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물방울 모양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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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은 기억을 맡기기에 제법 어울리는 물질이다. 쉽게 썩거나 닳지 않고, 작은 몸 안에 긴 시간을 품는다.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반지가 한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보석에 새겨진 시간을 지키려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은 물방울 모양』에서 사람들은 오래된 보석을 해체한다. 금속에서 보석을 떼어내고 모양을 고쳐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든다. 기억을 지키겠다면서 기억이 깃든 형태부터 바꾸는 것이다.

데라치 하루나는 이 모순에서 삼십 년의 시간을 꺼낸다. 마흔다섯의 나가세와 다카미네, 모리, 시즈쿠는 중학교 시절 졸업 작품을 함께 만든 사이다. 이후 각자의 시간을 살아온 이들은 ‘주얼리 다카미네’의 폐업을 계기로 다시 한자리에 놓인다. 여기까지가 소설이 현재에서 보여주는 거의 전부다. 그다음 이야기는 앞으로 가지 않는다. 마흔에서 서른다섯으로, 다시 서른과 스물다섯으로. 시간은 다섯 해씩 뒷걸음질하고 마침내 네 사람이 열다섯이었던 날에 닿는다. 미래를 향해 읽던 독서의 습관도 이곳에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를 기다리는 대신 이미 본 사람의 과거를 뒤늦게 알게 된다. 먼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아가는 독서는 조금 묘하다. 마흔다섯의 어떤 표정은 삼십 대의 시간을 지나며 다른 뜻을 얻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관계의 거리는 스무 살의 한 장면을 만난 뒤 새롭게 읽힌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다는 익숙한 인과가 거꾸로 작동한다. 이미 도착한 현재가 과거를 읽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과거는 지나간 순서대로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지 않다. 오늘의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에 따라 오래전의 일이 갑자기 선명해지고, 한때 중요했던 기억이 어느 순간 힘을 잃는다. 사건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움직인다. 열다섯에 알았던 친구와 마흔다섯에 기억하는 친구가 같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흐른 삼십 년은 상대를 변화시켰고, 그를 바라보는 자신도 바꾸어놓았다. 그렇다면 기억을 지킨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처음의 감정과 의미를 훼손하지 않은 채 보존하는 일이라면 인간의 기억은 그 임무에 자주 실패한다. 하지만 오래된 보석을 리폼하는 손길을 바라보면 다른 방식의 보존을 생각할 수 있다. 원래의 장신구는 사라져도 그 안에 있던 물질은 다음 형태로 옮겨간다. 이전의 시간을 버리지 않으면서 지금의 몸에 맞게 고치는 것. 과거를 현재 속에서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사람 사이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네 사람은 삼십 년 내내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만나지 않는 시간이 있고, 상대의 삶을 모르는 기간도 길다. 그러나 데라치 하루나는 그 공백을 관계의 실패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래 보지 않았다는 사실과 오래된 사이라는 사실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존재한다. 이들의 우정에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시 만났을 때 기억 속 상대와 현재의 상대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다. 누군가를 오래 안다는 말에는 조금 위험한 확신도 섞여 있다. ‘나는 너를 안다’는 문장이 현재의 상대보다 기억 속의 상대를 가리키기 시작할 때, 오래된 시간은 친밀함만큼이나 단단한 틀이 된다. 이 소설의 관계가 다정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서로의 삼십 년을 전부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지 않았던 시간까지 설명받아야만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관계가 오래된다는 것은 상대가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보다, 달라진 상대와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다는 뜻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태도는 각자가 지나온 실패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이어진다. 이들의 삶에는 잘못 고른 길과 상처받은 시간이 있고, 지나고 보니 자신에게 맞지 않았던 선택도 있다. 소설은 그것들을 훗날의 행복을 준비한 과정으로 정돈하지 않는다. 아팠던 과거에 반드시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 경험에서 의미까지 생산해야 한다. 지나간 일을 모두 성장의 근거로 만들지 않아도 인간은 살아간다. 어떤 기억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고, 삶은 그것을 데리고 다음 시기로 이동한다. 그래서 리폼이라는 말은 치유보다 조금 넓게 읽힌다. 망가진 것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달라진 것을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 과거를 좋았던 일로 바꾸지도 않고 상처의 흔적을 삭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달라진 현재가 그것을 품을 수 있도록 자리와 모양을 고친다. 인간은 그렇게 과거의 의미를 거듭 고쳐 쓰며 현재를 살아간다.

시간을 거슬러 도착한 열다섯의 네 사람 앞에는 물방울이 있다. 졸업 작품의 모티브가 된 물방울은 그때부터 이 소설의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떨어진 물은 한곳에 고이지 않는다. 흐르고 섞이고 증발한 뒤 다시 비가 된다. 어느 순간을 잘라 이것이 처음의 물방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데도 물의 운동은 계속된다. 보석과 물방울은 그래서 묘한 짝을 이룬다. 하나는 단단해서 오래 남고, 다른 하나는 형태조차 제대로 간직하지 못한다. 그러나 보석은 리폼을 거쳐야 다시 누군가의 시간이 되고, 물은 형태를 버리며 순환한다. 영원을 말하기 위해 소설이 선택한 두 물질은 결국 보존보다 변화를 보여준다. 변하지 않는 것만 오래가는 세계에서는 사람의 마음도 관계도 영원에 닿기 어렵다.

열다섯의 아이들이 ‘영원’이라는 말을 처음 만난 뒤 삼십 년이 흐른다. 그동안 사람은 달라지고 관계는 느슨해지며 기억의 모양도 여러 번 바뀐다. 그 변화 가운데 무엇이 처음 그대로 남았는지를 찾는 일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물방울에게 처음의 형태를 되돌려달라고 할 수 없듯이. 다만 한때 존재했던 것이 다음 형태 안에도 조금씩 섞여 있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오래전의 시간이 섞여 있고, 현재의 관계에는 만나지 않았던 세월까지 들어 있다.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는 작은 보석함보다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흐르는 물을 닮았다. 붙잡아두면 같은 모양으로 남아 있지 못하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흐르는 것.

『기억은 물방울 모양』이 말하는 영원은 그렇게 시간의 길이보다 변화의 방식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 남기 위해 단단해지는 삶도 있지만, 모양을 바꾸면서 이어지는 삶도 있다. 삼십 년 전의 물방울과 오늘 내리는 비가 같은 물일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다시 한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기억 역시 처음과 다른 의미로 오늘의 삶에 스며들 수 있다. 사라진다는 말과 이어진다는 말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세계가 있다. 이 소설은 그 사이를 삼십 년에 걸쳐 흐른다. 영원히 간직한다는 말은 한때의 모습을 보존하는 데서 벗어나, 변화한 것들이 다시 이어질 자리를 내어주는 쪽으로 의미를 넓혀간다.

✏️도서출판 문예춘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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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
미치 앨봄 지음, 유혜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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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을 고칠 수 있다는 상상에는 언제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가 따라붙는다.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면, 한 번만 더 기회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행복했으리라는 믿음. 『트와이스』의 알피에게 삶은 그런 가정을 실제로 시험할 수 있는 장소다. 이미 지나간 순간으로 돌아가 단 한 번 다시 살아볼 수 있는 능력은 처음에는 축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복할 수 있는 순간이 늘어날수록 현재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초안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 순간을 온전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반복』에서 반복을 과거의 단순한 재현과 구별했다. 진정한 반복은 다시 주어진 삶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실존의 운동에 놓인다. 알피는 누구보다 쉽게 시간을 반복하면서도 오랫동안 반복의 의미에는 닿지 못한다. 그에게 첫 번째 삶은 두 번째 시도를 위한 정보가 되고, 경험은 교정해야 할 데이터로 바뀐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정이 거듭될수록 삶은 완성되어가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실패만이 아니다. 우연히 도착했던 장소와 계획하지 않았던 만남, 서툴렀기에 진실했던 순간들까지 함께 지워진다.

시간은 수정되어도 기억까지 말끔하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알피는 다른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지나간 것은 소멸한 채 뒤에 놓이는 대신 기억을 통해 현재 속에 겹쳐진다. 한 번 살아본 시간과 다시 선택한 시간이 한 사람 안에서 포개지면서 알피의 삶에는 누구와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는 층위가 생긴다.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쁨과 상실도 한 인간의 현재를 만들고 있다면, 살아온 삶의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문제는 사랑 앞에서 더욱 첨예해진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고 자신의 행동도 고칠 수 있지만, 타인의 마음까지 같은 자리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 사랑에는 언제나 나의 의지 바깥에 있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세계의 조건을 아무리 정교하게 배열해도 사랑에는 공식이 생기지 않는다. 상대가 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자유에서 비롯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불렀던 이유 역시 죽음을 비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며, 삶에 끝이 있다는 자각은 지금의 선택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살아가게 한다. 두 번째 기회조차 죽음이라는 경계 안에서만 허락된다는 사실이 알피의 삶을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끌어내린다. 끝이 없다면 선택을 서두를 이유도,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할 이유도, 오늘의 순간을 붙잡을 이유도 희미해진다. 유한성은 인간에게서 가능성을 빼앗는 결핍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결핍이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

『트와이스』를 따라가며 ‘두 번째 기회’라는 말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과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전자는 실패를 제거할 수 있지만 후자는 실패까지 포함된 시간을 자신의 생으로 끌어안는다. 티저북에서 ‘모든 것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삶은 정말 더 나아질까’를 고민했다면, 완성된 이야기는 시선을 되돌릴 수 없는 것들로 옮겨놓았다. 무엇을 다시 할 수 있는지를 세어보는 동안 정작 중요했던 것은 다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함께 살아낸 시간, 죽음이 그어놓은 경계, 그리고 선택의 순간마다 조금씩 달라져온 자기 자신.

삶은 완성본이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과 고쳐 쓰고 싶은 장면까지 같은 페이지 위에 남아 있기에 한 사람의 생이 된다. 사랑 역시 가장 좋은 선택만을 이어 붙여 완성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트와이스』는 두 번 살 수 있는 한 사람의 생을 길게 돌아, 한 번밖에 살아낼 수 없는 것들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두 번째 삶이 첫 번째 삶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더 완벽해서가 아니라, 이미 지나온 시간을 품은 채 다시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서출판 인플루엔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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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의 생존 가이드
조애나 치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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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던 시절, 아픈 사람의 곁에서 하루를 보내고 병원 문을 나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운 날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몸을 살피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내 마음이 왜 그토록 지쳐 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피로와 무기력이 쌓일수록 원인은 자연스레 나를 향했다. 정신머리가 약해빠져서 힘든 걸까. 조금 더 단단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다면 괜찮았을까. 고통 앞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그 오래된 심문을 중단시키며 고통의 방향을 개인의 내면에서 그를 둘러싼 세계로 돌린다. 정신과 의사 조애나 치크는 불안과 우울, 분노와 무기력을 개인의 결함이나 고장으로만 해석하는 현대 정신의학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족과 관계, 노동과 경쟁, 문화와 차별, 한 사회가 지나온 역사까지 수많은 조건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첫 번째 물음도 ‘당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서 ‘당신은 어떤 세계를 살아왔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과 세계를 서로 독립된 두 항으로 나누어온 익숙한 사고를 흔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는 사유다. 모든 존재가 무수한 조건과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루며 존재한다면, 세상과 분리된 채 홀로 완성된 ‘나’ 역시 성립하기 힘들다. 가족의 언어와 타인의 시선, 시대의 규범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들이 겹겹이 스며들어 지금의 한 사람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 『It’s not you. It’s the world』는 제목 그대로 ‘네가 아니라 세상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그 문장을 오래 따라가다 보면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가르는 경계부터 희미해진다. 세상은 언제나 나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 안에도 이미 수많은 세계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치크는 불안과 슬픔, 분노와 수치심처럼 우리가 흔히 불편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생존을 위해 진화한 ‘경보’로 바라본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울리는 화재경보기의 소음을 고장이라고 부를 수 없듯, 위험한 환경에 반응하는 마음의 동요 역시 무조건 제거해야 할 오류로 취급할 수 없다. 슬픔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가리키고, 분노는 침범당한 경계와 부당함을 감지하며, 불안은 안전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린다. 감정은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는 삶의 조건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다. 여기에서 건강과 정상성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당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는 상태, 상실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는 상태, 끊임없는 경쟁과 과로를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능숙하게 적응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마음까지 건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불안과 우울이 언제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든 고통을 제거해야 할 병리로만 취급하는 순간 그 감정이 가리키던 세계의 문제까지 함께 지워질 수 있다. 병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때로는 인간의 결함보다 감각이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세계가 마음에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속되는 스트레스와 차별, 수치심과 트라우마는 신경계와 몸의 반응 방식에도 스며든다. 개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족의 역사가 나타나고, 가족의 역사를 더 멀리 따라가면 한 사회가 지나온 시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경계와 침묵, 복종과 회피가 세대를 건너 또 다른 사람의 몸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메를로퐁티가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정신과 그것을 담은 몸으로 분리하지 않았듯, 몸은 이미 세계와 접촉하며 살아온 역사를 품는다. 사회는 인간의 바깥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오래 지속된 세계는 어느새 몸의 기억이 되고, 몸은 자신이 통과해온 세계의 일부를 간직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기원을 환경과 역사에서 찾는 순간 또 하나의 난처한 문제가 생긴다. 세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삶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놓여야 할까.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행동을 만들었다면 타인에게 입힌 상처마저 설명만으로 용서될 수 있을까. 치크가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면서도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어떤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책임을 내려놓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라, 무엇을 물려받았고 무엇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태어날 가족도 시대도 몸도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일어난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그럼에도 과거의 반응이 현재의 운전대를 빼앗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익숙한 행동 대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쪽으로 움직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유를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면 인간은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자신을 형성한 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과 맺는 관계를 달리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면 주체성은 다시 가능해진다.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지 않는 것과 자신의 몫까지 세상에 넘겨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주체성이 타인을 향할 때 치크가 중요하게 내세우는 태도가 연민이다. 우리는 아이가 스트레스에 압도되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때 비교적 쉽게 행동 뒤의 사정을 헤아린다. 그러나 성인의 잘못 앞에서는 행동과 사람을 곧잘 하나로 묶는다. 누군가가 잔인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은 어느새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잔인한 인간이라는 판결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적용했던 생태학적 시선을 타인에게도 적용한다면 조금 다른 이해가 가능해진다. 한 사람의 행동에는 그가 살아온 관계와 상처, 미처 자각하지 못한 두려움과 오래된 생존 방식이 함께 작동할 수 있다. 연민은 잘못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에는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한 인간 전체를 그 잘못과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조건을 이해하는 일이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통로가 되듯, 타인의 행동을 만들어낸 맥락을 헤아리는 일도 비난과 수치심이 다시 폭력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끊을 가능성을 만든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처가 전염된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치유 또한 전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책에서 자기돌봄은 개인의 평온만을 위한 기술로 머물 수 없다. 명상하고 호흡하고 마음을 다독인 뒤 다시 똑같은 환경으로 돌아가 견디는 능력만 키운다면 치유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또 하나의 훈련이 되고 만다. 한 사람을 아프게 하는 관계와 공동체, 사회의 조건이 그대로인 채 개인에게 더 강한 회복력만 요구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치크가 말하듯 병든 세계에서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건강해질 수 없으며, 우리를 계속 아프게 하는 문제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 자기돌봄이 공동체돌봄으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고통의 시작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세계를 향한다. 나를 돌본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며, 동시에 앞으로 내가 어떤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된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물려주는 세계인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의 나약함부터 묻는 세계인지, 혹은 서로의 경보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살아갈 조건을 고쳐나가는 세계인지. 세상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우리 또한 서로에게 하나의 세상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치유는 오직 한 사람의 일로만 남을 수 없다.

✏️도서출판 푸른숲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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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지도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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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케쓰의 이야기는 대개 너무 익숙해서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들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별할 것 없는 집과 방,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평면도처럼 이미 용도와 의미를 알고 있다고 믿는 사물에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끼워 넣는다. 완전히 낯선 것은 경계할 수 있지만 익숙한 것은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익숙해야 할 대상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일 때의 불안은 더욱 크다. 『이상한 지도』가 선택한 지도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를 점과 선과 면으로 정돈하여 길을 알려 주어야 할 도구가 도리어 방향감각을 흔들고, 있어서는 안 될 것과 설명되지 않는 표시들이 지금까지 믿었던 질서를 의심하게 한다.

우케쓰의 독특함은 이 ‘이상함’을 이야기의 소재로만 사용하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소설에서 기묘한 집과 그림, 지도는 읽어야 할 대상인 동시에 독자가 직접 들여다보고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다. 『이상한 지도』 곳곳에 삽입된 지도와 도면, 수기와 메모도 사건을 보충하는 장식에 머물지 않는다. 인물과 독자가 같은 기록을 바라보고 같은 표시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독자의 위치를 관찰자에서 조사자로 옮겨 놓는다. 문장을 읽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앞장을 펼쳐 두 개의 흔적을 대조하는 행위 자체가 독서의 일부가 된다. 우케쓰는 서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가 책을 읽는 순서와 시선이 움직이는 방식까지 설계한다. 짧고 평이한 문장, 친절할 정도로 많은 도판, 빠른 장면 전환은 언뜻 문학적인 밀도를 덜어내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단순함이 독자에게 추론할 자리를 내어준다. 읽는 행위와 푸는 행위의 경계를 흐리는 것, 그것이 ‘이상한 시리즈’가 구축해 온 고유한 문법이다.

그렇게 불길한 흔적을 마주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다음 단서를 향한다. “알고 싶은 마음은 말릴 수 없는 법”(p.424)이라는 작품 속 문장에 오래 시선이 붙잡힌 것도 그래서다. 이 한마디에는 사건의 비밀을 좇는 인물과 그 비밀을 기어이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독자가 함께 들어 있다. 당장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진실에도 인간은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어준다. 설명되지 않는 하나의 점을 발견하면 그 옆의 점을 찾고, 두 점 사이에 선을 긋고 싶어진다. 하나의 답이 새로운 의문으로 이어지는 동안 독자는 스스로 이야기의 빈자리를 채우며 앞으로 나아간다. 미스터리 추리 문학의 쾌감은 정답을 확인하는 순간보다 무질서해 보였던 것들 사이에서 관계를 발견하고, 흩어진 단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해 가는 과정에서 더 크게 발생한다. 우케쓰는 이 인간적인 호기심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상한 지도』는 그 추리의 원리를 ‘지도’라는 소재와 절묘하게 포개 놓는다. 지도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정보 가운데 무엇을 표시하고 무엇을 생략할지 선택하여 만든 재현이다. 산과 강, 도로와 건물은 그릴 수 있어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의 두려움과 욕망, 오래 묻혀 있던 기억까지 같은 방식으로 표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지도를 읽는 일은 어느 순간 장소를 확인하는 행위에서 벗어나 무엇이 기록되었고 무엇이 지워졌는지 살피는 일로 변한다. 처음에는 기괴하기만 했던 흔적이 다른 의미를 얻고, 무의미해 보였던 표시에서 누군가의 의도가 발견되면서 지도는 공간의 축소판에서 시간을 품은 기록으로 확장된다. 사실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과 한 장소의 진실을 온전히 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도 그 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이상한 지도』에서 ‘길’은 공간을 이동하기 위한 선 이상의 의미를 얻는다. 누군가에게 지도는 목적지까지 편리하게 도착하기 위한 도구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때의 길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니다. 지금과 다른 삶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자유의 형태다. 작품 속 어떤 흔적들이 품고 있던 의미를 알게 된 뒤, 처음에는 기괴하게만 보였던 지도는 비로소 그 안에 감춰 두었던 의미를 내보인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이미지 속에는 누군가의 절박함과 염원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길을 찾는 사람에게 지도 한 장은 세상을 축소한 그림을 넘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삶을 먼저 그려 보는 일이 된다.

이쯤에서 제목에 붙은 ‘이상한’이라는 단어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처음에는 지도 자체가 이상하다. 설명되지 않는 그림과 어긋난 방향, 서로 맞지 않는 정보가 불안을 만든다. 그러나 그 흔적의 사정을 따라갈수록 종이 위의 기괴함보다 그것을 만들어 낸 현실 쪽이 더욱 낯설어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고,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기록될 수 없었으며, 한 시대의 선택과 침묵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른 삶에 흔적을 남긴다. 가장 기괴한 것은 그림 속 존재가 아니라 그런 흔적을 필요로 했던 현실이다. 우케쓰는 괴이한 이미지로 독자를 끌어들인 뒤 그 이미지에 부여했던 의미를 뒤집으며 공포의 방향을 인간과 사회 쪽으로 돌려놓는다. 초자연적인 것의 외형을 빌려 현실의 비정상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작품이 단순한 퍼즐 미스터리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도 위에 남은 흔적처럼 과거의 선택과 침묵도 사건이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감춘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알지 못하는 삶의 조건이 되고, 오래전에 내려진 선택은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현재에까지 개입한다. 『이상한 지도』에서 과거를 추적하는 일은 그래서 지나간 사건의 전모를 복원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가 어떤 과거들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점과 선과 면은 이 작품에서 수수께끼를 구성하는 방식인 동시에 이야기가 인간의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던 사건들이 점으로 흩어져 있고, 추리는 그 점들을 이어 선을 만들며, 여러 선이 연결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면이 나타난다. 인간 또한 지나온 시간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당시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사건과 만남, 상실과 선택을 훗날 다시 연결하며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헤아린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흩어진 과거를 어떤 이야기로 연결할지는 현재의 몫으로 남는다. 『이상한 지도』에서 지도 해독이 점차 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시간을 읽는 일로 넓어지는 과정은 이번 작품이 전작보다 한층 서사적인 인상을 주는 이유다. 퍼즐을 푸는 재미 위에 한 사람이 과거와 관계 맺으며 자신의 좌표를 찾아가는 성장의 움직임이 겹쳐진다.

이러한 변화는 우케쓰라는 작가에게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상한 시리즈’의 강점은 언제나 압도적인 문장이나 복잡한 심리 묘사보다 평범한 사물에 의심을 심고 독자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게 만드는 구성에 있었다. 『이상한 지도』는 그 장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퍼즐의 규모를 한 사람의 가족과 오래된 장소, 여러 시대가 포개진 이야기까지 넓힌다. 이전 작품에서 그림과 도면이 주로 수수께끼를 여는 열쇠였다면 이번 지도는 수수께끼를 풀고 난 뒤에도 인물들이 지나온 시간과 선택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매개가 된다. 시각적 장치를 통해 독자를 끌어들이는 대중적인 감각과, 그 장치에 서사적인 의미를 축적하려는 시도가 함께 보이는 작품이다.

평범한 단서에서 출발해 미처 보지 못했던 의미를 끌어내는 우케쓰의 방식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더 반가운 것은 익숙한 공식을 반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형식 안에서 조금 더 먼 곳까지 나아갔다는 점이다. 지도 한 장을 앞에 두고 시작한 추리는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지나온 시간을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지까지 범위를 넓혀간다.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것에서 이상함을 발견하고, 그 이상함을 외면하지 못해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는 사람들. 어쩌면 우케쓰가 지금까지 자신의 독자에게 건네온 것은 정답보다 그 선을 직접 그어 보고 싶게 만드는 충동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지도』는 그 충동을 가장 넓은 면적 위에 펼쳐 보인 작품이다.

✏️도서출판 리드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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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
사라시나 이사오 지음, 이진원 옮김 / 까치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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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이라면 한 번쯤 『종의 기원』을 읽었다는 말을 해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고전이 있고, 제목을 아는 것만으로도 괜히 뿌듯해지는 책이 있다. 『종의 기원』이 내게는 그랬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막상 첫 장을 펼치면 긴 문장과 낯선 생물학적 논의에 눈이 핑핑 돌았고, 어느새 책을 베개 삼아 잠들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의 기원을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제목은 꽤 솔직하고 유쾌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제목이 처음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진화’라는 말에는 묘하게 서열이 끼어든다. 더 복잡해지고, 더 정교해지고, 더 뛰어난 형태를 향해 생명이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진화를 배워왔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진화의 역사를 조금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그 그림은 꽤 우스워진다. 생명에는 계단도 꼭대기도 없기 때문이다.

사라시나 이사오는 『종의 기원』의 목차를 그대로 따라간다. 1859년 초판의 문장을 직접 가져오고, 다윈이 실제로 무엇을 보았으며 그 관찰에서 어떤 논리를 끌어냈는지를 하나씩 짚는다. 그리고 그 옆에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세운다. 유전 법칙과 DNA에 관한 지식, 다윈이 알 수 없었던 이후의 발견들이 오래된 문장 사이로 들어온다. 19세기의 자연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오늘의 과학을 마주하는 식이다. 덕분에 다윈의 이론은 완성된 기념비처럼 서 있지 않는다. 관찰하고 추론하고 틀리고 수정하는 인간의 지적 작업 속에서 다시 움직인다. 과학의 역사가 한 줄로 곧게 뻗은 연대기가 아니라, 이전의 설명 위에 새로운 설명이 포개지는 층위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다윈의 오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더 흥미로워졌다. 유전 법칙을 몰랐고 DNA도 몰랐던 사람이 어떻게 생물의 변이와 자연선택을 그토록 멀리 밀고 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설명하지 못했던 빈자리를 이후의 과학은 어떻게 메웠을까. 위대한 사상가를 완벽한 모습으로 박제하는 순간, 그의 사상이 태어난 조건과 그가 넘어선 한계까지 함께 사라진다. 이 책은 다윈이 틀렸던 자리까지 펼쳐놓고 그 위에 오늘의 과학을 겹쳐놓는다. 그래서 오히려 무엇이 다윈의 진짜 공헌이었는지가 선명해진다. 과학의 강함은 한 번 세운 설명을 끝까지 지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발견하면 고쳐 쓰고,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설명의 모양까지 바꾸는 데 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에 우리는 너무 많은 의미를 덧붙인다. 살아남은 생물을 보면 으레 그 생물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깔끔하게 생물을 다듬지 않는다. 선택의 압력이 약한 형질은 꽤 느슨하게 남아 있을 수 있고, 쓸모가 줄어든 흔적기관에는 다양한 변이가 나타날 수 있다. 사람의 꼬리뼈처럼 지금의 우리에게 크게 필요하지 않은 구조가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것도 그런 사례다. 생명은 엔지니어가 완성품을 내놓듯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부품을 그대로 달고 있기도 하고, 별로 필요하지 않은 구조를 품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진화는 완벽한 생물을 제작하는 기술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생명 위에서 다음 세대가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유독 굵게 그어놓았던 밑줄도 지워진다. 인간은 진화의 목적지가 아니라 수많은 가지 중 하나다. 특정한 환경과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결과다. 우리보다 먼저 사라진 수많은 생물이 있었고,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생물도 있을 것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에게만 결승선을 그어놓는 순간, 생명의 역사는 인간을 위한 서사가 되어버린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 익숙한 서사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린다. 인간에게 주어졌던 특별석을 치우고 나면, 생명의 역사는 훨씬 넓어진다.

그래서 결국 이 책에서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종의 기원』의 내용보다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쉽게 모든 것에 목적을 부여하고, 현재의 모습을 기준으로 과거를 해석하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월함까지 덧붙인다. 진화론은 그런 습관을 하나씩 걷어낸다. 생명은 어디를 향해 가는지보다 어디에서 왔고 어떤 조건 속에서 달라졌는지를 묻게 한다.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은 승리의 증명도, 완성의 증명도 아니다. 그저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은 『종의 기원』을 대신 읽어주는 책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원전의 목차를 따라가고, 다윈의 문장을 직접 만나고, 그 문장을 오늘의 과학으로 다시 검토하는 구성은 독자에게 원전을 읽을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는 변화가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종의 기원』을 읽었다는 사실이 갖고 싶었다면, 지금은 다윈이 실제로 어떤 문장을 썼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읽은 척’이라는 장난스러운 제목이 오히려 독자를 원전 앞으로 밀어놓는 것이다.

처음에는 『종의 기원』을 읽었다는 이름표가 갖고 싶었다. 책장에 꽂아두고, 누군가 그 책을 이야기하면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름표가 조금 우스워졌다. 다윈이 어떤 문장을 썼는지, 무엇을 몰랐는지, 그가 보았던 생명의 모습이 이후의 과학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되었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종의 기원』은 읽었다고 말하고 싶은 책보다, 직접 펼쳐서 확인하고 싶은 책에 가까워졌다. ‘읽은 척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제목이 결국 가장 영리한 장난이었던 셈이다. 읽은 척하려고 들어갔다가, 원전을 읽지 않고서는 찜찜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도서출판 까치글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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