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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의 마음 -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기쁨
정고요 지음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정고요. 본명인지 필명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작가의 성향이 짐작된다. 시인, 출근하기 싫어 도망친 곳에서 매일 출근하는 삶을 산다. 강원도력으로 그는 아직 아이라 믿는다. 시집 <아이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 산문집 <지난여름의 구름>을 펴냈다.

공교로움은 우연함을 동반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산책'이란 주제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됐다. 심지어 장소 역시 강릉이라서 마음이 막 파랑파랑 해지고 그런 곳에서의 삶이 부럽고 되게 되게 꿈꾸게 되는 통에 마음을 조금 앓았다.
그나저나 주변에서 중심으로의 입성을 꿈꾸는 삶이 목표로 사는 거라 이해하며 살았다. 다들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시인은 "중심에서 멀어져 바깥으로 떠도는 중"이라며, 자신들의 불시착을 은근 자랑하는데 쿵과 찡의 어디쯤인 감정이 솟았다. 울컥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의 가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사랑하기엔 충분하다." 16쪽
작가가 불시착해왔던, 그동안의 마을에서 늘 흰둥이 한 마리씩은 꼭 봐왔다는 그의 산책길의 풍경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흰둥이 꼬리처럼 마음을 대차게 흔들었다. 그렇게 설렜다는 말이다.
그리고 "곁이라는 건, 있는 공간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공간이니까. 옆과는 다르다."라는 문장에 생각이 골똘해졌다. 작가가 철학 하는 '곁'과 '옆' 사이 틈에서, 나는 타인의 곁을 졸라대지도 그렇다고 선뜻 내어준 적도 없는 것 같아서 순간 마음이 추워졌다. 내게 관계는 매번 그냥 옆에 머물다 끝을 내고 마는 통에. 나이 듦에서 외로움을 돌려받고 있는 건 아닌지 괜히 오늘 쓸쓸해져 버린다.
그렇게 이 책은 목적 없이 걷는 시간 속에서 서두르지 말고 삶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일상이 다채로워지는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너무 진짜 같지만 진짜가 아닌 것은 결국 마음을 무너지게 한다." 29쪽
가르릉 가르릉 소리 내는 호떡이는 곁에 머물던 타인이겠지, 생각하다가 나도 그런 타인쯤은 필요할 나이가 됐구나, 생각한다. 평행 우주의 나를 생각하면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과거를 붙잡아 두는 것이 지금의 삶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 문장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생이 폭만했다거나 드럽게 불행하다거나 생각하진 않지만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던 그날, 거길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꿈꾸던 체육 선생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35년째 하고는 있다. 어쨌거나 지금의 삶이, 소스케가 말한 "과거라는 어둡고 커다란 구렁텅이"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해가 바뀌기 직전에 잡았던 책을 해가 바뀌면서 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차르르, 읽어야 할 책장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부표도 없는 그물을 찾는 것 같아서 그냥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다. 그러다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잃었던 부표를 찾은 것처럼 반가운 문장을 길어 올렸다. 아마 이 문장을 다시 곱씹고 싶었는지도.

57쪽
책을 읽는 동안 강릉의 해변과 남대천의 산책로와 곳곳을 걷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작가와 같이 심한 방향치인 나는 작가와는 다르게 종종 길을 잃었다. 방향치에게 길을 잃는 건 꽤나 마음 부침이 있는 일인데 아쉽다는 작가의 마음이 책갈피를 쓰지 않아서 잃게 되는 책장이 썩 아쉽지 않은 걸 보면 그런 마음이려나?
나는 다치기 전에는 느긋하게 걷지 못해 팔딱거리고 뛰어다니는 편이었고, 다치고 나서는 휠체어를 타게 돼서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뭣하고 그러니 알고 보면 평생 산책이라곤 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해보기 어려운 영역인 터라 산책자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도시와 함께 내면의 지도를 완성하는 일"이란 작가의 말에는 얼마간 공감했다. 느긋이 주변을 돌아보며 거닐다 보면 세포가 온통 각성돼서 도파민이 터지는 기분일 것이란걸.

108쪽
이 책은 작가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닌 강릉에서 지내며 산책과 함께한 일상의 기록이다. 빠르지 않은 산책자의 일상처럼 글도 자연스럽게 늦춰지는데 괜히 부러운 마음만 빨라진다. 읽고 나면, 무언가 성취하려 아등바등 대던 삶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게 돼서 바쁘게 살아야 하지만 천천히 살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누군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보다 오 년 동안 다른 누군가 자신을 돌보아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160쪽
중간중간 올려진 시는 강릉 바다로 향하는 오래된 버스 정류장처럼 정겨워서 쉬엄쉬엄 음미하며 쉬게 된다. 그리고 끄트머리 소설 '손'은 생사를 긋던 수지 손목 위의 선과 허공을 향하던 엄마의 손을 잡지 못한 죄책감이 수완의 손에 머무는 이야기는 자극적이지 않은데 묵직하다. 작가의 일상과 시와 소설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았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