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비단구두
염정숙 지음 / 좋은땅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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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랍고 값비싼 느낌의 비단 보다 봄날이란 단어에 눈길이 먼저 닿았다. 캔이 부른 <내 생에 봄날은>도 생각나고 내 인생에 봄날은 있었던가 싶어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결혼 생활을 글로 쓰자니 구원이었다는 작가의 "일생을 헌신했더니 헌신짝이 된 내 삶을 생생하게 마주하는" 중이라는 말이 꽤나 아팠다.


먹먹한 마음으로 조그맣게 보이는 작가의 얼굴을 얼마간 들여다본다. 스물여섯 해의 미혼 생활, 쉰 다섯 해의 결혼 생활, 다시 한 해의 미혼 생활을 버텨내는 중인 여든둘의 엄마 얼굴이 겹쳐졌다. 엄마도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결혼 생활이었다. 그리고 "살아봐야겠다"라는 작가의 다짐에 읽던 활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이 책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우연히 배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진솔한 고백이 담긴 자전적 산문으로 소설보다 더 영화 같고, 시보다 더 절절한 한 여성의 기록 일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노동, 자식 뒷바라지로 점철된 시간 속에서 비자발적 '잘림'을 경험하고 헛헛한 마음을 글로 다잡으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꿈을 마주하게 되는 걸 보면서 찡하다 울컥하다 감정이 난리 부루스를 친다.


한데 작가의 가족, 그중 남편도 아니고 시아버지와의 추억담이 많이 등장하는 게 뜻밖인데, 솔직히 읽다 보면 시아버지도 그다지 자상한 것 같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보고 자란 게 있으니 남편도 자상하겠거니 싶은데 작가 기억에는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은 남의 편으로 그려져 좀 웃펐다. 뭐, 남편도 그런데 시어머니야 말해 무엇하랴.


세세한 집안 사정은 모르겠지만 결혼을 앞둔 나이에도 제 손으로 밥 한번 안 해 봤을 정도의 서울 살이었다면, 귀한 딸이고 부족하지 않은 형편으로 짐작된다.


그런 작가가 스물넷에 인제의 첩첩 산골 작은 마을로 납치되듯 와서 하게 된 시집살이에 "내가 이렇게 안 살아 봐서…"라는 고단하고 팍팍한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적잖이 재밌다.


53쪽


한편 전지적 며느리 시점의 고발적 내용에는 탄식이 터질 만큼 시월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어찌 며느리가 손 귀한 집의 첫 손주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이렇다 할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까? 고약한 시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자상하다는 시아버지는? 그래놓고 시아버지 환갑은 동네잔치를 벌이고 뭄 푼지 얼마 되지 않은 며느리를 혹사 시키는 시월드에서 왜 살지? 란 의구심 들었다. 정녕 그렇다면 홧병이 제대로 쌓여 몸에 사리가 백만 개쯤은 만들어졌겠다 싶어 절로 욕이 나왔다.


그건 그렇고 읽다 보면 홍해삼 사건이나 며느리에게 던지는 질문 200개 등등 곳곳에 등장하는 작가의 성격도 만만치는 않아 보여서 살짝 도토리 키 재기 느낌도 들기도 해서 어쩌면 쿨한 사람이라는 건 본인 착각일지 모르겠다.


123쪽


유려한 문장이나 화려한 수식어로 뽐내기보다는 투박에 가까운 담담한 문장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자식들 양육에 올인하며 악바리처럼 일했던 순간들, 갑작스러운 해고 뒤에 찾아온 상실감,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글쓰기라는 구원까지. 모든 고백이 너무 진솔하고 내 이야기 같아서 몰입하고 읽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일흔 중반에 데뷔한 작가가 펼쳐낸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의 서사를 공감하게 만들고,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에게 "애썼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따뜻한 위안을 선사한다. 단순히 노년의 회고록이 아닌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신의 꿈을 잠시 내려놓은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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