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눈부시게 홀로 설, 그대에게 - 체스터필드가 전하는 품격 있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필립 체스터필드 지음, 문서연 편역 / 한가한오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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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복잡하게만 느껴질 때 저를 다시 붙잡아 준 것은 대단한 해법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기본에 가까운 아주 단 순한 태도였습니다. 동료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단정한 옷차림, 타인을 배려하는 말투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5쪽


이 책은 체스터 필드의 편지를 읽으며 수많은 공감을 했었다는 편역자가 두 아들에게 삼키기만 했던 말들이었다는 말에 내 아들이 생각났다. 고3이지만 마치 오늘만 사는 초3처럼 게임에만 열중하는 삶의 태도를 추구하는 아들이라서.


게다가 "언젠가 어른들은 사라질 테지만 그들의 지혜는 오래 남을 것"이라는 문장 또한 격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삶은 태도다.


이 책의 원저자 필립 체스터필드는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신이 경험하며 쌓은 사회적 관계와 인간의 품격, 교양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남겼다. 삶의 정답지를 들이미는 것처럼 "이렇게 살아라" 하며 아들에게 보내는 단순한 훈계가 아닌 현실적인 조언은 오늘날까지 널리 읽힌다.


그리고 원저자의 깊이 있는 통찰을 펼치는 편역자 문서연은 고전을 현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탁월한 감각을 지닌 편집자이자 작가다.




이 책은 약 280여 년 전 쓰인 아들을 향한 부정을 담은 편지를 바탕으로 하지만, 현대 사회의 고민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빠르고 쉽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의 역량은 스펙이 아닌 태도에서 나온다'라는 메시지를 담는다.


인간관계에서 존중과 경청의 중요성,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중심을 지키는 법, 성급한 성공보다 긴 호흡의 품격 있는 삶 그리고 감정과 태도를 다루는 성숙한 자세를 편역자의 친절한 문장으로 격려 받는다.


"공부가 잠시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여행자의 피로처럼 받아들이거라." 38쪽

"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차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39쪽


75쪽


"읽는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가려내고 판단하는 일이다." 140쪽

"이성은 비록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가 가진 안내자 중에 가장 신뢰할 만한 나침반이다." 488쪽


이 책은 어쩌면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마음이 소란할 때 자연스럽게 집어 들게 될지도.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다르다.


만약 지금 인생의 과도기에서 방황하거나,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든든한 위로가 될지 모른다. 뭐 사회 초년생이라면 조력자일 수도 있어서 성공의 의미를 새기게 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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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정원
아야세 마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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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확실한 내 편이라고 믿은 품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경험이 있다." 32쪽


아직은 고작 <매끈하게 움푹한 곳>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 어느 책보다 감각적이라는 느낌이 좀 들어 설렌다. 벌거벗은 모에카가 누아르에 감겨 있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을 고민하고 검열하는 마음이 그랬다.


분명 '누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거기다 확실하게 믿는 사람에게 미끄러져 떨어지는 일이…. 나는 아버지였으려나. 대형 병원 구석진 한쪽,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비교적 다른 창보다 큼지막한 창으로 어둠이 빛처럼 쏟아지는 새벽, 아버지는 이제 그만 치료를 포기하자고 했었다. 아마 조금 눈물이 났던가.


일본 치바현 출신으로, 2010년 <꽃에 눈멀다>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아야세 마루는 소설가로 꾸준히 주목받으며, 2016년 <이윽고 바다에 닿다>로 제38회 노마문예신인상 후보, 2017년 <치자나무>가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작, 국제 문예지 <그란타>가 차세대 일본 문학의 주목할 작가로 알려졌다.





장례와 신발과 망자와 축하 케이크로 연결되는 이 조금은 기괴한 연결이 이상하게 감각을 자극하며, <230밀리미터의 축복>은 그렇게 시작되는데, 문득 아마미 루루코처럼 '어딘지 연약해 보이고 행복이 흐릿한'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라고 생각했다.


덩달아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거려도 도무지 찾아낼 수 없는 얼굴이라서 신기루 같았다. 그나저나 아내 메이코에게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다가 결국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면 인간은 오히려 웃게 되는" 것을 깨닫는 것 역시 예사롭지 않고.



78쪽

191쪽


이 책은 각 이야기 속 인물들의 극적인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랜 연인 사이에 생겨난 거리감, 가까웠던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선가 변질되고 있다는 예감 같은 그런 내밀하고 미묘한 균열을 감각적인 순간을 포착한다.


기억의 달팽이라든가 손가락에 반한 다거나 하는 판타지 같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에서도 꽤 많은 내용과 부분이 감각적이라 읽는 내내 기분이 조금 달떴다.


이 책은 사랑, 불안, 집착, 갈망, 이별의 기척, 관계의 흔들림을 통해 이 책은 분명 읽으면 읽을수록 끝을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감각적이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이야기로 책장을 덮는 순간엔 곁에 있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그런 책이다. 재밌는 건, <매그놀리아 남편>의 이쿠토 이야기는 왠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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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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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인다는 것은 알고 싶어진다는 뜻이고 알고 싶다는 것은 좋아하게 될 확률이 큰마음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신경 쓰이게 됐다는 것은 좋아한다의 입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복잡한 사랑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쉬운 글로 정리하다니요." 15쪽


리빙하우스의 카피를 감탄에 마지않는 저자 오하림은 TBWA, 무신사, 29CM의 카피라이터로 일했으며, '내가 광고 회사 힘들다 그랬잖아', '도보마포', '일본광고' 계정을 만들고 운영하는 기획자다.


이 책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잊지 않기 위해 모아두고 싶고, 모아놓고 보면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그가 모은 9,000개의 광고 카피 중 68개의 카피를 추렸다.




JR큐슈 철도의 "사랑이라든지, 용기라든지, 보이지 않는 것도 함께 타고 있다."처럼 어느 것 하나 마음 흔들지 않은 게 없어 그대로 카피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89쪽


이 책은 일본 광고에 쓰인 인상적인 카피들을 모아, 그 문장에 저자의 기억과 맥락을 조미료처럼 뿌렸다. 그저 단순한 번역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시대의 정서와 소비자의 감각이 저자의 절제된 감정을 통해 읽는 순간 공감하게 된다. 마치 한 줄의 예술을 넘어 마법 같은 느낌을 주는 카피의 세계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달까.


114쪽


그리고 이런 기막히고 코 막히는 카피도 그렇지만 '추신으로 쓸 말을 아껴 둔다'라는 둥 여기저기 첨가되는 저자의 감성 한 스푼은 기어코 온몸 감각 세포가 팡팡 터트리고 만다.


142쪽

168쪽

198쪽

292쪽


온기가 스민 편지를 쓰고 싶었던 일본우정그룹이나 적당한 애정을 과도하게 느끼게 된 힐데모어라든지 잠든 연애 세포를 깨우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도쿄 스카이트리나 게다가 당장이라도 코트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슬램덩크의 지고 싶지 않은 마음처럼 시공간을 넘어 잃어버리고 살았던 감정 폭발을 경험한다.


"언젠가는 회사라는 납작한 일반 명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동사로 저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1쪽


납작한 일반 명사, 살아 움직이는 동사 같은 기막힌 표현에 어딘가 깊은 곳이 꿈틀댔다. 별 이야기 아닐 수 있지만 소개할 납작한 회사도 없는 백수라서 더 그랬을지도.


"과거를 좇는 일이나 스스로에게 쓴소리하는 것을 낭만으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때로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성장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머물러 있는 감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다만 저는 여전히 나의 결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족함이 있다는 건, 여전히 더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사람은 결핍조차 그렇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는 순간 부끄러운 게 아니라, 오히려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270쪽


위스키 바, 카미야의 이야기에서 괜히 울컥했다. 나는, 무언가를 끝까지 사랑했던 기억은 없지만 저자에겐 카피가 그러했음이 오롯이 전해져서 그랬다. 카피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이 책은 '잘 쓴 문장'으로 억지로 설득한다기보다 '덜어 냄'의 공감이 돋보이는지 이해하게 만든다. 화려한 수식어 없이도 본질을 꿰뚫는 한 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감각의 아카이브 같아서 카피라이터나 기획자뿐 아니라, 문장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장하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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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비단구두
염정숙 지음 / 좋은땅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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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랍고 값비싼 느낌의 비단 보다 봄날이란 단어에 눈길이 먼저 닿았다. 캔이 부른 <내 생에 봄날은>도 생각나고 내 인생에 봄날은 있었던가 싶어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결혼 생활을 글로 쓰자니 구원이었다는 작가의 "일생을 헌신했더니 헌신짝이 된 내 삶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중이라는 말이 꽤나 아팠다.


먹먹한 마음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작가의 얼굴을 얼마간 들여다본다. 스물여섯 해의 미혼 생활, 쉰 다섯 해의 결혼 생활, 다시 한 해의 미혼 생활을 버텨내는 중인 여든둘의 엄마 얼굴이 겹쳐졌다. 엄마도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결혼 생활이었다. 그리고 "살아봐야겠다"라는 작가의 다짐에 읽던 활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이 책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우연히 배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진솔한 고백이 담긴 자전적 산문으로 소설보다 더 영화 같고, 시보다 더 절절한 한 여성의 기록 일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노동, 자식 뒷바라지로 점철된 시간 속에서 비자발적 '잘림'을 경험하고 헛헛한 마음을 글로 다잡으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꿈을 마주하게 되는 걸 보면서 찡하다 울컥하다 감정이 난리 부루스를 친다.


한데 작가의 가족, 그중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와의 추억담이 많이 등장하는 게 뜻밖인데, 솔직히 읽다 보면 시아버지도 그다지 자상한 것 같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보고 자란 게 있으니 남편도 자상하겠거니 싶은데 작가 기억에는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은 남의 편으로 그려져 좀 웃펐다. 뭐, 남편도 그런데 시어머니야 말해 무엇하랴.


세세한 집안 사정은 모르겠지만 결혼을 앞둔 나이에도 제 손으로 밥 한번 안 해 봤을 정도의 서울 살이었다면, 귀한 딸이고 부족하지 않은 형편으로 짐작된다.


그런 작가가 스물넷에 인제의 첩첩 산골 작은 마을로 납치되듯 와서 하게 된 시집살이에 "내가 이렇게 안 살아 봐서…"라는 고단하고 팍팍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적잖이 재밌다.


53쪽


한편 전지적 며느리 시점의 고발적 내용에는 탄식이 터질 만큼 시월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어찌 며느리가 손 귀한 집의 첫 손주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이렇다 할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까? 고약한 시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자상하다는 시아버지는? 그래놓고 시아버지 환갑은 동네잔치를 벌이고 뭄 푼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를 혹사 시키는 시월드에서 왜 살지? 란 의구심 들었다. 정녕 그렇다면 홧병이 제대로 쌓여 몸에 사리가 백만 개쯤은 만들어졌겠다 싶어 절로 욕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읽다 보면 홍해삼 사건이나 며느리에게 던지는 질문 200개 등등 곳곳에 등장하는 작가의 성격도 만만치는 않아 보여서 살짝 도토리 키 재기 느낌도 들기도 해서 어쩌면 쿨한 사람이라는 건 본인 착각일지 모르겠다.


123쪽


유려한 문장이나 화려한 수식어로 뽐내기보다는 투박에 가까운 담담한 문장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자식들 양육에 올인하며 악바리처럼 일했던 순간들, 갑작스러운 해고 뒤에 찾아온 상실감,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글쓰기라는 구원까지. 모든 고백이 너무 진솔하고 내 이야기 같아서 몰입하고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일흔 중반에 데뷔한 작가가 펼쳐낸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서사를 공감하게 만들고,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에게 "애썼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따뜻한 위안을 선사한다. 단순히 노년의 회고록이 아닌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의 꿈을 잠시 내려놓은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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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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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고요. 본명인지 필명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작가의 성향이 짐작된다. 시인, 출근하기 싫어 도망친 곳에서 매일 출근하는 삶을 산다. 강원도력으로 그는 아직 아이라 믿는다. 시집 <아이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 산문집 <지난여름의 구름>을 펴냈다.




공교로움은 우연함을 동반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산책'이란 주제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됐다. 심지어 장소 역시 강릉이라서 마음이 막 파랑파랑 해지고 그런 곳에서의 삶이 부럽고 되게 되게 꿈꾸게 되는 통에 마음을 조금 앓았다.


그나저나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입성을 꿈꾸는 삶이 목표로 사는 거라 이해하며 살았다. 다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시인은 "중심에서 멀어져 바깥으로 떠도는 중"이라며, 자신들의 불시착을 은근 자랑하는데 쿵과 찡의 어디쯤인 감정이 솟았다. 울컥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의 가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사랑하기엔 충분하다." 16쪽


작가가 불시착해왔던, 그동안의 마을에서 늘 흰둥이 한 마리씩은 꼭 봐왔다는 그의 산책길의 풍경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흰둥이 꼬리처럼 마음을 대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설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곁이라는 건, 있는 공간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공간이니까. 옆과는 다르다."라는 문장에 생각이 골똘해졌다. 작가가 철학 하는 '곁'과 '옆' 사이 틈에서, 나는 타인의 곁을 졸라대지도 그렇다고 선뜻 내어준 적도 없는 것 같아서 순간 마음이 추워졌다. 내게 관계는 매번 그냥 옆에 머물다 끝을 내고 마는 통에. 나이 듦에서 외로움을 돌려받고 있는 건 아닌지 괜히 오늘 쓸쓸해져 버린다.


그렇게 이 책은 목적 없이 걷는 시간 속에서 서두르지 말고 삶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일상이 다채로워지는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너무 진짜 같지만 진짜가 아닌 것은 결국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29쪽


가르릉 가르릉 소리 내는 호떡이는 곁에 머물던 타인이겠지, 생각하다가 나도 그런 타인쯤은 필요할 나이가 됐구나, 생각한다. 평행 우주의 나를 생각하면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과거를 붙잡아 두는 것이 지금의 삶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 문장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생이 폭만했다거나 드럽게 불행하다거나 생각하진 않지만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던 그날, 거길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꿈꾸던 체육 선생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35년째 하고는 있다. 어쨌거나 지금의 삶이, 소스케가 말한 "과거라는 어둡고 커다란 구렁텅이"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해가 바뀌기 직전에 잡았던 책을 해가 바뀌면서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차르르, 읽어야 할 책장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부표도 없는 그물을 찾는 것 같아서 그냥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그러다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잃었던 부표를 찾은 것처럼 반가운 문장을 길어 올렸다. 아마 이 문장을 다시 곱씹고 싶었는지도.


57쪽


책을 읽는 동안 강릉의 해변과 남대천의 산책로와 곳곳을 걷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작가와 같이 심한 방향치인 나는 작가와는 다르게 종종 길을 잃었다. 방향치에게 길을 잃는 건 꽤나 마음 부침이 있는 일인데 아쉽다는 작가의 마음이 책갈피를 쓰지 않아서 잃게 되는 책장이 썩 아쉽지 않은 걸 보면 그런 마음이려나?


나는 다치기 전에는 느긋하게 걷지 못해 팔딱거리고 뛰어다니는 편이었고, 다치고 나서는 휠체어를 타게 돼서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뭣하고 그러니 알고 보면 평생 산책이라곤 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해보기 어려운 영역인 터라 산책자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도시와 함께 내면의 지도를 완성하는 일"이란 작가의 말에는 얼마간 공감했다. 느긋이 주변을 돌아보며 거닐다 보면 세포가 온통 각성돼서 도파민이 터지는 기분일 것이란걸.


108쪽


이 책은 작가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닌 강릉에서 지내며 산책과 함께한 일상의 기록이다. 빠르지 않은 산책자의 일상처럼 글도 자연스럽게 늦춰지는데 괜히 부러운 마음만 빨라진다. 읽고 나면, 무언가 성취하려 아등바등 대던  삶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게 돼서 바쁘게 살아야 하지만 천천히 살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누군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보다 오 년 동안 다른 누군가 자신을 돌보아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160쪽


중간중간 올려진 시는 강릉 바다로 향하는 오래된 버스 정류장처럼 정겨워서 쉬엄쉬엄 음미하며 쉬게 된다. 그리고 끄트머리 소설 '손'은 생사를 긋던 수지 손목 위의 선과 허공을 향하던 엄마의 손을 잡지 못한 죄책감이 수완의 손에 머무는 이야기는 자극적이지 않은데 묵직하다. 작가의 일상과 시와 소설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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