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의 생존 가이드
조애나 치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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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던 시절, 아픈 사람의 곁에서 하루를 보내고 병원 문을 나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운 날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몸을 살피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내 마음이 왜 그토록 지쳐 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피로와 무기력이 쌓일수록 원인은 자연스레 나를 향했다. 정신머리가 약해빠져서 힘든 걸까. 조금 더 단단하고 무던한 사람이었다면 괜찮았을까. 고통 앞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 자신을 피고석에 세운다.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그 오래된 심문을 중단시키며 고통의 방향을 개인의 내면에서 그를 둘러싼 세계로 돌린다. 정신과 의사 조애나 치크는 불안과 우울, 분노와 무기력을 개인의 결함이나 고장으로만 해석하는 현대 정신의학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족과 관계, 노동과 경쟁, 문화와 차별, 한 사회가 지나온 역사까지 수많은 조건이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첫 번째 물음도 ‘당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서 ‘당신은 어떤 세계를 살아왔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과 세계를 서로 독립된 두 항으로 나누어온 익숙한 사고를 흔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모든 존재와 현상이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원인과 조건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는 사유다. 모든 존재가 무수한 조건과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루며 존재한다면, 세상과 분리된 채 홀로 완성된 ‘나’ 역시 성립하기 힘들다. 가족의 언어와 타인의 시선, 시대의 규범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들이 겹겹이 스며들어 지금의 한 사람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원제 『It’s not you. It’s the world』는 제목 그대로 ‘네가 아니라 세상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그 문장을 오래 따라가다 보면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가르는 경계부터 희미해진다. 세상은 언제나 나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 나라고 부르는 존재 안에도 이미 수많은 세계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치크는 불안과 슬픔, 분노와 수치심처럼 우리가 흔히 불편하다고 여기는 감정을 생존을 위해 진화한 ‘경보’로 바라본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울리는 화재경보기의 소음을 고장이라고 부를 수 없듯, 위험한 환경에 반응하는 마음의 동요 역시 무조건 제거해야 할 오류로 취급할 수 없다. 슬픔은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가리키고, 분노는 침범당한 경계와 부당함을 감지하며, 불안은 안전이 위협받고 있음을 알린다. 감정은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는 삶의 조건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다. 여기에서 건강과 정상성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부당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않는 상태, 상실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는 상태, 끊임없는 경쟁과 과로를 아무렇지 않게 견뎌내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에 능숙하게 적응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마음까지 건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불안과 우울이 언제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모든 고통을 제거해야 할 병리로만 취급하는 순간 그 감정이 가리키던 세계의 문제까지 함께 지워질 수 있다. 병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때로는 인간의 결함보다 감각이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세계가 마음에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속되는 스트레스와 차별, 수치심과 트라우마는 신경계와 몸의 반응 방식에도 스며든다. 개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족의 역사가 나타나고, 가족의 역사를 더 멀리 따라가면 한 사회가 지나온 시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경계와 침묵, 복종과 회피가 세대를 건너 또 다른 사람의 몸에서 반복되기도 한다. 메를로퐁티가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정신과 그것을 담은 몸으로 분리하지 않았듯, 몸은 이미 세계와 접촉하며 살아온 역사를 품는다. 사회는 인간의 바깥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오래 지속된 세계는 어느새 몸의 기억이 되고, 몸은 자신이 통과해온 세계의 일부를 간직한다.

그러나 모든 고통의 기원을 환경과 역사에서 찾는 순간 또 하나의 난처한 문제가 생긴다. 세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면, 삶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놓여야 할까.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행동을 만들었다면 타인에게 입힌 상처마저 설명만으로 용서될 수 있을까. 치크가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면서도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어떤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책임을 내려놓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라, 무엇을 물려받았고 무엇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태어날 가족도 시대도 몸도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일어난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그럼에도 과거의 반응이 현재의 운전대를 빼앗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익숙한 행동 대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쪽으로 움직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유를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면 인간은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자신을 형성한 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과 맺는 관계를 달리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면 주체성은 다시 가능해진다.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지 않는 것과 자신의 몫까지 세상에 넘겨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주체성이 타인을 향할 때 치크가 중요하게 내세우는 태도가 연민이다. 우리는 아이가 스트레스에 압도되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때 비교적 쉽게 행동 뒤의 사정을 헤아린다. 그러나 성인의 잘못 앞에서는 행동과 사람을 곧잘 하나로 묶는다. 누군가가 잔인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은 어느새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잔인한 인간이라는 판결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적용했던 생태학적 시선을 타인에게도 적용한다면 조금 다른 이해가 가능해진다. 한 사람의 행동에는 그가 살아온 관계와 상처, 미처 자각하지 못한 두려움과 오래된 생존 방식이 함께 작동할 수 있다. 연민은 잘못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에는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한 인간 전체를 그 잘못과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조건을 이해하는 일이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통로가 되듯, 타인의 행동을 만들어낸 맥락을 헤아리는 일도 비난과 수치심이 다시 폭력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끊을 가능성을 만든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처가 전염된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치유 또한 전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책에서 자기돌봄은 개인의 평온만을 위한 기술로 머물 수 없다. 명상하고 호흡하고 마음을 다독인 뒤 다시 똑같은 환경으로 돌아가 견디는 능력만 키운다면 치유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또 하나의 훈련이 되고 만다. 한 사람을 아프게 하는 관계와 공동체, 사회의 조건이 그대로인 채 개인에게 더 강한 회복력만 요구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치크가 말하듯 병든 세계에서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건강해질 수 없으며, 우리를 계속 아프게 하는 문제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 자기돌봄이 공동체돌봄으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고통의 시작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세계를 향한다. 나를 돌본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며, 동시에 앞으로 내가 어떤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된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물려주는 세계인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의 나약함부터 묻는 세계인지, 혹은 서로의 경보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살아갈 조건을 고쳐나가는 세계인지. 세상이 우리를 만들었다면 우리 또한 서로에게 하나의 세상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치유는 오직 한 사람의 일로만 남을 수 없다.

✏️도서출판 푸른숲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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