성실하게 귀를 기울이고, 불쾌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접에 합격한 것이라 말했다.
아침 9시 서재에서 노파를 만나는 것이 규칙이었다. 소녀는 오전에 자기 방에서 통신교육을 받았다. 노파의 공격을 피하고 흥분을 진정시키면서 박물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마치 노파가 23년 간 그린 달력의 3월, 산토끼의 수사일 같았다. 노파의 말처럼 산토끼는 도망치는 것 말고는 자신을 지킬 방법을 모르는 솔직한 동물이다. 나는 그런 산토끼 같았다.
page.38
노파는 달력 이야기를 할 때면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런, 살살 다워야지. 자네는 전시품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겐가? 박물관 기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단 말이야. 어디, 비듬 한 톨이라도 떨어 뜨려봐. 당장 해고할 테니 " 미적대는 것을 싫어한다면서 박물관 건설 준비가 본격화되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것은 역시 달력 때문이었다.
이튿 날, 노파는 달이 차기 시작했으니 "수장고"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수장고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보관되는 장소다. 그런데 그 곳은 내가 가본 그 어떤 수장고와도 달랐다. 노파는 수장고 안의 물품을 보고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보고 말했다. "유품이야" 노파는 마을 사람들의 유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대부분 도난품이라는 유품들, 나는 왜 이런 일을 하게 된 건지를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는 지금 정원사의 증조부인 유능한 베테랑 정원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알 수 없는 죽음을 눈 앞에서 보게 되었고, 정원사가 손에 쥔 전지가위를 보자 마자 이유도 없이 치마 주머니에 가위를 넣었다고 했다. 내면의 목소리에 의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노파는 자신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바로 유품을 수집하는 일.
그 시간 이후로 유품을 수집하는 일은 나의 일이 되었다. 마을에서 새롭게 죽음으로 떠난 자들의 유품을 수집하는 것이다. 양 딸인 어린 소녀를 조수로 쓰도록 하고, 편의상 정원사라고 부르지만, 전기, 수도, 토목, 설계의 모든 분야에서 경험이 많은 정원사와 함께 박물관으로 다시 탄생할 마구간의 설계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두려워 하던 일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사망자는 109세의 전직 외과의사였다. 나는 노파에게 뭘 받아와야 할지를 물었다. 노파는 탐욕스러운 외과의사의 메스를 제시했다. 돈벌이만 된다면 무엇이든 태연히 절단할 수 있는 인간, 귀 축소 수술 전용 메스였다.
page.63
" 받아와? 흥.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상대방이 내주는 물건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고 저네도 애기했을 텐데. 우리가 찾는 유품은 예외 없이 곤란한 장소에 갇혀 있어. 우리 임무는 그걸 구해내는 거고. 그 어떤 위험하고 지저분한 수단을 써서라도 말이지. 유품이 박물관에 보존되는 순간, 수단의 옳고 그름따윈 소멸되고 말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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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 정리사, 유족 및 의뢰인을 대신하여 고인의 유품, 재산 등을 정리하고, 사망한 장소에 남겨진 오염물을 처리한다. 이 단어는 책과 가장 유사한 느낌을 준다. 노파가 그동안 수집해온 유품들은 마을 사람들의 유품이었다. 박물관 기사를 고용해 유품을 수집하게 하고, 그 유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마구간을 박물관으로 개조한다. 더 많은 유품이 필요하고 그 부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부분은 한국의 정서 상( 어쩌면 일본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죽기 전, 살아 생전에 사용했던 증거물이자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단 한 가지의 증거인 유품은 대개 사람이 사망할 때 같이 태워버린다. 죽은 이들이 사용했던, 그들을 상징하는 물품을 산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부정을 탄다는 토속 신앙이 있다. 그래서 산소로 묻을 경우는 관에 함께 넣는다 거나, 화장의 경우 같이 태워버린다. 하지만 일본의 작가 요가와 요코는 이 유품을 살인 사건과 함께 복잡하게 구성해버린다. 그로테스크하다는 말은. 그래서 이 책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육체를 잃은 영혼은 어디로 가는 가? 하는 물음으로 상상력을 더해 만든 소설이 침묵 박물관이다. 침묵 박물관은 죽은 이들을 "침묵"이라는 단어로 규정해 놓고, 박물관과 함께 응축해 놓는다. 상상력과 드라마틱한 주제로 시작하는 이 소설에서 "살인 사건"은 그래서 긴박감과 궁금증을 더해준다. 유품을 수집하는 노파와 마을의 살인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살인 사건으로 인해 새로 수집할 유품이 생기고, 침묵 박물관을 형사들이 찾아온다.
떠난 자들이 말하는 유품은 어떤 이야기를 말할지. 그로테스크한 미학의 정점을 달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을 책 속에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